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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가정폭력 사슬 끊었다, 이웃의 신고전화 한 통이

소한마리-화절령- 2015. 9. 7. 11:01

12년 가정폭력 사슬 끊었다, 이웃의 신고전화 한 통이

"경찰 이모, 엄마 좀 도와주세요" 10세 소녀 소원 이뤄연합뉴스 | 입력 2015.09.07. 06:40 | 수정 2015.09.07. 09:14

"경찰 이모, 엄마 좀 도와주세요" 10세 소녀 소원 이뤄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지난 7월 서울 도봉구의 한 카페. 휴대전화가 '띠리리리…' 울리자 A씨가 움찔한다. 불안한 표정으로 번호를 보더니 안도한 듯 통화한다.

"응, 아빠가 오늘은 술 안 마시고 일찍 온대. 엄마 지금 경찰 이모랑 얘기하고 있어."

그러고는 전화기를 건넨다. "은서(가명)가 전화 좀 바꿔달라고 하네요."

전화기를 받아든 서울 도봉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유현명 경위는 전화기 너머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낀다.

"경찰 이모, 우리 엄마 얘기 좀 잘 들어주세요. 우리 엄마 너무 불쌍해요."

유 경위가 만난 40대 여성 A씨는 가정폭력 피해자였다. 앙상한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가렸지만 눈언저리에 폭력의 흔적이 선명했다.

A씨는 12년 전 애 둘 딸린 이혼남과 결혼했다. 돈벌이는 시원찮아도 자상한 점에 끌렸다.

그런데 A씨가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게 있었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괴물'로 변했다.

남편의 폭행으로 첫 아이를 잃었다. 출산을 목전에 두고 벌어진 끔찍한 일이었다. 이혼하려 했지만 남편이 무릎을 꿇었고 초등학생이던 남편 전처의 자식들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욕설과 구타가 쏟아졌다. 남편은 직성이 풀려야 잠들었고, A씨도 그제야 울면서 잠들었다.

2005년 예쁜 딸 은서를 낳았다. 남편이 택시를 시작했지만 가세는 더 기울었다. 전세에서 나와 월세 지하방으로 옮겼고 중고생이 된 남편 전처의 아이들은 친할머니 집으로 갔다.

많은 게 바뀌는 와중에도 남편의 주사(酒邪)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심해졌다. 10년 새 두 번 정식 이혼 절차를 밟았지만 남편은 번번이 버텼다.

A씨는 아픈 와중에도 봉제공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무엇보다 은서를 다른 애들처럼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싶어 이를 악물고 멍든 몸을 일으켜 일했다.

그러다 6월 28일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술 취한 남편은 시조카가 집에 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A씨를 때렸고, 보다 못한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이것은 결혼 12년 만에 첫 경찰 신고였다.

A씨의 상황을 알게 된 도봉경찰서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유 경위 등 경찰관과 도봉구청 공무원, 자문 변호사 등이 머리를 맞대고 A씨의 구제 방법을 논의했다.

최우선 과제는 A씨와 은서를 남편과 분리하는 것이었다.

구청이 A씨가 자립할 수 있도록 긴급생활지원금 30만원과 희망온돌 생계비 120만원을 지원했다. 구청은 A씨가 봉제기술을 가진 점을 참작해 직업도 알선해 주기로 했다.

경찰은 A씨와 은서가 인근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게 하고,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수십만원의 성금도 모아 전달했다.

A씨에 대한 집중관리는 남편의 변화로 이어졌다. 남편은 경찰의 감시를 의식해 7월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지난달 말에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현재 A씨는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

남편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A씨도 숨통이 트였고 은서를 학원에 보낼 여유도 생겼다. 막상 은서를 피아노학원에 보내려 했더니 정작 다니고 싶다는 곳은 태권도학원이었다. 아이는 이제 막 허리에 흰띠를 둘렀다.

7일 이 사연을 전한 유 경위는 "A씨는 '경찰에 신고하면 이렇게까지 관리해 주는 줄 정말 몰랐다'며 고마워했다"며 "무엇보다 목소리가 한층 밝아져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며 웃어보였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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