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햇빛과 따뜻하고 고요한 공기 -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
오늘날 인상파 만큼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미술 사조도 아마 없을 겁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처음 만남은 파리의 센 강변에 있던 샤를르 쉬스 미술학교 Academie de Charles Suisse에서 이뤄집니다. 여기서 그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노아르 Pierre-Auguste Renoir, 프레데릭 바지으 Frederic Bazille, 알프레드 시슬리 Alfred Sisley 등을 만납니다.인상파의 핵심 그룹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인상파 인상짓기
인상파가 태동하는 19세기 중엽 세계 미술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고 모든 화가들의 꿈은 관전인 살롱전(le Salon de Paris)에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2년에 한번씩 열리다 나중에는 매년 열리게됐던 살롱전은 화가들이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고 그림을 팔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신청자가 많다보니 출품을 위해서는 심사위원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지요. 국립 미술 아카데미와 과거의 수상자들로 구성되는 심사위원들은 워낙 보수적이어서 전통을 벗어난 모든 새로운 시도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성향은 곧 일반 대중들의 기호를 결정짓는 요인이기도 했지요. 따라서 우리의 주인공들인 미래의 인상파 화가들이 살롱전에 출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마네 역시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내놨다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맙니다. 당시 그는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않는 작품들로 이미 상당한 악명을 얻고 있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 낙선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위해 그들에게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1863년에 열린 낙선자 전시회(le Salon des refuses)가 그것이지요. 세잔느와 피사로를 비롯한 미래의 인상파 화가들이 이 낙선자 전시회에 참가합니다.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 것도 낙선자 전시회를 통해서입니다. 자,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다시 한번 보시죠. Le dejeuner sur l'herbe, 1863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파의 화풍에 비한다면 훨씬 전통적 기법을 따르고 있는 이 그림이 전문가와 대중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은 우선 여인의 누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누드는 많은 그림들의 소재가 되어왔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네의 누드는 인체를 이상화시키는 그리스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있습니다. 마네의 친척들인 두 신사와 마찬가지로 누드의 여인 역시 비너스나 아프로디테가 아닌 현실 속의 인물입니다. 관람객들은 그림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겠지요. 결코 익숙하지않은 일이었죠. 그런데 숙녀가 남자들 앞에서 그것도 파리 시민들이 자주 애용하는 휴식처인 블론뉴 숲에서 알몸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화가 날 법도 합니다. 이와 함께 명암 대비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처리하지않고 흑과 백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것도 당시의 화풍으로는 방정맞은 짓이었겠지요. Olympia, 1863 마네가 1865년 살롱전에 올랭피아(Olympia)를 출품했을때 비평가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역시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싯누런 배때기의 오달리스크'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비너스' '암컷 고릴라'등 오만가지 독설이 퍼부어졌지요. 마네도 마네지만 이 그림의 모델이었던 빅토린느 뫼랑(Victorine Meurand)이라는 아가씨가 너무 가엽습니다. 예쁘장한 얼굴과 가냘픈 몸매에 고릴라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이 그림은 마네가 이탈리아에 여행을 갔다가 피렌체의 우피찌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에서 본 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입니다. 지금도 우피찌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비교해볼까요. La Venus d'Urbino, 1538 우아, 그 자체 아닙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니 화가 안나겠어요. 마네는 이 사랑의 여신을 현실의 인물,그것도 창녀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올랭피아라고 지어줍니다. 올랭피아가 그리스 신들이 살고 있던 올림푸스산을 빗댄 것은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검은 뒷 배경과 구별도 잘 안되는 흑인 하녀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통적 그림에 대한 통렬한 조롱입니다. '올랭피아'가 살롱전에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시인 보들레르의 강력한 주장 덕분이었습니다. 역시 위대한 인물은 공연히 위대한게 아닙니다. 시대를 앞서는 혜안이 그들에게는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살롱전 관계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올랭피아'를 사람들의 눈길이 거의 닿지않는 천장 가까이 높게 걸었지요. 그래서 관람객들의 분노는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올랭피아가 자신의 최대 걸작이라고 평가하던 마네가 얼마나 열받았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40년뒤 이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리라고 보들레르 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현재는 다른 인상파 그림들과 함께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졌지요.
Le Fifre, 1866 이듬해 마네는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이 유명한 피리부는 소년(Le fifre)을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떨어지고 맙니다. 전해에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또 걸어주고 싶었겠어요? 거절 이유는 인물의 검은색,빨간색등의 원색이 배경의 중간색과 지나치게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죠.한마디로 "제발 좀 튀지말아라"는 뜻이지요.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군지 아시겠어요? 맞습니다. 누런 배때기의 오달리스크, 가엾은 우리의 빅토린느 뫼랑 아가씨 입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의 누드 여인도 같은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믿지못하겠네요.3년 전에 그렇게 풍만하던 아줌마가 그동안 다이어트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19세기에 빈번했던 제국주의 전쟁은 수많은 고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원인 제공자인 군대가 고아들을 책임져야 했죠. 많은 소년들이 군대에 들어가 전령,군악대원등으로 활약했습니다. 우리가 즐겁게 부르는 캐롤의 '북치는 소년'도 알고 보면 그런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도 이처럼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신화적 요소도 없습니다. 화가는 현실을 나타내는데 불필요한 장식들을 과감히 삭제할 줄 알았지만 동시대인들은 아무 것도 없는 밋밋한 배경의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만이 그들과 달랐죠. 아직은 젊은 작가에 불과했던 에밀 졸라(Emile Zola)가 그입니다. 역시 위대한 인물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이 또 한번 입증됩니다. 졸라는 당시 그가 기자로 일하던 일간지 레벤느망(l'Evenement)에 마네를 변호하는 기사를 씁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인정해야 한다.그는 미래의 대가다. 내가 만약 부자라면 그의 그림을 몽땅 사겠다." 그러나 불쌍한 우리의 졸라는 이 기사를 쓴뒤 신문사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물론 돈이 없어 그림을 사지도 못했지요.
La fin prematuree/ 준비없는 종말
1866년 이후 마네는 파리의 바티뇰 대로(Boulevard des Batignolles)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를 아지트로 삼습니다. 형님을 찾아 모네와 르노아르,바지으 등이 카페 게르부아로 모여들지요.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을 벌였겠지요. 그중에는 앙리 팡탕-라투르(Henri Fantin-Latour)라는 화가도 끼어듭니다. 그가 마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린 그림이 재미있습니다.졸지에 실업자가 된 에밀 졸라도 보입니다. ![]() Un atelier aux Batignolles(바티뇰 아틀리에) 1870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앉은 이가 마네, 그 옆에 앉은 사람은 조각가인 자샤리 아스트뤽입니다.서있는 사람들은 왼쪽부터 독일 출신 화가 오토 숄데러,르노아르,에드몽 매트르.에밀 졸라.프레데릭 바지으,클로드 모네지요. 이 무렵 마네의 친구였던 에드가 드가(Edgar Degas)도 이 그룹에 합류합니다. 그는 인상파의 주요 화가중 유일한 귀족 출신이었지만 경마장과 연극 무대 풍경을 그린 그림들로 악명을 얻고 있었죠. 이와 함께 피사로 세잔느,시슬리등도 때때로 이들의 토론에 참가합니다. 모네와 르노아르,바지으는 카페 게르부아 근처에 아틀리에를 하나 얻어 함께 작업을 합니다. 공동작업실이라고는 하지만 의사였던 바지으의 아틀리에에 모네와 르노아르가 빌붙어 있었다는 표현이 아마도 더 정확할 겁니다. ![]() L'atelier de Bazille(바지으의 아틀리에), 1870 여기에도 에밀 졸라가 등장합니다. 계단 위에 서서 밑에 앉아있는 르노아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죠. 뭐, 당시 별 볼일 없는 백수였을테니까 얼마나 시간 때우기 좋은 아지트였겠어요. 1867년 마네에 대한 최초의 비평서를 쓴 것도 졸라죠. 팡탕-라투르의 소개로 마네는 베르트 모리소(Berthe Morisot)를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녀는 인상파 그룹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이기도 했죠. 여성 특유의 섬세한 인상을 표현한 그녀의 작품들은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 Le repos(휴식), 1870 마네 작(모델이 모리소) 이제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마네의 카페에서,바지으의 아틀리에에서 서로의 의견과 경험을 교환하고 같은 주제에 대해 공동작업을 벌이기도 합니다. 라 그르누이에르라는 이름의 호반 카페 풍경을 모네와 르노아르가 그렸습니다. 느낌이 많이 비슷하죠? ![]() La grenouillere, Monet,1869 ![]() La grenouillere, Renoir, 1869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이곳은 파리 근교의 센 강에 있는 섬으로 지금도 '인상파의 섬'이라고 이름붙여져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한번 가보십시오. 음식 맛도 그럴 듯하고 분위기도 좋은 식당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역시 살롱전에 출품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마네와 드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귀족 출신인 드가와 부유한 부르조아 가문의 마네외에는 모두 보잘 것 없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살롱전 심사 기준에는 출신 성분도 있었던 모양이죠. 특히 세잔느는 지나치게 튀는 스타일로 단 한번도 심사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1870년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이 미래의 인상파 그룹은 해체를 맞이합니다. 이 와중에 바지으는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준비없는 종말은 그러나 위대한 성공의 싹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인상파,그들만의 전시회 Expositions(1874-1886) 이를 위해 드가와 피사로,르노아르가 주축이 돼 1873?'예술가들의 익명회사'를 차리지요. 오직 피사로 만이 8번 모두 참가합니다. 드가와 모리소는 7번,기요맹이 6번,모네와 카이으보트가 5번,르노아르,시슬리,고갱이 4번에 걸쳐 참여합니다. 세잔느는 단지 두번만 작품을 냅니다. 그들의 야심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30명의 작가들이 1백67점의 작품을 출품하는 큰잔치가 됐지요. La loge, 1874 살롱전이 매일 평균 1만명 정도의 관람객을 끌어모은 반면 인상파 전시회를 보러 온 사람은 첫날 1백75명, 마지막날 54명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회사도 문을 닫고 말았죠. 이 전시회에서는 모네의 작품 '일본 여인(La japonaise)'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합니다.
모네를 비롯한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문화에 깊은 호기심을 나타내며 실제로 자신들의 작품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죠. 카이으보트는 자신이 주도한 이 전시회에 모네와 함께 '생라자르역(Gare St.Lazare-Le pont de l'Europe)'이라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출품합니다. Gare St.Lazare, Monet, 1876
영화 아멜리에서 아멜리 집 아래층에 사는 노인이 1년에 하나씩 카피한다는 그림입니다.뒤쪽에 물을 마시는 소녀의 시선이 허공을 향하고 있어 가장 그리기 어렵다고 고백하지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그림입니다.르노아르의 그림을 보노라면 그냥 즐거워집니다. 아무튼 이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상파들은 'My way'를 부릅니다.각자의 길을 걷기위해 흩어지는거죠. 1886년 마지막 여덟번째 전시회가 열리지만 여기에는 르노아르와 모네,시슬리,카이으보트등이 빠집니다. 뒤랑-뤼엘이 1886년 기획한 미국 전시회는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인상파의 그림이 프랑스보다 미국의 미술관에 많이 소장돼 있는 이유도 그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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