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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다윈의 진화론 바탕은 노예제 혐오"

소한마리-화절령- 2009. 1. 30. 12:18

<과학> "다윈의 진화론 바탕은 노예제 혐오"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1.30 10:23


(서울=연합뉴스) 진화와 종의 기원에 관한 찰스 다윈의 혁명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노예제도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 새로운 책이 출판됐다.

에이드리언 데즈먼드와 제임스 무어 등 두 작가가 공동 집필한 `다윈의 신성한 대의(Darwin's Sacred Cause)'는 흑인과 백인이 별개의 종이라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다윈이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이론을 내놓게 됐는지 그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고 있다고 BBC뉴스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저자들은 갈라파고스의 앵무새와 핀치새, 코끼리거북과 땅늘보가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는 그가 목격한 야만적인 노예제도에 대한 혐오감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다윈 일가의 편지들과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의 기록 등 수많은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다윈이 직접 표현하진 않았지만 `노예제도 철폐'라는 신성한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했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동안 항해하면서 흑인 노예들이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했으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예들에게 "자식들을 팔아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주인들의 얘기를 가장 끔찍하게 여겼다.

다윈은 이에 대해 "피를 끓게 만드는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윈은 1831부터 1836까지 비글호 여행을 끝내고 런던에 정착했으며 1838년 `자연선택' 이론을 발표한 뒤엔 켄트주의 다운 마을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1845년에 발표한 비글호 항해기에서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항의 한마디 못하는 자신이 어린애처럼 무력하게 느껴졌다"고 표현했지만 귀국 후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뒤집는 이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ㅣ

다윈이 1858년까지 이렇다 할 저서나 논문을 발표하지 않은 것은 당시 다른 학자들로부터도 제기되기 시작한 진화론이 케임브리지 대학 학우들 사이에서 극도의 혐오감을 자아냈던 현실로 미뤄볼 때 이해가 가는 대목이라고 저자들은 지적했다

당시 한 자연연구가는 진화론에 대해 "혁명가들이 토해 놓은 역겨운 쓰레기"라고 매도했고 실제로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교회 세력의 기반인 창조론 신화를 뒤집기 위해 독자적인 진화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다윈의 교수였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애덤 세지위크는 1844년 진화론에 관한 한 책을 "추잡한" 것이라면서 "경멸, 멸시, 조롱" 등의 표현을 쏟아붓을 정도였다.

저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다윈이 침묵을 지키면서도 서로 다른 여러 종의 `공동조상'이라는 반노예적 이론의 근거를 제시하게 된 동기를 그의 가정 배경에서 찾고 있다.

다윈의 외할아버지인 조시아 웨지우드는 유명한 도자기 업체 소유주로 웨지우드사의 대표적인 카메오(양각 세공품)에는 무릎 꿇은 흑인 노예가 "나는 사람이 아니고 형제가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조시아는 장장 5만6천㎞의 항해를 통해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노예무역의 실태를 조사한 반노예 운동가 토머스 클라크슨에게 자금을 대기도 했다.

다윈의 외삼촌이자 장인인 조스 웨지우드는 런던의 전시장 매각대금을 반노예단체에 기부했으며 영국 깃발 아래 노예의 모습과 함께 "신은 하나의 피로 모든 민족을 만드셨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상표를 사용했다. 당시는 아메리카에서 아직도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1850년대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다윈은 에든버러 대학에 재학중이던 16살 해방된 노예와 들판을 누비면서 "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이 무렵 영국을 방문한 미국인들은 백인과 흑인이 친구로 지내는 것을 "역겨운" 일로 간주했다.

저자들은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서 돌아온지 몇 달 만에 공동자손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면서 과학 연구에 정치와 도덕이 개입하는 것을 `오염'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윈은 이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사례라고 강조했다.

youngn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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