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물다 간...

"한창 사랑받던 그때 딱 예감했어요" "그 인기가 나를 내팽개칠 거란 걸”

소한마리-화절령- 2013. 3. 7. 22:37

 

"한창 사랑받던 그때 딱 예감했어요" "그 인기가 나를 내팽개칠 거란 걸”
‘파파로티’ 한석규
왜 연기를 하냐면…한없이 나약하다
누구보다 강해지는 그런 인물 느껴보고 싶어서…
세계일보|
입력 2013.03.07 21:52
 [08]

배우 한석규(49)가 대중 앞으로 돌아왔다.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속내를 털어놓은 그는 새 영화 '파파로티' 개봉을 앞두고 언론과 만났다. 그간 인터뷰에 인색했던 그로서는 이례적인 행보다. 한석규는 1990년대 후반 충무로 최고스타였지만 2000년대 들어 부침을 겪었다. 다시 그의 연기가 각인되기 시작한 건 2011년 T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부터. 이어 올해 '베를린'으로 700만 관객과 만나며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파파로티'에서는 의욕 없이 학생들과 아옹다옹하는 시골 교사로 분해 한석규만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인다.

우리 나이로 지천명인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슬럼프를 겪어본 사람의 지혜가 엿보였다. 한석규가 생각하는 연기와 배우, 앞으로의 행보를 그의 입말 그대로 옮긴다. 평소 사람 많은 곳보다 혼자 있기를 즐기는 그는 점잖은 어투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인터뷰와 배우·연기

'뿌리 깊은 나무' 때 인터뷰가 많이 들어왔죠. 잘난 척할까봐 안 했어요. 연기에 말을 보태는 게 미사여구 같더라고요. 스스로에게 취해서 근사하게 하는 게 싫고. 시간이 지나서 제가 했던 인터뷰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말은 잘하는구나, ××야.'

고등학교 2학년 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초연을 봤어요. 그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어요. 이때부터 배우를 꿈꿨어요. 동국대에 들어갔어요. (최)민식 형이 저를 '개규'라고 불렀어요. 특별한 의미는 없고, 당시 아무한테나 '개'자를 붙였어요. '개식이형' '개규'.

뮤지컬 얘기를 왜 하냐면, 전에는 느낀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관객을 생각하면서 연기한다고 답을 내렸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느끼고 싶어서' 연기한 거였어요. 고등학교 때 '지저스…'를 보고 받았던 감동을 연기하는 순간에도, 관객으로서도 느끼고 싶었던 거예요. 둘은 완전히 다른 답이에요. 쓴맛도 보고, 나이도 먹고 나니 알게 된 거죠. 40대 중후반쯤, 대충 '음란서생'(2006) 찍을 때쯤 깨달은 것 같아요. 이걸 알게 돼서 너무 좋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세종대왕 연기를 다르게 했겠죠.

한 배우의 작품을 쭉 ?어보면 그가 그리려는 사람을 알 수 있어요. 제가 연기하고 싶은 건, 한 단어로 규정 지을 수 없는 모호한 인간이에요. 사람은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떤 때는 한없이 나약하다가도 어떤 때는 누구보다 끈질기고 강해요. 어떤 때 보면 '사람 참 좋아', 어떤 때 보면 '저런 나쁜 놈의 ××가'. 이걸 한꺼번에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해보고 싶어요. 굉장히 진품 연기겠죠.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인내심을 가지라는 거예요. 지치지 않고 기다리는 것. 준비하면 언젠가 기회가 와요. 제가 아직까지 현업에 있는 가장 큰 힘 하나를 꼽으라면 인내심인 것 같아요.

제가 겪은 큰 흐름을 후배들도 겪을 거예요. 이 흐름에는 슬럼프도 포함되죠. 저는 30대 때부터 예감했어요. 연기가 저에게 엄청 큰 기쁨을 줬잖아요. 그렇게 받은 기쁨만큼 분명히 슬픔을 나한테 '맥일' 거다 생각했어요. 나를 내팽개칠 거라고요. 제가 절망한 시간 없이 여태까지 착착착 했으면 글쎄…. 계속되는 (상승곡선은) 없어요. 50∼60대까지… 있을까요? 배우 중에 그런 사람 있나.

제가 TV에서 매일이 슬럼프라고 말했는데요. 진심이에요. 슬럼프를 겪고 극복하면서 사는 거예요. 뚝 떨어졌다가 또 일어나요. 일이나 일 외적으로 '나는 왜 이러나' 하면서요.



◆'파파로티'와 이제훈


새 영화 얘기를 해보죠. '파파로티'는 '뿌리 깊은 나무' 할 때 시나리오를 봤어요. 선생님과 학생이 나오고, 꿈을 찾아서 각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그게 참 좋았어요. 음악교사 '상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한없이 나락에 빠져서 하루하루 생각 없이 꾸역꾸역 사는 인물이 어느 날 장호라는 제자를 보고 분노·질투심에 휩싸이는 마음이었어요. 부럽기도 기쁘기도 한 복잡한 심정, 더 나아가서 이 영화가 청소년들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조그마한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요즘 남자배우는 폭이 넓어요. 겸손 떠는 게 아니라, 나 빼고 다 잘하는 거 같아요. 야, 이건 좀 오버인가요? '파파로티'에 함께 나온 (오)달수나 (조)진웅을 보면 '저 친구는 본능적으로 그걸 갖고 있구나' 싶어요. 부럽지는 않아요. 나는 나대로의 연기를 완성해보겠다고 이러니까.

저는 첫 영화를 (김)혜수와 했는데 둘 다 20대였어요. 40대가 돼서 제 18번째 영화 '이층의 악당'(2010)을 함께 찍었어요. 이 영화를 혜수와 하면서 연기에서 잃었던 걸 많이 찾았어요. '연기는 정말 재미있는 거야,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그 즐거움을 깨달은 기회예요. 당시에 혜수와 15년 만에 만난 거였는데, 또 15년 후에 60대가 돼서 꼭 한번 함께하고 싶어요.

제 욕심 중 하나가, 반 발짝 앞선 영화들을 해보고 싶은 거예요. 관객 뒤에서 쫓아오거나 보조를 맞추는 영화도 좋지만, 반 발짝 살짝 앞서서 끌어주는 영화가 필요해요.

송은아 기자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