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

소한마리-화절령- 2014. 10. 3. 23:13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
고 세 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 형제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주된 질문은, 내가 보기에, ‘신이 없어도 도덕은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그 팽팽한 소설적 긴장도, 실은 사생아인 막내 스메르쟈코프가 ‘신은 없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둘째 아들 이반의 말을 부친을 살해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결국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스메르쟈코프는 자살하고, 내내 불안하던 이반은 죄의식에 붙들리고, 맏아들 드미트리가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 강제노역형에 처해진 후에야, 카라마조프가 비극의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신의 죽음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멸

이 소설에서 내게 각별히 다가왔던 사건은 셋째 아들 알료샤의 사부, 수도사 조시마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생전에 성자로 추앙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자, 원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한다. 그러나 하루도 안 돼 시신이 썩으면서 악취가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는-즉, 신이 보기에는-저주받은 위선자였을지 모른다며 웅성거린다. 이런 반전은 물론 대중의 무지와 일부 수도사들의 질투가 불러온 것이지만, 작가는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조차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무신론자일지 모른다고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보이는 증거를 통해 찾는 한, 신은 이미 거기에 없다. 세상에 편만한 고통을 보며 신을 조롱했던 이반에게도, 시신의 때이른 부패를 보고 조시마의 신앙을 의심했던 사람들에게도, 그 결과는 같다. 최근에 『만들어진 신』으로 유명해진 도킨스와 공격적 인본주의자 히친스가 한편이 돼서 주도했던 ‘신무신론’ 논쟁도 기본맥락과 논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괴테는 “사고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은 알 수 있는 것을 탐구하되 알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숭배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신의 부인은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몰락을 위한 신호탄이었다.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섰지만, 실제로 말(馬)의 기수는 이성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이성은 말-보이는 것에만 반응하는-에 의해 부려지는 도구적 이성으로 그 기능이 점차 축소되었다.

급기야 “사회는 없고, 있는 것은 개인뿐”이라는 호언이 하나의 지배적 담론이 되고, 우리는 어느새 실증할 수 없는 일체의 것들을 무의미한 환상으로 내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령 가장 그럴듯한 교훈을 늘어놓는 지식인들도 막상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걸리면 스스로 말문을 걸어 잠근다. 삶이 말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계개념의 소멸, 공동체의 붕괴가 우리의 정신과 삶 어디서나 맞닥뜨리는 현실이 된지는 벌써 꽤 되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켄 로치가 감독한 < 인부들(The Navigators) >은 민영화로 인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철도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다룬 영화다. 대처 이후의 세기말적 우울이 전면에 흐르는 가운데, 영화는 시장논리가 어떻게 노동자들을 점차 신자유주의의 공모자로 만들어 가는지, 어떻게 그들의 평범했던 일상, 곧 자존심, 활기찬 유머, 동료애, 나아가서 가정과 직장공동체를 서서히 파괴하는지를 잔인할 정도로 덤덤히 보여준다. 생계의 위협 앞에서 동료의 죽음마저 외면하는 주인공들에게 죄의식이 주는 반성적 사유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피해자마저 가해자로 내몰고 가해자의 죄의식을 제도적으로 면제해 주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해악일지 모른다. 어느새 가해의 자리에 서게 된 이들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잡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콜롬비아대학의 앤드류 델방코 교수는 『진정한 미국의 꿈: 희망에 관한 명상』이란 짤막한 저서에서 고통과 쾌락, 욕망과 두려움의 일상 속에 파묻힌 사람들은 영원히 멜랑콜리에 갇히기 쉽다고 말한다.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희망은 눈앞의 잡사에서 벗어나 상징적인 구조물, 곧 내러티브를 만들어 갈 때에만 찾아질 수 있다. 그 내러티브가 광범위하게 공감될 때 우리는 문화를 갖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새삼스럽게 우리의 민낯을 마주하면서, 우린 어떤 내러티브를 공유하는지 낯뜨겁게 자문해 본다. 이제는 신자유주의체제가 길들인 우리의 뻔뻔한 내면에도 레비나스가 말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 들어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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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고세훈
·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 연세대(경제학과), 서울대 대학원(정치학 석사)
·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정치학 박사) 졸업

· 저서
『영국노동당사』 (나남, 1999)
『국가와 복지』 (아연출판사, 2003)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2009)
『영국정치와 국가복지』 (집문당, 2011)
『조지 오웰: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한길사, 2012)
『페이비언 사회주의』(역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역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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