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온 편지 |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김여물(金汝岉, 1548~1592)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신립(申砬)의 종사관이 되어 충주
방어에 나섰다.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쳐야 할 상황에서 그는 새재[鳥嶺]의 지세를 이용하여 방어할 것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신립의 뜻대로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북상해오는 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두 장군은 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각각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앞서 김여물은 충추 전투의 패배를 예견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할 것을 한숨 짓고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과 난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자식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 강씨는 살면서 겪는 애환과 자식 사랑을 편지에 담아 수시로 자녀들에게 보낸다. 7남매의 어머니로서 떨어져 사는 자식들 안부가 늘 궁금했고, 해산을 앞둔 딸이나 몸이 아픈 자녀의 소식을 들으면 달려가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16세기 여성 강씨의 그런 사연이 4백여 년의 세월을 건너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수신자는 셋째 딸 순천 김씨였다. 바로 김여물 장군의 누나이자 인천 채씨 무이(無易)의 아내이다. 40년 전 충주의 비행장 공사로 묘를 이장하다가 김씨의 무덤에서 편지 등의 유물을 얻게 된 것이다. 189건의 간찰에서 120여 통이 친정어머니 강씨의 것인데,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현대어로 번역되었다. 《순천김씨묘출토간찰》이 그것이다. 청음은 강씨를 ‘엄격한 어머니’로 묘사했지만 그녀는 자식들에게 부드럽고 자상한 어머니였다.
아픈 딸을 위로하면서 소주 한 두름을 보낸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아들 김여물에게 보낸 편지도 그 딸이 갖고 있었다. 아마 가까이 사는 형제끼리 부모 편지를 돌려 본 것 같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를 하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 버선을 손수 기워 보내려 한다. 마음이 심란하여 네 아들 옷을 지금까지도 보내지 못하니 내 정신을 알 일이다. 몸은 있고 정신은 간 데 없구나. 그믐날 그리움은 한이 없다”라고 썼다. 정신이 다 나간 상태라고 자신을 설명하는 어머니, 강씨의 마음이 심란한 이유가 있었다. 첩을 얻은 남편과 전쟁을 서울에 살던 신천 강씨는 찰방인 남편 김훈의 임지(任地)로 내려간다. 청도에 와서 보니 남편이 첩을 얻은 거다. 게다가 부리는 종이나 집안의 일이나 첩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의식 강한 강씨의 눈 앞에 졸도를 하고도 남을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나의 위기를 누군가와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딸들에게 편지를 쓴다.
혼잣말처럼 정신없이 되뇌는 강씨. 딸에게 보낸 편지는 주로 첩에 빠진 남편을 질타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네 아버님이 지금 데리고 있는 년이 첩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고 어리석고 간사하고 꾀 많아 자식 말이나 종의 말이나 모두 헐뜯는데도, 오로지 그년에게 붙어서 당신 것을 맡기니…” 다 엎어버리고도 남을 울분이 치솟지만 이 사족 출신의 마님은 자존심과 품위를 져버릴 수 없었다.
강씨의 편지는 계속된다. “괴롭고 용심이 무한 나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만 늘 속 머리 아프고 가슴 답답하고” “밤이면 새도록
울고 앉아 있는 날이 수도 없으니 내 팔자를 한탄한다.” “어느 종이 내 마음 받들어 일을 하여 주겠느냐? 심열(心熱)이 있어, 마음이 아찔하고
너희는 나를 살았는가 여겨도 이승에 몸만 있다.” 아버지 강의(康顗)가 정3품 대도호부사를 지낸 분이지만, 그녀는 벼슬자리에 연연해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벼슬을 빌미로 거들먹거리는 자가 우스울 뿐이다. 다시 말해 강씨는 찰방도 벼슬이랍시고 냉큼 첩을 들인 남편을 한심하게 여긴다.
그녀는 말한다. “재상 자리 사람도 첩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 예순에 맨 끝 찰방된 사람이 호화하여 첩을 얻으니 이 애달픈 노여움을 어디다
풀겠느냐?” 그런데 지속적으로 연달아 날아온 어머니의 편지 사이로 아버지 김훈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딸과 아들 그리고 어머니, 딸과 아들 그리고 아버지, 그들 사이에 무수한 서신이 오고갔을 것이다. 종국에는 첩으로 인한 강씨의
가슴앓이가 막을 내린 듯하다. 한 편지에서 강씨는 “네 아버님께서 나를 살려내고 싶다고 하거늘 그년을 내어 보내더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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