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의 흥미로운 소재로 섬의 역사보다 좋은 것도 없다. 특히 제주도의 역사가 그러하다. 제주도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갖고 있는 나라로 오랜 기간 탐라라 불린 외국이었다. 탐라의 지배자는 백제, 신라, 고려 등에 사신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와 통교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신라를 침범하는 구한(九韓)을 막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목탑의 제4층이 탐라를 의미하는 탁라를 가리킨다 하는데, 이로부터 탐라가 신라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탐라는 고려 천하의 외국이었다 제주도 유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탐라기년』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좌평 벼슬을 갖고 있던 탐라국주 도동음률은 신라 문무왕에게 입조했고, 이후 탐라는 신라로부터 각각 성주와 왕자라는 봉작을 받아 이를 세습했다. 탐라 사람들의 말에 성주는 발님, 왕자는 님자인데 각각 국왕과 부왕(副王)의 성격을 지닌 존재였고 이중에서 성주는 언제나 고씨가 독점했다. 고려 건국 후 탐라국주 고자견은 태자 고말로를 고려 태조에게 보냈는데, 태조 왕건은 성주와 왕자의 봉작을 그대로 사용하게 하면서 세세로 고려에 입조하게 했다.
탐라는 고려라는 천하의 한 외국이었다. 일례로 고려 정종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자 탐라는 사신을 보내 신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즉위 기념 팔관회에도 참석했다. 고려 정종 때 탐라 사람 고유가 고려의 빈공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일도 있었다. 고유는 고려 중앙정부에서 벼슬한 최초의 탐라인이었는데, 고유의 아들 고조기도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의종 때 문하시랑평장사까지 관직이 올랐으며 후일 《고려사》 열전에 입전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탐라에는 군현이 설치되어 고려 관리가 파견되기도 했지만 고려 관리는 토적의 빈번한 저항에 직면했고 탐라의 지배력은 여전히 성주와 왕자에게 있었다. 고려 원종 때 탐라성주는 고려 관리와 협력해 섬 안의 토적의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고려 관리와 함께 몽골에 가서 공식적으로 입조했다. 조선 태종 때 성주 고봉례와 왕자 문충세를 마지막으로 성주와 왕자의 봉작이 폐지된 후에야 탐라는 비로소 조선의 실질적인 지방이 되었다. 조선 태종은 제주도에 기존의 제주목 이외에 대정현과 정의현을 신설하고 각각의 수령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제주도 전역을 지배했다. 이후 제주도는 제주목사 지배 하의 세 고을 체제가 지속되었다. 고득종의 활약, 역사를 더하다 조선의 국왕은 제주목사를 통해 제주도에 유교적인 왕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 태종을 이은 세종은 계축년(1433) 제주도에 기근이 들자 최해산을 안무사 겸 목사로 보내 도민을 진휼하게 했고, 세종의 왕명을 받은 최해산은 제주도에 와서 유교적인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최해산의 임기 중에 제주 관아에 화재가 나서 건물이 소실되자 그는 새로 홍화각을 세웠다. 비록 이 화재로 인해 그간 제주도에 전해지던 오랜 역사 기록이 모두 불타버리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새로 건립된 제주 관아는 조선 정부의 역사적인 제주 통치를 상징하는 위엄 있는 건물이 되었다.
이 중요한 건물 홍화각의 기문을 지은 사람은 제주 출신 고득종이다. 그의 문집 『영곡유고』에 「홍화각기」가 실려 있어 저간의 사정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606칸 새 관아의 낙성식이 열린 날 관아의 이름을 정하려고 고을 어른들을 불렀는데, 고을 어른들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생각해 ‘만경萬景’이라는 이름을 추천했으나 고을 사또 최해산은 조선 국왕의 유교적인 교화를 넓힌다는 뜻에서 ‘홍화弘化’로 결정했다.
조선 세종 대에 세워진 홍화각은 이처럼 제주목사가 항상 제주도에 대한 유교적인 교화를 명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제주도는 제주, 대정, 정의의 세 고을 체제 하에서 각 고을마다 향교가 설립되어 유교 교육이 시행되었다. 물론 조선 전기 제주도에서 유교 교육의 성과는 아직 미미했다. 제주도 현지에서 본격적으로 별시가 시행되기 시작하는 인조 대 이전까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제주 출신 선비들은 극소수였다. 제주도 현지 교육 여건의 불리함도 작용했겠지만 육지에 건너가 응시해야 하는 수험 조건의 불편함도 작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홍화각의 기문을 지은 제주 출신 고득종이 세종 대에 중앙에서 이름을 드날린 것은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고득종은 제주도 성주 출신으로 부친상을 당하자 삼년복을 입어 유교적인 예법을 실천했고, 한양에서 과거 급제한 후 좋은 제주 말을 들여와 도성의 권신들과 사귀며 중앙에서 제주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제주 출신 고관으로 세종 대에 제주도 관련 주요 정부 정책을 자문했고, 국왕의 신임을 받아 관압사(管押使)와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통신사가 되어 일본 무로마치 막부에 다녀왔다. 고득종의 활약으로 그 자손들은 한양에서 ‘의관사족(衣冠士族)’으로 꼽히는 명문이 되었다.
제주도에는 고득종 이후에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전해온다.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한 이야기, 만덕이 제주도민을 구휼한 이야기, 이재수가 민란을 일으킨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이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제주도가 조선의 군현으로 편제되는 시기에 조선의 중앙에서 활약한 제주인 고득종의 일생은 영화나 드라마로 충분히 되살릴 가치가 있다. 세종의 제주 만큼이나 제주의 세종도 흥미로운 테마이다. 제주에서 바라보는 세종시대의 역사상이 한양에서 바라보는 세종시대의 역사상보다 못할 이유는 없다. 우리나라 수많은 섬의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확대하는 훌륭한 소재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