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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귀환

소한마리-화절령- 2017. 12. 15. 07:49
여자들의 귀환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638년 3월, 인조의 조정에서는 병자호란 때 잡혀갔다 돌아온 부녀들을 처치하는 문제로 격론이 일어났다. 이른바 환향녀 논쟁인데, 발단은 신풍부원군 장유(張維)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외아들 장선징의 아내가 적진에서 돌아오자 절개를 잃은 며느리에게 조상 제사를 맡길 수 없다며 이혼을 청하는 단자를 올린 것이다. 당시 장유는 봉림대군의 장인으로 ‘나라 어른’의 자리에 있었다. 한편 속환된 딸의 아버지 한이겸은 사위가 새 장가를 들려고 한다며 노복을 시켜 격쟁하여 그 원통함을 호소했다.

   피로인 협상차 심양에 갔다가 얼마 전 돌아온 좌의정 최명길은 장유의 주장에 ‘알 만한 사람’이 왜 저럴까 하는 심정이었다. 전란으로 인한 포로 부녀의 문제는 임진왜란 직후에도 대두되었지만, 당시의 왕 선조는 부녀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완강했다. 법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족 중에 환향녀를 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병자호란으로 인한 문제도 ‘옛 판례’를 따르기로 이미 결정이 났건만 유독 장유가 사사로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 사람의 소원, 백 집의 원망

   피로인들의 상황을 직접 본 최명길은 장유와 뜻을 같이하는 조정 대신들의 ‘황당한’ 제안에 대처하느라 고군분투한다. 그는 “아내를 속환하려고 많은 사족이 함께 갔는데, 만나자마자 부부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 사람을 만난 듯 했다”며 그곳 분위기를 전했다. 또 속환이 더뎌지자 자결하는 부녀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든 아니든 그녀들에게는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최명길은 장유의 행위가 ‘공익’을 저해하는 것임을 에둘러 표현하는데, 한 사람의 소원이 백 집의 원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속환을 못할 사람들이 생기고, 많은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和氣)가 상하지 않겠습니까.(『인조실록』)

   인조는 장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들어 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당대최고 집안에다 왕실의 척족이라 하더라도 개별 가정의 감정에 국법을 희생할 수는 없었다. 장유 아들의 이혼을 허락하는 순간 도미노처럼 각 집안에 불어 닥칠 우환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좌의정 최명길은 집요하게 ‘일국의 왕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공평해야 한다’며 감시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의 조정 회의를 기록한 사관(史官)의 관전평은 매우 황당하다. 절의를 금과옥조로 여겨온 예의지국이 ‘비뚤어진 견해’를 가진 최명길 때문에 오랑캐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인조실록』)

   환향녀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지 6일이 지나 갑자기 장유가 죽었다. 환향녀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없던 것이 되었는데, 3년여 만에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장유의 부인인 김 씨가 남편의 뜻이라며 아들 내외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제출한 것이다. 김 씨는 김상용의 딸이자 봉림대군의 장모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김 씨 부인은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어른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영의정 홍서봉은 죽은 남편이 조정의 윤허를 받지 못하자 칠거지악을 내세워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불순부모(不順父母)’는 칠거지악의 제1 조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소원이라며 떼를 쓰는 안사돈에게 국왕 인조는 이혼의 법을 고치기는 어려우므로 장선징이 훈신의 독자임을 감안하여 특례로 이혼을 허락하고, 그 외 어떤 이혼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영을 내렸다. 장선징은 결국 환향녀인 아내와 이혼했다. 장선징이 선례가 되어 대부분의 사람은 ‘사대부의 가풍’에 누가 될까 환향한 부인과 갈라섰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환향녀의 절개를 따지는 동안 사대부들이 져야 할 전란의 책임은 흐지부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절개를 따지는 동안 전란의 책임은 흐지부지

   아들 장훤과 생이별을 당한 장선징의 아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30년 후 아들 장훤은 9품 하급 관직마저도 힘겨운 상황이 된 것이다. 환향녀의 아들이라는 주장에 생모와는 연이 끊어져 계모의 자식임을 증명하자 천륜을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식으로 다시 공격을 받는다. 조부가 쳐 놓은 프레임에서 손자는 대책 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형상이다.

   다시 말해 명망가문의 일원인 장유 부부는 백 집의 원망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더구나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법을 좌지우지했다. 절의나 가풍에 집착한 그들의 상황을 굳이 이해하자면, 우선 장유는 삼전도 비문을 쓴 일로 사론(士論)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또 김 씨는 아버지 김상용의 죽음이 순절이 아니라 화약고에 담뱃불을 잘못 던져 폭발하는 바람에 사고를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김상용의 순절을 주장하는 제문이 올라오자 국왕 인조는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다” 말에 이르러 “칭찬하는 말이 참되어야 죽은 자가 영화롭고 산 자가 사모할 것”이라며 그의 순절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란을 발생시키고 전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 수많은 부녀가 적진으로 끌려갔다. 적들은 신분이 높은 여자들을 주로 골라갔는데, 여자라 힘이 약한 데다 나중에 속환비를 넉넉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살아서 돌아온 피로인들에게 박수로 맞이하지는 못할망정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해 보인다. 지성의 역할을 방기한 남성 사대부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절의와 예의의 이름으로 ‘환향녀’를 공식화하여 결과적으로 백 집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했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은 찬양 일변도다. 장유를 일러 ‘조정에서는 명신(名臣)이었고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공훈은 마원과 등애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와 구양수를 앞질렀다’고 썼다. 여기서 지성의 힘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1802~1885)는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의 원명원을 약탈하고 파괴한 그 야만에 치를 떨었다. 공개서한을 통해 ‘문명’ 프랑스와 영국의 행위를 공론화한 것이다.

  예술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데아는 유럽의 예술을 낳았고 환상은 동양의 예술을 낳았습니다. 특히 원명원은 거의 초인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상상력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몇 대에 걸친 인고의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한 개의 도시만큼이나 거대한 이 위대한 건축물은 몇 세기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인류를 위해서였습니다. 시간의 창조물은 인류의 것입니다. 어느 날 두 강도가 원명원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약탈했고 또 하나는 불을 질렀습니다. 역사는 그 두 강도 중 하나를 프랑스라고 부를 것이고 다른 하나를 영국이라고 부를 것입니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Ⅰ』)

   청 말의 사상가 담사동은 ‘윤리 없는 서양’을 꾸짖기에 여념이 없는 중국인들의 교만을 부끄러워하며 ‘우리 제발 그러지 말자’고 했다. 개항기의 박규수는 걸핏하면 ‘동방예의지국’을 일컫는 우리나라 유자들에게 일침을 놓았다. “천하만고(天下萬古)에 예의 없는 나라가 어디 있나? 중국인들이 오랑캐치고 예의 있다고 한 것이니 매우 비루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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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숙인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한국 철학

· 저서
〈신사임당〉, 문학동네, 2017
〈정절의 역사〉푸른역사, 2014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도서출판 여이연, 2005
〈노년의 풍경〉글항아리, 2014 (공저)
〈일기로 본 조선〉글항아리, 2013 (공저)
〈선비의 멋, 규방의 맛〉글항아리, 2012 (공저) 등 다수

· 역서
〈열녀전〉글항아리, 2013
〈여사서〉도서출판 여이연,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