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을 생각한다 |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
전쟁은 진보정치를 죽이기도, 회생시키기도 한다. 민족과 애국의 깃발 아래 사회주의는 힘을 잃지만, 국가주도의 전시동원과 그 체제가 준 공동체경험은 전후재건의 시기에 좌파정치가 약진하는 발판이 된다. 영국노동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정치가 혼돈과 위기를 겪던 1920년대에 두 차례(1923, 1929)나 (소수)정부를 구성하며 창당 20여 년 만에 수권정당으로 올라섰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치른 1945년의 총선에선 당 사상 최초로 압도적 다수의석으로 집권당이 되었다. 앞의 경우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에 터 잡은 보수·자유 양당정치가 아직 엄연하고 러시아혁명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던 상황에서 전통의 자유당을 제치고 일궈낸 승리였고, 뒤의 경우는 전쟁영웅 처칠이 이끌던 보수당을 상대로 이룩한 쾌거였다. 보수주의자 처칠의 노동당 살리기 아직 처칠은 영국노동운동에겐 ‘계급의 적’이었다. 그는 1910년 내무장관으로서 토니판디 광부파업에 군대동원과 발포를 명령했고, 러시아혁명 진압을 위한 무력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25년엔 재무장관으로서 금본위복귀를 단행해 긴축을 주도했고, 그로써 촉발된 이듬해 총파업에서 적색공포를 앞세워 초강경대응을 독려했던 이가 또한 그였다. 처칠이 새 정부 수장이 된다는 소문이 무성할 때 노동당 지도부가 격렬히 반대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포용의 지혜 배워야 처칠은 19세기 말 보수당 개혁파의 ‘제4당’ 운동을 주도했던 아버지 랜돌프를 이어 보수당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마감했지만, 보호무역정책에 반대하여 한동안 자유당에 적을 두기도 했다. 탈당, 복당의 분주한 행각을 보인 셈인데, 그렇다고 누구도 처칠의 정치적 처신을 트집 잡지 않는 이유는 그의 원칙과 소신에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칠은 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총리로 복귀했지만, 그의 탈공학적 포용정치는 영국개혁정치에 불을 지폈고 영국보수주의를 살렸으며 보수·노동 양당 중심의 정당체제가 자리 잡는 데 크게 공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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