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혁신, 민중의나라

처칠을 생각한다.

소한마리-화절령- 2018. 5. 22. 07:55
처칠을 생각한다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전쟁은 진보정치를 죽이기도, 회생시키기도 한다. 민족과 애국의 깃발 아래 사회주의는 힘을 잃지만, 국가주도의 전시동원과 그 체제가 준 공동체경험은 전후재건의 시기에 좌파정치가 약진하는 발판이 된다. 영국노동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정치가 혼돈과 위기를 겪던 1920년대에 두 차례(1923, 1929)나 (소수)정부를 구성하며 창당 20여 년 만에 수권정당으로 올라섰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치른 1945년의 총선에선 당 사상 최초로 압도적 다수의석으로 집권당이 되었다. 앞의 경우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에 터 잡은 보수·자유 양당정치가 아직 엄연하고 러시아혁명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던 상황에서 전통의 자유당을 제치고 일궈낸 승리였고, 뒤의 경우는 전쟁영웅 처칠이 이끌던 보수당을 상대로 이룩한 쾌거였다.

   노동당 최대의 시련기는 1930년대였다. 대공황의 혼란 속에서 당 지도부가 대거 국민정부로 이탈하고 연이어 1931년 총선에서 대패하자 의원수는 이전의 1/5 밑으로 급감했다. 1935년 총선으로 노동당(154석)은 잃었던 영지를 웬만큼 회복했지만, 보수당(432석)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거대정당이었다. 2차 대전 발발 무렵에는 국내외 모든 정황이 보수당을 편들었다.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스탈린 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반사회주의 여론이 거셌고, 자유당은 확연히 정치적 몰락의 길에 들어섰으며, 정치신참들 일색이던 노동당의 위상에 변화가 있으리란 조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제1야당 노동당을 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1940년 5월 체임벌린을 대체하여 전시내각의 총리로 들어선 보수주의의 거두 처칠이었다.

보수주의자 처칠의 노동당 살리기

   아직 처칠은 영국노동운동에겐 ‘계급의 적’이었다. 그는 1910년 내무장관으로서 토니판디 광부파업에 군대동원과 발포를 명령했고, 러시아혁명 진압을 위한 무력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25년엔 재무장관으로서 금본위복귀를 단행해 긴축을 주도했고, 그로써 촉발된 이듬해 총파업에서 적색공포를 앞세워 초강경대응을 독려했던 이가 또한 그였다. 처칠이 새 정부 수장이 된다는 소문이 무성할 때 노동당 지도부가 격렬히 반대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요컨대 처칠이 마침내 총리직을 거머쥐었을 때 그에겐 영국을 보수당 천하로 만들 강력한 유인(誘引)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당을 정부구성에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의석수를 훨씬 상회하는 통치지분을 전격 노동당에 할애했다. 재무장과 전시동원을 위해 노동운동의 협조가 절실했음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로써 당 중진이 대거 정부 상층부에 진출하면서 노동당은 정국운영에서 보수당과 사실상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 가령 5명으로 구성된, ‘내각의 내각’으로 불리던 전쟁내각에 노동당수 애틀리와 부당수 그린우드 2명이 부총리와 무임소장관으로 참여하는 등, 새 연립정부에서 노동당은 8명의 각료직을 포함 총 16명이 대소의 관직을 떠맡았는데, 전쟁 막바지엔 그 수가 27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부총리 애틀리는 외교와 전쟁으로 분주한 처칠을 대신하여 국내문제에서는 실질적인 총리직을 수행했거니와, 영국이 전쟁 초에 벌써 전후재건을 위한 방대한 개혁구상을 초당적으로 시작하고 전쟁 막바지에 주요 개혁프로그램들이 노동당 주도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종전과 동시에 들어선 애틀리 노동당정부는 전시에 준비된 개혁안들을 집권 6년 동안 충실히 실행에 옮겼다. 유명한 국민의료체계(NHS)를 포함한 복지개혁들이 그 시기에 일단락됐으며, 12개 산업이 국유화되었다. 이런 성취는, 대처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보수당 정권들에서도 큰 수정 없이 계승되었으니, 전후 영국의 ‘사회민주적 합의정치’의 골격이 그렇게 마련되었다.

포용의 지혜 배워야

   처칠은 19세기 말 보수당 개혁파의 ‘제4당’ 운동을 주도했던 아버지 랜돌프를 이어 보수당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마감했지만, 보호무역정책에 반대하여 한동안 자유당에 적을 두기도 했다. 탈당, 복당의 분주한 행각을 보인 셈인데, 그렇다고 누구도 처칠의 정치적 처신을 트집 잡지 않는 이유는 그의 원칙과 소신에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칠은 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총리로 복귀했지만, 그의 탈공학적 포용정치는 영국개혁정치에 불을 지폈고 영국보수주의를 살렸으며 보수·노동 양당 중심의 정당체제가 자리 잡는 데 크게 공헌했다.

   작금의 한국 정치지형이 언제까지 지속되고 어떤 돌발변수로 인해 급변할지 알 수 없으나, 딱하고 지리멸렬한 야당일지라도, 깨워서 일으키고 살려내야 한다. 어르고 달래는 역지사지를 넘어, 상대방의 상투적 주장조차 상투적으로 내치지 않는 것, 그런 진정성이 지혜다. 집권당 세가 압도적일수록, 한국정치의 중장기적 진운과 관련한 역사적 책임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포용은 강자의 몫이자 자신감의 표출이되, 확신은 숫자보다 원칙에서 나오는 법, 상대를 품지 못하는 원칙이라면 아집과 냉소가 빚은 허상이기 쉽다. 무릇 변치 않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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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고세훈
· 고려대 명예교수

· 저서
〈조지 오웰: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한길사, 2012)
〈영국정치와 국가복지〉 (집문당, 2011)
〈복지국가의 이해:이론과 사례〉(고려대 출판, 2000)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2009)
〈국가와 복지〉 (아연출판사, 2003)
〈영국노동당사〉 (나남, 1999)

· 역서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2015)
〈존 메이너드 케인스〉 (후마니타스, 2009)
〈페이비언 사회주의〉 (아카넷,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