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스크랩] 피카소 그림 -- 게르니카...(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

소한마리-화절령- 2006. 6. 1. 16:11

 

 

 

 

 

게르니카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

종류 : 벽화
크기 : 349×775cm
제작연도 : 1937년

게르니카는 에스파냐 바스크지방의 작은 도시로, 1937년 에스파냐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 벽화제작을 의뢰받고 있던 피카소는 이 조국의 비보에 접하자, 한 달 반 만에 대벽화를 완성, ‘게르니카’라고 이름붙였다.

게르니카는 온통 흑색, 흰색, 회색 갈색 등의 무채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충격적인 게르니카 사건을 신문상의 강렬한 흑, 백 대조의 사진을 처음 접하는 순간의 인상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한 연출이다.
피카소 예술의 특징적 요소가 자전적 요소라 했을 때,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적 생활과 더불어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적 사상도 포함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성이 표출되어 있고 광기, 절망, 좌절의 절규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큐비즘의 파괴성과 평면화법, 큐비즘 후에 개척한 신고전주의적인 양감
표현과 왜곡, 그리고 그의 미술적 상징성 등 그때까지의 모든 성과의 훌륭한 종합이다.
백,흑,회색의 비극적 색조로만 처리한 점이 더욱
이 그림을 처절하게 한다.
그림에는 말에 올라탄 사람 아래 여러 사람들이 짓밟혀 있는 것이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말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의미하며 말위의 사람들은 프랑코 장군의 군부 쿠데타 세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말을 탄 사람은 한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한 눈은 옆을 보고 있다. 처음에 세계는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만을 비난했다. 피카소는 이중적인 인물화를 통해
게르니카 공습이 실제로는 스페인 군부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웅변했던 것이다. 이처럼 피카소는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때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피카소는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피카소의 입체화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3차원의 공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음으로써 4차원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종합적인 입체화의 방법을 정립한 뒤 "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형태를 그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파리 박람회에서 전시되어 게르니카 사건을
전세계에 알리게 된다. <게르니카>가 일반인들에 공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학살 행위에 대해 피카소는
가장 충격적이고 격렬한 표현으로 답을 한 것 이었다.
피카소의 그림은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여인,
창에 찔린 말, 부러진 칼 등을 통해 인간을 파괴하는 무모한 폭력을 비난하며 보이지 않는 적인 파시즘 자체를 극복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킨 이 작품은 그 뒤로 스페인 내전의 상징 뿐만이 아니라 세계평화와 화해를 향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구도는 날카로운 불안감과 이질감을 주는 삼각형 구도를
차용하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미술품으로 꼽히는 피카소(1881∼1973)의 대작 ‘게르니카’ ->> 실물크기 (7.77m×3.49m)


게르니카’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1937년 파리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출품하기 위해 피카소에게 의뢰한 작품.‘게르니카’라는 제목은 1937년 파 시스트의 폭격을 받은 스페인 바스크족 마을 게르니카에서 따온 것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가 독일 공군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자 이를 예술작품으로 표 현해 만행을 폭로했다.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스페인 프랑코 총통의 파시스트 정권을 돕기 위해 이같은 폭격을 감행했다.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 현장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그러나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그는 파리에서 폭격 기사만 읽고도 ‘게르니카’를 그릴 수 있었다.피카소는 에스키스 과정을 빼면 불과 3주만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왼쪽의 황소와 죽은 어린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중앙의 말과 램프를 든 여인,그리고 오른쪽의 불타는 집과 달아나는 여인.‘게르니카’는 이렇게 세부분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폭격의 참상을 흑백의 색조로 강렬하게 표현,평화에 대한 갈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황소에 대한 해석이다.검은 색 몸통에 멍청한 표정의 얼굴,치켜 올라간 꼬리의 이 황소는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다.그것은 일단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희망의 상징으로 읽힌다.

‘게르니카’는 2차대전 당시 미국으로 옮겨진 뒤 “민주화한 조국에 그림을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반환됐다.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아트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게르니카’는 이후 해외반출은 물론 국내이동도 일절 허용되지 않고 있다

피카소 예술의 특징적 요소가 자전적 요소라 했을 때,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적 생활과 더불어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적 사상도 포함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성이 표출되어 있고 광기, 절망, 좌절의 절규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큐비즘의 면분할로 이루어져 있다. 회·갈색으로 강하게 부각되는 흑·백의 명백한 대비는 암울하고 극적인 대조를 한증 고조시킨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말의 비명, 불타는 집 속의 여인의 공포, 부러진 칼을 쥔채 죽어가는 전사의 고통, 왼편의 통곡하는 여인 등은 흑백과 회색조로 제한된 엄격한 색채로 인해 더욱 죽음과 공포를 연상케 한다.


출처 : 바람결에놓인 방랑자(집시)
글쓴이 : Gypsy wind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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