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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초형 인재가고 잡초형 인재뜬다.

소한마리-화절령- 2006. 3. 26. 20:38
 

‘화초형 인재’ 가고 ‘잡초형 인재’ 오라

사회봉사 경력을 중시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미국 MBA 출신요? 안 뽑죠. 오히려 탈락 1순위예요.”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몇 년 전에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다른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이 회사 또한 취업 시즌이면 MBA(경영학 석사) 학위 소지자를 몇 명 뽑았는지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 인사 담당자는 한 술 더 떠 신입사원 채용시 ‘신(新) 3대 기피족’을 얘기하기도 했다. 첫째 앞서 말한 유학파 MBA 출신, 둘째 서울대 출신, 셋째 강남 부유층 출신이 그것이다. 기업체가 이들을 외면하는 이유는 하나. 뽑아놓아 보았자 얼마 안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데로 옮기는 비율이 일반 신입사원에 비해 배 이상 높기 때문이라고 이 담당자는 말했다.

인재 채용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 학벌 좋고, 학점 좋고, 토익 점수 좋은 ‘표준형 인재’들이 각광 받던 시대는 지났다. 채용 전문 업체인 코리아리크루트가 지난해 9월 인사 담당자 1백92명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토익 성적 9백 점 이상인 구직자 중 적합한 인재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인사 담당자는 전체의 24%에 불과했다. 반면 응답자의 절반(46.4%) 가까이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응답했다.

  유학생과 MBA 학위 소지자에 대해서는 점수가 더 짰다.이 중 자기네에 적합한 인재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응답한 인사 담당자는 전체의 12.5%에 불과했다. 반면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응답자는 무려 68.8%에 달했다.

일선 현장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지난해 하반기 있었던 KT 신입사원 공채에서는 박사·공인회계사·노무사 등 전문 자격증 소지자들이 대거 탈락했다. 당시 KT 공채에 지원한 전문 자격증 소지자는 모두 83명. 그런데 이 중 합격자는 네 명에 불과했다. 이와 관련해 KT의 한 관계자는 “박사나 전문 자격증 소지자들은 직장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채용 시 그런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IT 계통의 한 대기업 계열사를 지원했던 ㄱ씨는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서울 명문대 출신에 학점 우수하고, 미국·일본에서 각각 어학연수를 받은 ‘빵빵한’ 경력이 있는데도 그랬다. 그를 탈락시킨 이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아버지가 부산에서 중소 사업체를 운영하고, 두 군데나 어학연수를 갈 만큼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ㄱ씨에게 오히려 감점 요인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이런 인재들의 경우 조금만 힘이 들거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 결과적으로 회사에 큰 피해를 안긴다는 것이 이 담당자의 말이다.  

이런 화초형 인재들이 인기를 잃으면서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 이른바 ‘잡초형 인재’들이다. 학벌이나 토익 점수가 크게 뛰어나지 않아도 풍부한 경험과 현장 적응력 등 자생력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기업의 채용 트렌드가 바뀌면서 바야흐로 잡초형 인재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채용 업체인 잡코리아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채용 시 가산점을 주지는 않지만 면접 시 참조하는 항목’ 1~3위로 공모전 수상 경력(71.1%), 사회 봉사 활동(67.8%), 인턴 또는 업무 경험(65.3%)을 각각 꼽았다.곧 ‘간판’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쪽으로 채용 흐름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유학파 MBA·서울대·강남 출신 안 뽑는다”

국민은행은 이런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2003년까지만 해도 이 회사는 전체 신입사원의 90% 가까이를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으로 충원했다. 그런데 2004년을 기점으로 학벌 제한을 완화하는 이른바  ‘열린 채용’ 방식을 도입하면서부터는 상황이 확 바뀌었다. 지난해 국민은행이 채용한 신입사원 중 SKY 출신 비율은 약 20%에 불과하다.

대신 국민은행은 지역 사정에 밝은 지방대생 채용 비중을 30%로 크게 늘렸다(2003년은 10% 미만). 지방 출신 학생을 일정 비율 이상 뽑는 서울대처럼 일종의 ‘지역 쿼터제’를 도입한 것이다. 김동익 인사팀장은 “서울대가 사회적 통합 차원에서 지역 쿼터제를 도입했다면 우리는 지역 영업을 누가 가장 잘할 수 있느냐 하는 실무적 관점에서 지역 쿼터제를 도입했다”라고 말했다. 

그 전까지는 국민은행 또한 이른바 서울 명문대 출신들이 지점 근무를 했다. 그러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지역사회 특성상, 설사 그 지역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학업을 마쳤다 해도 대학을 서울에서 다닌 사람은 오피니언 리더 집단에 잘 끼워주지 않는 것이 지역사회의 보이지 않는 관행이었다. 때문에 토착 인재의 중요성이 재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이에 대해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서울 지역 출신들이 지방 근무를 꺼려하기 때문에 지방대 출신 채용 비율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

더불어 국민은행은 신입사원 채용 때 응시자의 전공 제한을 없애고 토익 성적 기준 또한 8백 점 이상에서 7백 점 이상으로 낮추었다. 입사 지원서에 학점 표기란도 없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학점이나 토익 점수보다 그 사람의 조직 내 성취를 예측하게 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는 ‘열정’이다. 면접이나 직무·역량 테스트에서 열정 수치가 높게 나온 신입사원일수록 조직 내 성취 또한 높았다고 김동익 팀장은 말했다.

두산그룹 또한 지난해부터 학점 표기란을 없애고 토익 점수 하한선을 7백 점에서 5백 점으로 낮추었다. 두산그룹 인사팀 오영선 차장은 “학교 때 공부 잘했다고 사회에 나와 일 잘한다는 등식이 성립하지는 않는다”라며, 지난 몇 년간 인사 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대학 학점이나 토익 점수와 입사 후 업무 성과 간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채용 방식을 크게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민은행 신입사원 30%가 지방대 출신

이런 방식으로 신규 인력을 채용하는 기업은 갈수록 늘고 있다. 공기업에서 시작된 채용 기준 철폐 바람은 금융기관을 넘어 민간 기업까지 급속히 확산하는 추세이다. 지난 1월 취업·인사 전문 포털인 인크루트(www.incruit.com)가 4백29개 상장사와 60개 공기업 등 4백89개사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신입사원 채용 때 지원 자격에 연령·학력 등 제한 규정을 두지 않거나 완화했다고 밝힌 기업은 모두 1백72개사로 전체의 35.2%에 달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 기업이 설렁설렁 신입사원을 뽑는 것은 아니다. 학벌이나 토익 점수를 따지지 않는 대신 더 정교한 평가 잣대를 들이대기 위해 기업들은 저마다 머리를 짜내고 있다. 실무자 면접에서 임원진 면접, 심지어는 최고 경영자(CEO) 면접까지 이어지는 심층 면접은 이미 채용 문화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토익 점수로 상징되는 ‘페이퍼 영어’ 대신 실전 영어가 빛을 발휘하는 것도 이들 심층 면접 시험장에서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의 90.4%는 두 차례 이상 심층 면접을 진행하고 있다.

공채 응시자들이 1박2일, 또는 2박3일 합숙을 하며 면접시험을 치르는 풍경도 이제 낯설지 않다. 인턴사원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장에 강한 잡초형 인재를 판별하려면 함께 부대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잡초형 인재가 새삼 각광을 받는 데는 일차적으로 최근 몇 년 사이 이직률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 인크루트가 지난 2월 대기업 62개사와 중소기업 3백 개사, 총 3백62개사를 상대로 벌인 조사에 따르면 입사 후 1년이 경과되지 않은 신입사원의 평균 퇴사율은 무려 29.4%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대기업 22.8%, 중소기업 30.8%). 열 명을 새로 뽑으면 그 중 세 명이 1년을 못 버티고 회사를 떠난다는 뜻이다.

인사 담당자들은, 신입사원 이직률이 이렇게 높게 나타난 근본적 이유로 달라진 고용 환경을 꼽는다.‘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경력 사원들도 이직을 밥 먹듯 하는 판에 신입사원에게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세대 간 편차도 상당한 듯 하다고 두산그룹 오영선 차장은 말했다. 웬만한 갈등은 참고 넘겼던 선배 세대와 달리 요즘 신입사원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심층 면접’이 채용 문화 대세

LG-CNS 인사팀 설재헌 부장은 이른바 ‘묻지마 지원’이 이런 현상을 더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적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고등학생들이 수능 점수에 따라 ‘묻지마 지원’을 했다가 대학 입학 후 숱한 방황을 하듯, 구직자들이 일단 붙고 보자는 식으로 해당 기업과 직무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묻지마 지원’을 했다가 회사를 그만두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손실은 기업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기업들이 신입사원 이탈 방지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이다(관련 기사 참조).

문제는 온실 속 화초형 인재일수록 조직 내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잡초형 인재는 타고난 또는 사회화된 현실 적응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간다.

기업 환경의 급변 또한 잡초형 인재가 각광 받게 하는 요인이다. 컨버전스(복·융합)가 새로운 시대 흐름으로 떠오르면서 기업들이 요구하는 인재상도 종합적인 사고력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SK텔레콤은 신입사원 중 SKY 출신 비율이 과거 30% 수준에서 20% 수준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이는 인위적으로 출신 학교 비율을 제한해서가 아니다. 도전 정신과 패기를 중시하는 SK그룹 고유의 기업 가치를 살려 면접에서 재능과 창의성 부문에 대한 배점 비중을 높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김장기 SK텔레콤 인력2팀장은 말했다.

여기에는 최고 경영자의 철학도 작용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올 초 계열사 신입사원과의 간담회에서 “천재보다는 좋은 리더가 필요하다”라며 비(非)천재 경영론을 설파했다.“사람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라고 전제한 최회장은, 상위 20%에 드는 천재를 좇아 나머지가 움직인다는 20대 80 이론에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며 리더는 (천재처럼)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키워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21세기는 천재 한 명이 10만~2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라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천재 경영론과 대비되며 화제를 모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잡초형 인재의 부상은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