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
고광식
1
고래잡이가 금지되면서
녹슨 닻과 함께 꿈도 내린 목로주점들이 하나씩 문을 닫았다.
고래를 닮은 포경선은
제 울음 삼켜 박제가 되었는지
방추형의 등허리에 송곳니 들이박던 뱃머리의 포신이
수평선 한 오라기 풀어놓고 있었다.
언제쯤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쓰디쓴 눈물로 뿌리를 내린 닻
새우떼의 이동을 좇던 그 신명만이
포경선은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그립다.
눈을 감으면 산보다 높은 고래들의 분노가
바다 위에 뜬 외로운 섬이 되어
드높은 기와집으로 일어선다.
목로주점마다 물새알 같은 초생달 갖고서
바다로 통하는 문을 닫고 있는데
어우러져 꽃피는 그리움으로
녹슨 포경선이 더 이상 퇴화되지 못한 채
찬 바닷물을 핥으며 네 뒷다리의 흔적을 찾으리라.
머리 위에 뚫린 콧구멍처럼
가끔씩 물 위에 떠서 호흡하는 네 허파처럼
뱃머리의 포신이 따뜻한 숨 다시 들이쉬리라.
2
해부장 김씨
이 녹슨 닻 좀 올려주시오.
장생포초등학교 정문에 세워진 고래의 갈비뼈 사이로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는 아이들이
고래의 뱃속에서 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는
햇빛 반짝이는 정오
그리움으로 커가는 작살도 잘 닦아주시오.
검붉은 피로 바다를 물들이는 너를 좇아
밤새 산 같은 파도에 시달릴 때도
태풍 위에 떠서
무당의 신명난 맨발이 되어 뒤집힐 때에도
허공을 쏘는 물기둥처럼 나는 열정의 꿈을 심었었지.
해부장 김씨
그것이 스스로의 꿈을 키우는 내 삶이란 것을
그것이 속 푸른 바다의 삶이란 것을
저 혼자 뺨 때리는 방파제에서
밧줄을 당기는 노랫가락 때없이 솟구치는데
늙은 작부는 북해도 쪽으로 고개를 눕히고
나에겐 헤쳐나갈 바다도
포신의 작살도 이제는 녹이 슬었소.
해부장 김씨
어쩔 수 없이 바다를 택한 그 자리에서
고래처럼 퇴화하는 포경선이
결국은 바다로 가는 길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오.
오래 전 땅 위에서의 배고픔을 잊고
앞다리가 퇴화한 가슴지느러미로 헤엄치리라는 것을.
3
고래의 갈비뼈를 보았는가
옆구리가 시린 아이들이 고래의 뱃속으로 들어가며
말라빠진 젖꼭지를 빠는 공룡새끼의 울음소리와
시조새의 날개 위에서 잠을 자는 꿈을 꾼다.
먹이사슬의 연결고리는
이렇게 화석이 되어 끝나고 시작되는 것일까
교문을 들어서며 나는
고래의 갈비뼈에 묻어있는 칡넝쿨 같은 그리움을 보았다.
묶여있어 퇴화하는 포경선의 슬픔이
노랫가락으로 흐느끼는 목로주점을 뒤로하고
노을 이는 바다의 가슴보다 더 깊어질 무렵
사람들은 입천장에서 하나씩 뽑혀지는 섬유질의 고래수염처럼
약속도 없이 장생포를 떠났다.
밀물과 썰물로 담금질되는
해일이 방파제를 몰아칠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포신.
텅텅 비어 갑판 위를 구르는
포수의 흐물거리는 기억만큼
나는 곧추선 고래의 갈비뼈로 탑을 세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가야 할 북해도를 향하여
출항의 깃발처럼 꼿꼿이.
*고광식시인은 91년 '민족과 문학21'에서 신경림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대구매일신문 주최 청구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중견시인입니다. 저와는 절친한 친구이기도하고요. 현재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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