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대한민국이 갈라진다]
2부. 커지는 빈부차, 멀어지는 사회통합 < 1 > 돈 보다 희망을 잃었다
한때는 동대문시장 사장님… 외환위기·카드대란 겪으며 빚만 눈덩이
끝없는 추락 희망근로까지 끊기며 이혼 "패자부활 막힌 사회 몸서리"
"이 나라는 나 같은 사람에게 단 한 번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았지. 10년이 넘도록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재기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늘어가는 건 빚 뿐이었어."
↑ 김경한(가명) 씨가 택시회사에 취직해 받은 첫 월급 명세서와 그의 인생여정. 하루 12시간 일해 받은돈이 고작 78만3,634원으로 고시원비(23만원)와 빚 상환액(18만원)을 빼면 생활비가 빠듯하다.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해 서울 명동 신용회복위원회 사무실을 찾은 이들이 9
지난 9일 서울 명동 신용회복위원회 6층 상담실. 김경한(60ㆍ가명)씨는 지난 12년간 재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곳을 찾게 됐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
30년 전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숙녀복 전문 의류 가게를 열고 장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아내와 함께 하루 12시간을 꼬박 장사에 매달리며 5년 만에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고,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자가용까지 몰 정도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다. 김씨는"그 때는 배운 것 없어도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이런 믿음은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무너졌다. 대기업과 은행이 쓰러지고,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그의 가게도 내리막을 걸었다. 거래처로부터 받은 어음은 휴지조각이 됐고, 의류제조사들로부터 밀려드는 대금 상환 요구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김씨는"15년간 피땀 흘려 벌어 놓은 현금을 3개월 만에 빚 갚는데 다 썼다"고 말했다.
1999년 김씨는 결국 아파트를 팔았다. 5,000만원으로 아내와 함께 다시 동대문시장에서 재기의 꿈을 다졌다. 하지만 동대문시장은 더 이상 옛날의 그 곳이 아니었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옷 가게를 차리면서 과당경쟁이 벌어졌고, 김씨의 노력은 불과 6개월 만에 다시 물거품이 됐다.
그로부터 3년 후. 정부가 지원하는 소상공인 자금(1,000만원)에 카드 현금서비스(2,000만원)까지 더해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1년 후 카드대란이 터지면서 빚더미에 올라 앉고 김 씨는 신용불량자(현재 채무불이행자)가 됐다. 김씨는"빚을 줄여보려고 징역(6개월)을 살기도 하고 자살까지 시도해 봤다"며 "정부는 위기를 극복했다고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정작 내 빚은 줄기는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말했다.
지난해 그는 희망근로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마저 끊어지면서 지금은 생계가 막막한 상태다. 아내와 자녀들도 그의 곁을 떠났다. 직업만 잃은 것이 아니라, 그는 가정도 잃게 된 것이다.
외환위기, 카드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한 번의 위기를 거칠 때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도 그만큼씩 벌어졌다. 외환위기 때는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카드사태는 빚더미에 앉았던 이들의 파산으로,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한계선상에 있던 가계와 자영업자의 몰락으로.
이렇게 벌어진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위기 극복의 과실은 부유층에게 돌아갔고, 패자부활의 기회는 꽁꽁 막혔다. 신용회복 프로그램이나 미소금융 등 각종 재활 제도가 만들어졌다지만, 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까치 발을 들고 서 있는 이들의 목숨만 구제해줄 뿐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기엔 너무 미흡했다.
홀로 남은 그는 이제 마지막으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해 한 달에 번 돈은 78만원 가량. 남부럽지 않던 동대문시장 사장님이 돈과 가정을 잃고 월 78만원짜리 택시기사가 되는데는 10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한달 23만원짜리 1평이 채 안 되는 독서실 방에서 소주 없이는 잠을 들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바람은 단 한가지. 자신에게 남은 빚을 정리해 자식들에게 빚을 대물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 때문에 자식들이 채무불이행자가 돼 취직도 못하고 있어. 죽기 전에 빚 다 갚아서 그 놈들 구제하는 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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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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