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슬로 워킹] 대한민국서 가장 걷기 편한 1천리 `삼남길`

소한마리-화절령- 2010. 8. 25. 17:09

[슬로 워킹] 대한민국서 가장 걷기 편한 1천리 `삼남길`

매일경제 | 입력 2010.08.25 15:51

 




■매일경제ㆍ코오롱스포츠 공동 기획

이현세 화백(가운데)과 함께 로드매니저 손성일 대장(왼쪽), 신익수 기자가 삼남길 쌍령고개 구간을 느릿느릿 걷고 있다. 구불구불 쌍령 정상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늘 숲의 생기가 넘치는 삼남길 "생동"의 구간이다. <이충우 기자>

매일경제신문이 코오롱스포츠(kolonsport.co.kr), 로드 플래너(road planner) 손성일 대장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걷기 편한 '길'을 만듭니다. 바로 '삼남길'입니다. 이 길은 한반도 동맥과 같은 길입니다. 조선시대엔 군사는 물론 진상품이 이동한 경로였고,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위해 선조들이 한양으로 간 길 역시 다름 아닌 이 길입니다. 무엇보다 의미가 깊은 건 이 길이 '수평'이라는 점입니다. 모름지기 길은 편해야 합니다. 수직을 지향하는 등산로나 목표 지점을 정하고 가는 트레킹 코스와는 그래서 다릅니다.

전남 해남에서 시작되는 이 삼남길은 강진, 나주, 광주, 전북 완주, 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 서울 남태령, 남대문까지 1000리가 이어집니다. 아마 한반도에서 가장 길고, 느리면서, 편한 길로 남을 것입니다. 첫 스타트는 대한민국 만화계 대부인 이현세 화백과 함께했습니다. 느리면서 편한 아날로그식 삼남길과 만화라,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시는지요. 자 그럼 출발합니다. 서둘지 마시고 느리게, 편하게, 천천히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이현세 화백과 함께 길을 떠나다

◆ "느리고 수평적인 길이라. 거 좋다"

= 지난 13일 천안시 인근 쌍령고개. 나뭇가지를 장난스럽게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이현세 씨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기자는 안다. 전날 술과 함께 달렸음을. 대한민국 만화계 지존 이현세. 그는 '음주계 지존'이기도 하다. 폭탄주 20잔을 먹고도 끄떡없다. 스스로도 "주량이란 게 있어? 필름 끊어져 봤어야지" 하고 능청을 떤다.

요즘 이현세 씨 명함은 무려 4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애니메이션ㆍ드라마 제작자가 하나.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직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영원한 '화백'이라는 직함. 천하의 이현세라도 바쁜 삶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느리고, 편하면서, 천천히 갈 수 있는 삼남길 취재에 함께하자는 유혹에, 휴대폰까지 던져둔 채 기꺼이 동행했으리라. "이런 멋진 길을 가는 데 휴대폰은 잠시 꺼둬야 한다"며 능청스럽게 호기까지 부리신다(술에 만취해 깜빡 잊고 화실에 두고 온 게 뒤늦게 밝혀졌다).

삼남길은 한반도의 동맥 같은 길이다. 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진, 나주, 광주, 전북 완주, 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 서울 남태령,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1000리 길이다. 진상품도, 군사도, 사신도, 관료들도, 과거를 보러 갔던 선비들도, 심지어 유배자들까지 모두 이 길로 다녔다고 한다.

이현세 씨와 함께 잡은 첫 답사 코스는 쌍령고개.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IC에서 빠지면 23번 국도로 이어진다. 이 도로를 따라 5분쯤 달리면 차령터널. 바로 이 앞에서 35번 구도로로 접어들면 다시 쌍령고개로 이어지는 옛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심에선 이제 보기조차 힘들어진 흙길. 폭 2m 남짓한 길을 따라 양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소나무가 흙길과 함께 절경을 만들어낸다.

◆"쌍령고개…이 길은 귀한 길이지"

= "차령이 수레나 우마차가 다닌 큰길이라면 쌍령은 그야말로 서민들 길이었지. 차령터널이 뚫리면서 쌍령은 더 소외를 받았는데, 그 덕에 옛길의 정취를 고스란히 갖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야."

타박타박. 아스팔트가 딱딱한 겉옷을 입은 지구 표피라면 흙길은 맨살이다. 그러니 리듬이 있다. 그 맨살의 굴곡을 따라 생기가 그대로 발바닥에 전해진다.

사실 이현세는 걷기 예찬론자다. 지금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닌다(물론 술 취했을 때만). 골프를 할 때도 카트를 멀리한다. 티샷을 한 뒤엔 아예 뛰기도 한다. 물론 그가 즐기는 건 등산이 아니다. 트레킹도 아니다. 등산과 트레킹이 수직적이라면 이현세식 걷기는 수평적이다.

"모름지기 걷기란 편해야 하거든. 걸으면서 힘든 것, 그것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잖아. 트레일 알지? 가볍게 오솔길을 걷는 듯이 걸을 수 있는 코스. 거기에 딱 알맞은 코스가 바로 이 삼남길인 것 같네."

수평적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삼남길이 수평을 지향하는 트레일 코스긴 해도 고개는 고개다. 게다가 차령고개를 둘러가는 코스보다 20리가 짧다는 지름길이 쌍령이다. 어느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질문조차 꺼내기 힘들어 하는 기자에게 이 화백이 되레 묻는다. 걷기의 매력이 뭔지 아느냐고. 글쎄다. 이렇게 힘든 게 매력일 리는 없는데….

"걷기는 그 마을, 그 지역의 속살을 볼 수 있잖아"

"등산이나 관광은 점과 점의 여행이잖아. 각 점을 찍고 오는 게 목적일 수밖에 없지. 걷기는 달라. 선의 여행이거든. 그냥 줄줄 다니면서 구석구석 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러고 보니 만화와 길은 닮은 구석이 많다. 기자에겐 만화가 시각적 매체일 뿐 아니라 촉각적 매체다. 종이를 만지고 또 넘기면서 인쇄된 활자의 스토리는 색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 TV나 영화에선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느낌이다. 길 역시 마찬가지다. '촉각'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만화에 '손길'이 끊기면 그 만화는 죽은 만화다. 길도 그렇다. 사랑을 해줘야, 밟아주고 다져줘야 그 길은 생명을 이어가게 된다.

삼남길은 통일을 염두에 둔 길이라는 설명을 하자 이 화백 입이 쩍 벌어진다. 서울까지 이어진 이 길은 의주대로를 따라 신의주를 거쳐 중국과 유럽까지 뻗어 간다. 걸어서 가는 '아시안 하이웨이'인 셈이다.

삼남길이야 그렇다 치고 '영원한 화백' 이현세는 어떤 길로 가게 될까. 싱긋 웃더니 '70세가 되면 동화 들려주는 할아버지 작가'가 되고 싶단다. 세계적인 동화를 이현세식으로 해석해 만화를 접목한 하이브리드 장르를 만들어 보겠다는 구상이다.

어째, 가장 한국적인 길인 삼남길로 걸어서 가는 아시안 하이웨이를 만들겠다는 구상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럴 것이다. 인생의 길이건, 바닥에 깔린 길이건 세상 모든 길은 결국 통하게 마련이니까.

삼남대로 그리고 트레일

= '트레일 워킹(trailwalking)'은 가벼운 걷기다. 산을 오르는 '트레킹'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트레일의 원래 뜻이 그렇다. 사람들이 오가는 자연의 오솔길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수직적 높이를 추구하는 '등산'과도 다르다. 수평적이면서 평화적이다.

요즘 대세는 트레일이다. 뻔한 걷기에 지쳤고, 등산에 부담을 느끼는 레저족이 가세하면서 트레일 인구는 급속히 늘고 있다. 등산보다 체력 소모도 작아 실버 세대도 편하게 즐긴다. 트레일 코스도 늘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에 이어 서울 성곽길 등 해마다 증가세를 타고 있다.

삼남대로는 트레일 워킹을 위한 길이다. 코스는 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진, 나주, 광주, 전북 완주, 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 서울 남태령,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1000리 길이다. 삼남대로 시발지는 제주로 이어지는 땅끝 지점인 전남 해남땅 관두포항과 강진 마량항이다.

이 길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용도는 군사길이다. 이 길을 통해 관리들을 임지로 파견하고 군사도 이동시켰다고 한다. 진상품도 이 길을 따라 이동했고,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위해 한양으로 간 길 역시 삼남길이다. 이 길은 아픔의 길이기도 하다. 중앙관리가 제주도 유배지로 귀양을 갈 때도, 임진왜란 때는 왜구들 역시 침략을 위한 요로로 이 길을 이용한다. 현재 삼남길은 해남 땅끝 탑에서 시작해 강진 누릿재 구간까지 90㎞가 조성돼 있다. 해남에서 서울까지 삼남길이 완성되면 500㎞에 달하는 대한민국 최대 장거리 도보길이 완성된다.

[신익수 여행·레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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