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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에 자유로운 김수영 시인의 아내여서 행복했다”

소한마리-화절령- 2013. 2. 20. 09:36

“모든 권력에 자유로운 김수영 시인의 아내여서 행복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  ㆍ김 시인 사후 45년 만에 ‘김수영의 연인’ 출간하는 김현경 여사

    “오래전 세상을 떠나 곁에 없지만 나를 향한 그때 당신의 사랑의 마음이 부끄럽게 살아 있는 오늘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1921~1968)의 부인 김현경 여사(86)가 다음달 출간 예정인 회고록 <김수영의 연인>(실천문학사)에서 ‘김수영의 아내’로 살아온 20여년을 정리한 말이다. 남편의 손때 묻은 사전과 손수건 등 유품을 피붙이처럼 안고 사는 그는 “그저 꿈 많던 문학소녀의 선생님으로만 맺은 첫 인연이 부부의 연으로 이어져 이렇게 질길 줄 몰랐다. 여전히 지금도 빛나는 김수영 시인의 아내로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김현경씨의 모습. | 실천문학사 제공


<김수영의 연인>은 시인의 아내이자 대서(代書)를 맡은 비서였던 김 여사가 그동안 발표했던 에세이와 추모글 외에 구술을 추가로 정리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김수영의 시에는 ‘보석 같은 아내’ ‘애처로운 아내’ ‘문명된 아내’ 등 아내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아내는 시인에게 ‘세상을 보는 창’이자 버팀목이었다. 이화여대 재학 중 시인 정지용의 제자였으며 임화, 지하련 등 카프계열 문인들과 교류했던 김 여사는 이번 회고록에서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며’ ‘풀’ 등 김수영 시에 대한 해설과 함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공개해 시인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김 여사는 15살이던 1942년 22살의 김 시인을 처음 만났다. 연애를 시작한 이들은 폴 발레리의 시집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za)>를 두고 토론했다. 폭양이 내리쬐는 한여름 여의도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물속에 뛰어들기도 했다. 김 시인은 두고두고 그 일을 회상하면서 “ ‘아방가르드’한 여자”라며 “어디서 그런 실험 정신이 나왔느냐”고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고 김 여사는 털어놨다.

1944년 2월 초 김 시인은 “마이 소울 이즈 다크(My soul is dark)”라는 신음 같은 말을 토했다. “그것은 수영의 프러포즈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1949년 겨울 서울 돈암동 근처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김 여사는 “사랑 앞에서 결혼식 같은 제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 운명이 형식이 되고 제도가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권력 행위로부터 소외를 자처한 시인의 아내가 된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수영이 숨겨온 어두운 삽화 중 하나”라며 시인이 1950년 8월 인민군에 징집됐다가 목격한 단체 처형에 관한 이야기도 책에 썼다. “낙오자들은 자신들이 죽을 웅덩이를 직접 파놓고 거기에 서서 기관총 사격을 당했다. … 수영의 몸 위로 시체가 덮이고 또 덮였다.” 김 시인은 처형 주체가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났지만 궁핍함은 이어졌다. 김 여사는 금가락지를 내다 팔아야 했다. 김 시인은 어느 날 외설적인 소설을 한 편 써보라고도 했다. 김 여사가 일본 책을 참조해 쓴 원고를 들고 나간 시인은 만취돼 돌아와 “그따위 소설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김 시인은 ‘폭주(暴酒) 시인’이었다. 만취한 날은 <수일과 순애> 같은 무성영화 변사 노릇을 하며 애교도 부렸지만, “비위에 거슬린 술을 먹은 날의 그의 주사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고 김 여사는 말했다.

김 시인은 1968년 6월15일 밤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음날 새벽 죽었다. 김 여사는 “동공은 빛을 잃었고,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으며, 손과 팔굽이 시퍼렇게 멍든” 시인의 죽음에 자책감을 느낀다. “마침 급히 쓸 돈이 필요해서 신구문화사의 신동문 시인에게 ‘번역료 선불을 좀 부탁해볼 수 없겠느냐’고 채근했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남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그의 사후 45년 만에 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알렸다. “당신 곁에서 당신 작품의 첫 독자였던 사람으로, 아내로, 한 여인으로, 이 책은 그때처럼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정서한 거라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