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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볼리비아 혁명 부활 꿈꾼 혁명의 풍운아

소한마리-화절령- 2013. 3. 7. 19:42

 

차베스, 볼리비아 혁명 부활 꿈꾼 혁명의 풍운아

경향신문 | 조찬제 기자 | 입력 2013.03.06 09:13 | 
우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4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선택한 '혁명의 풍운아'였다. 집권 20년의 대업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 임기는 시작도 해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

1954년 7월28일 수도 카라카스 남서쪽 사바테나. 인구 4000명의 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교사인 부모 밑에서 평범한 시절을 보냈다. 화가와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이 소년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뒤 다른 꿈을 꾸게 됐다. 1975년 임관해 군인의 길을 걷던 청년 차베스의 눈에 베네수엘라의 불평등과 부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 사회적 모순을 바꿀 정치 지도자가 되기로 했다.

차베스는 1982년 군부 지하에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반체제 사회주의 성향의 '볼리바르 혁명운동'을 만들었다.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던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을 독립시킨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를 계승하고자 했다. 특수부대 장교를 맡던 1989년 그는 시몬 볼리바르대 정치학과에서 교육을 받으며 체제를 바꿀 구상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에 환호하는 시민들/AP=연합뉴스

앞선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정권의 국고 횡령 사건과 추락하는 경제를 지켜볼 수 없었던 그는 1992년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차베스는 투항 조건으로 대국민 연설을 내걸었다. 뜻은 받아들여 국민 앞에서 그는 혁명의 대의를 밝히며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나 혼자 책임지겠다"고 연설했다. 당시 카리스마 넘쳤던 이미지는 대중에게 강렬하게 남았다. 이는 2년 뒤 출소한 차베스가 정치에 입문하는 큰 힘이 됐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차베스는 1994년 3월 다시 세를 모았다. 볼리바르 혁명운동을 '제5공화국운동'으로 이름을 바꾼 뒤 사회주의운동당(MAS)과 애국당(PPT)과 연대해 좌파연합 애국전선(PP)을 결성했다. 탄탄한 지지기반을 만든 차베스는 1998년 12월 대선에서 국민의 과반이 넘는 56.2%의 표를 얻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의 나이 44세, 역대 최연소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다.

정권을 잡은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최대 규모가 매장된 국가 원유를 팔아 재분배하는데 집중했다. 빈농 정착촌을 꾸려 집과 땅을 제공하고 갖가지 보조금을 국민들에게 돌려줬다. 쿠바에 석유를 싼 값에 제공하고 대신 의료진을 파견받아 무상의료를 시작하고 빈민촌과 농촌에 1만3000여명의 의사가 24시간 진료하는 서비스도 실시했다. 인구 중 40%인 극빈층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불렀다.

하지만 국가의 빈곤을 막아보려는 노력은 1999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야당의 반대에 발목을 잡힌다. 그는 기존의회를 해산하고 차베스식 노선을 강조한 신헌법을 만들어 같은해 12월 이를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이듬해 신헌법 하에 치른 첫 대선에서 그는 60%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해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굳혔다.

혁명을 기치로 내걸었던 차베스는 집권 3년차인 2002년 중대 위기를 맞는다. 여론은 그가 정부·국영기업에 측근인 군 출신 인사를 대거 포진, 자신의 정치 기반 다지기에 급급하다는 비난에 쏠렸다. 또 비상사태도 아닌 사회개혁운동에 군을 동원해 사병화한다는 논란도 일었다. 이 같은 불만은 연정을 붕괴시켰고 반정부 성향의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주도하면서 사회혼란이 고조됐다. 이후 정권퇴진 요구가 유혈사태로 확산돼 차베스는 2002년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는 문맹 성인들에게 대한 교육과 원주민 생활과 문화를 보호하는 운동에 참여하며 대중과의 끊을 놓지 않는다. 4년 뒤 2006년 12월 치른 대선에서 국민들은 차베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줬고 60%가 넘게 득표해 3선에 성공했다.

임기 연장에 대한 열망이 커진 그는 2007년 대통령 연임제한 규정을 철폐하려 국민투표로 강수를 뒀다가 패배했지만 2009년 다시 치른 국민투표로 헌법의 이 규정을 삭제했다. 장기 집권의 숙원을 푼 셈이다.

이 같은 차베스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민주주의를 퇴보시킨다는 비판도 적잖다. 외국 기업들을 국영화하고 정부와 다른 소리를 내는 언론사를 장악하며 외환도 통제했다. 빈민의 추앙을 받지만 베네수엘라 중산층 이상의 국민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반미의 남미공동체 중심에 서려했던 차베스는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 독설 발언도 서슴치 않아 서방국가에 '독재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미국과 적대적 관계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지지하는 그는 이란 등과도 협력 정책을 펴 미국·유럽 등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2006년 대선에서 맞붙었던 로살레스 후보는 "차베스 공포정치를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남미 좌파권 확대를 위해 석유를 원가에 공급하는 대신, 석유 수입은 먼저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선거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위기는 2011년 6월 암 선고였다. 당시 골반에서 종양이 발견된 후 2년간 세 차례에 걸쳐 악성종양 제거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1년이 채 안된 이듬해 2월 암 재발로 건강이 악화돼 4선을 노리던 지난해 출마도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같은해 7월 '암 해방'을 선언한 차베스는 선거 운동을 완주하며 4번째 임기를 확보했다.

차베스는 지난해 대선에서 승리한 뒤 "과거의 실수를 인정한다"면서도 "베네수엘라는 21세기 민주 사회주의를 향한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006년 대선 당시 27%포인트까지 벌어졌던 득표율은 이번 대선에서는 10%포인츠까지 줄었다. 야권이 세졌고 그의 지지층은 예전같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전과 다른 '포용 정치'로 2019년까지 총 20년에 장기 집권 기록을 세우려던 차베스는 결국 대선 직후인 지난해 12월 4번째 암수술을 받으러 쿠바로 떠났으나 합병증을 이기지 못하고 고국의 국민들 곁으로 못한 채 숨을 거뒀다.

< 조찬제 기자 helpcho65@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