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맞짱 뜬 '남미 사령관'의 14년, 놀랍다
오마이뉴스 입력 2013.03.07 13:10[오마이뉴스 손우정 기자]
우고 라파엘 차베스 프리아스(Hugo Rafael Chavez Frias). 세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도자.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한 남미의 좌파 열풍의 선봉 선 이. 그가 3월 5일 오후 4시 25분,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하여 남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은 결코 차베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선거와 같은 민주적 방식을 통해서는 절대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지금까지의 명제는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차베스의 실험 앞에 허물어졌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던 시대, 차베스의 도전은 또 다른 가능성을 우리에게 안겨줬다.
21세기에 민주주의와 결합된 사회주의를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매 순간의 위기를 뛰어난 리더십으로 돌파했다. 빈민을 위한 정책이 아닌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정치를 주장했던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에서 남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볼리바리안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떠난 베네수엘라, 과연 차베스의 혁명은 전진할 수 있을까?
차베스의 암 발병은 미국의 음모?
차베스가 결국 사망하자, 오래전부터 떠돌아다니던 음모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차베스는 지난 2011년 6월 암이 발병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남미 좌파 지도자인 아르헨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을 비롯해 페르난도 루고 파라과이 대통령, 전·현직 브라질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가 모두 암 진단을 받았다.
차베스는 2011년 말, 군 기지 연설에서 "이건 정말,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다. 확률을 볼 때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이라며 "수년 안에 미국이 반미국가 지도자들에게 암을 퍼뜨린 공작의 전모가 드러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차베스가 사망하기 직전, 베네수엘라 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는 미국대사관 공군 무관과 그의 조교를 베네수엘라에서 '사회불안 계획'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추방하면서 차베스의 암 역시 '과학적 공격'의 일환일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2004년 사망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트 아라파트의 유품에서 폴로늄-201이라는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암살 의혹을 남겼듯이, 차베스 역시 유사한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정말 미국의 음모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이 차베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그동안 미국 정보기관이 베네수엘라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미국의 앞마당에서, 가장 친미적이었던 국가를 순식간에 가장 반미적인 나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차베스와 미국 간의 악연은 뿌리가 깊다.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그의 공약에 우려를 표명해온 미국은 베네수엘라가 OPEC의장국이 되면서 원유가격을 4배 가까이 올리고 이라크를 방문하자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차베스는 2001년 10월 공영TV 방송에 출현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한 민간인 사진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에게 "행동하기 전에 생각 좀 할 것"을 주문한 순간, 미국과의 관계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 연설 직후인 2001년 11월 미국은 국무부와 국방부, 국가안보국이 베네수엘라 관련 합동회의를 열고 "베네수엘라를 외교적 고립상태에 몰아넣겠다"고 발표했다. 6개월 후, 차베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군부쿠데타에 직면해 3일 동안 쿠데타 세력에게 구금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레이건 정부의 냉전전략에 기초해 1983년 설립되어 동구사회주의국가와 칠레, 니카라과 등 중남미 반미 정권 붕괴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국민주주의기금(NED.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은 이 쿠데타의 한 주역인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에 많은 돈을 기부했으며, 차베스를 반대하는 세력이 약해질 때마다 기부액을 늘려 왔다. NED는 2003년, 우리나라 북한인권단체에 '민주주의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정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폭로해온 베네수엘라계 미국 변호사인 에바 골링거(Eva Golinger)는 미국이 반대파에게 예산을 지원하고 외교적 제재를 가하거나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방식으로 베네수엘라를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한 민명대 지도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는 3천 명이 넘는 민병대원이 차베스를 암살하기 위해 활동 중이었다고 한다.
차베스는 그러한 다양한 위협 속에서도 2002년 쿠데타를 비롯해 일명 '사장들의 파업'으로 불리는 2002년-2003년 직장폐쇄는 물론, 2004년 자신에 대한 국민소환운동도 돌파했다. 반차베스 진영의 차베스 소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해 치러진 총선에서는 친차베스 후보들이 총 167개인 국회 의석을 모조리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카스트로는 "이제 차베스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암살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차베스, 혁명가인가 독재자인가
차베스의 개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차베스는 2002년-2003년 사장들의 파업을 이겨낸 이후 막대한 석유수익을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을 확충하는 데 사용하고, 주민자치위원회법을 제정해 풀뿌리 주민 조직의 자치 강화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석유에서 나오는 막대한 부를 통해 주민자치를 조직하고 복지를 확장하는 데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지만, 남미통합 정신에 입각해 다른 남미 국가에 원조를 확대한 것에 대해서는 중산층의 반발을 불렀다.
이 중에서도 대통령 임기제한을 없앤 개헌 추진은 차베스 지지세력 내부에서도 논란이 컸다. 차베스는 지난 14년의 임기 동안 총 14차례의 선거, 또는 투표를 치렀는데, 이중 13번을 압도적 차이로 승리했다.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패배는 2007년, 대통령 임기제한 철폐를 포함한 개헌안의 부결이었다.
당시 개헌안에는 임기제한폐지 조항 이외에도 주 36시간 노동제, 남녀·인종 차별 금지, 대학평준화와 무료화 등 진보적 조치들이 담겨 있어 차베스는 이것을 '사회주의 헌법으로의 개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반차베스 진영이 조직한 개헌 반대표는 2006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조직한 반차베스 후보의 표와 별로 차이가 없는 450만 표 정도였지만, 개헌 찬성을 위해 차베스가 조직한 표는 대선에서 획득한 730만표에서 무려 300만 표가 빠진 430만 표 정도였다.
이는 차베스를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임기제한 폐지의 문제가 매우 혼란스러운 의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2002년 쿠데타 당시 억류되어 있던 차베스 구출을 주도한 바두엘 장군은 훗날 국방장관 자리까지 올랐으나 퇴임 이후 '개헌반대' 운동진영에 몸을 담기도 했다. 당시 차베스 지지자 중에서 개헌에 반대하는 이들은 '차베스 없는 차베스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영속되어야 할 것은 차베스의 임기인가, 혁명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차베스는 이때의 패배가 지나치게 복잡한 개헌안 때문이었다고 보고, 2008년 11월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이후 임기제한 폐지만을 포함한 개헌안을 밀어붙여 2009년 2월 15일 54.85%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차베스는 지난 해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이제 막 4번째 대통령 임기에 들어섰지만, 결국 그의 임기를 가로막은 것은 암이었다.
이승만의 사사오입이나 직선제 개헌, 박정희의 3선 개헌과 뒤이은 유신독재의 악몽이 있는 우리에게는 차베스의 연임제한 철폐가 민주적으로 보일 리 없다. 그러나 임기제한 철폐를 추진했던 쪽이 논리는 대통령의 임기 제한이나 연장은 모두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지, 법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영국의 마가릿 대처는 (비록 개인에게 투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총선에서 4번 승리해 4번의 임기를 수행했고, 토니 블레어도 잇따른 총선 승리로 3번의 임기를 수행했지만, 아무도 '반민주적', '독재'라고 하지 않는다,
더구나 대통령만 아니라면 평생 동안 자기 지역구에서 의원 생활을 누리는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오바마 미 대통령도 한 때 "나는 임기 제한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임기 제한에는 한 가지 형식만 있다고 믿는다. 바로 선거에 의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베네수엘라에서의 혁명과정에 차베스의 리더십이 절대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가 없는 혁명은 상상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오래 전부터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친미성향의 반차베스 진영은 튼튼한 자금력을 동원해 노골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음에 반해, 차베스가 등장하기 전 베네수엘라 진보진영은 사분오열 그 자체였다.
이제까지 베네수엘라 진보세력은 오로지 차베스의 강력한 카리스마 덕택에 단일한 행동을 유지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차베스는 우익진영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급진 좌파 블록의 폭력에 대해서도 강력한 법적 대응을 피력해 왔을 정도로 차베스 없는 좌파 진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차베스는 자신이 없어도 혁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진보세력을 모아 '통합사회주의당(PSUV)'를 창당했으나, 차베스라는 접착제가 사라진 후에도 단일한 입장과 행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여기에 나날이 높아지는 인플레이션과 생필품 부족, 여전히 4~5백만 표를 동원할 수 있는 반차베스 진영의 공세는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 혁명의 앞날을 밝지만은 않게 한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적 이해관계자들은 30일 뒤에 열리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위로부터의 리더십과 아래로부터의 자치역량의 결합...역사에 남을 지도자
그럼에도, 차베스가 지난 14년 간 이루어놓은 업적은 올바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차베스는 헌 걸레짝처럼 구질구질해진 베네수엘라 정치판에 뛰어들어, 단시간에 베네수엘라를 전혀 다른 나라로 바꿔 놓았다.
혹자는 이것이 매장량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석유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석유가 중요한 재원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누구나 석유가 있다고 해서 빈민의 복지를 이처럼 비약적으로 확대시키지는 않는다. 또한 석유 강국이라는 자원 조건과 미국의 앞마당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은 차베스에게 안팎의 거센 위협을 가했다. 또한, 임기제한 철폐 등의 논란거리가 없진 않지만, 주요 국가시설의 국유화와 빈민복지의 확대, 주민자치의 활성화 등의 개혁 작업은 철저히 국민의 투표에 근거한 민주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베네수엘라 혁명의 독특한 특징은 위로부터의 차베스 리더십과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적 역량이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4년, 대통령소환투표에 반대표를 조직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주민자치조직화 사업은 2006년 주민자치위원회로 이어졌고, 2008년부터는 10여 개의 주민자치위원회를 지역 코뮨으로 통합하고, 새로운 인프라의 수리와 건설, 수도, 관개시설, 새로운 공동체적 경제기업 건설과 경영, 관리까지 코뮨이 도맡는 급진적 구상을 추진해 왔다.
게다가 메르코스(MERCOSUR),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과 남미은행 등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응하는 남미통합을 꾸준히 진척시킴으로써 지역(local)과 국가, 국가와 지역(region)블록을 관통하는 연대의 정신을 실현해 나갔다. 누군가에게는 괴짜였고, 누군가에게는 악랄한 독재자였음에도,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차베스는 자신들의 '사령관'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찌됐건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에서 매우 오랫동안 혁명의 상징적인 인물로 살아남게 될 것이다. 차베스 지지자들은 차베스의 사망소식이 알려진 후 광장에 모여 "차베스는 우리 안에 살아 있다"를 외치고 있다. 30일 뒤에 다시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지는 몰라도, 베네수엘라와 남미는 죽은 차베스의 영향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전망이다.
차베스의 14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에게 권력을 주는 정치,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완성해 놓고 있었던 집권 후 프로그램(그 덕분에 차베스는 1998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고 1년 뒤에 제헌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하는 등 매우 빠른 시간에 개혁의 토대를 구축한다), 민영TV를 앞세운 반차베스 진영의 공세에 비타협적인 일관성으로 혁명을 밀어붙인 리더십, 모두 우리에게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어떤 정치 지도자도 감히 21세기에 '사회주의'를 거론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보기 좋게 깨버린 차베스, 빈민들이 대통령보다는 '사령관'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차베스, 민주적인 방식과 혁명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현실에서 보여준 차베스.
그의 명복을 빈다.
우고 라파엘 차베스 프리아스(Hugo Rafael Chavez Frias). 세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도자.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한 남미의 좌파 열풍의 선봉 선 이. 그가 3월 5일 오후 4시 25분,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하여 남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은 결코 차베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선거와 같은 민주적 방식을 통해서는 절대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지금까지의 명제는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차베스의 실험 앞에 허물어졌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던 시대, 차베스의 도전은 또 다른 가능성을 우리에게 안겨줬다.
21세기에 민주주의와 결합된 사회주의를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매 순간의 위기를 뛰어난 리더십으로 돌파했다. 빈민을 위한 정책이 아닌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정치를 주장했던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에서 남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볼리바리안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떠난 베네수엘라, 과연 차베스의 혁명은 전진할 수 있을까?
차베스의 암 발병은 미국의 음모?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망을 보도한 < 허핑턴포스트 > |
ⓒ 허핑턴포스트 |
차베스는 2011년 말, 군 기지 연설에서 "이건 정말,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다. 확률을 볼 때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이라며 "수년 안에 미국이 반미국가 지도자들에게 암을 퍼뜨린 공작의 전모가 드러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차베스가 사망하기 직전, 베네수엘라 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는 미국대사관 공군 무관과 그의 조교를 베네수엘라에서 '사회불안 계획'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추방하면서 차베스의 암 역시 '과학적 공격'의 일환일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2004년 사망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트 아라파트의 유품에서 폴로늄-201이라는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암살 의혹을 남겼듯이, 차베스 역시 유사한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정말 미국의 음모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이 차베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그동안 미국 정보기관이 베네수엘라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미국의 앞마당에서, 가장 친미적이었던 국가를 순식간에 가장 반미적인 나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차베스와 미국 간의 악연은 뿌리가 깊다.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그의 공약에 우려를 표명해온 미국은 베네수엘라가 OPEC의장국이 되면서 원유가격을 4배 가까이 올리고 이라크를 방문하자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차베스는 2001년 10월 공영TV 방송에 출현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한 민간인 사진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에게 "행동하기 전에 생각 좀 할 것"을 주문한 순간, 미국과의 관계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 연설 직후인 2001년 11월 미국은 국무부와 국방부, 국가안보국이 베네수엘라 관련 합동회의를 열고 "베네수엘라를 외교적 고립상태에 몰아넣겠다"고 발표했다. 6개월 후, 차베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군부쿠데타에 직면해 3일 동안 쿠데타 세력에게 구금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레이건 정부의 냉전전략에 기초해 1983년 설립되어 동구사회주의국가와 칠레, 니카라과 등 중남미 반미 정권 붕괴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국민주주의기금(NED.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은 이 쿠데타의 한 주역인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에 많은 돈을 기부했으며, 차베스를 반대하는 세력이 약해질 때마다 기부액을 늘려 왔다. NED는 2003년, 우리나라 북한인권단체에 '민주주의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정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폭로해온 베네수엘라계 미국 변호사인 에바 골링거(Eva Golinger)는 미국이 반대파에게 예산을 지원하고 외교적 제재를 가하거나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방식으로 베네수엘라를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한 민명대 지도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는 3천 명이 넘는 민병대원이 차베스를 암살하기 위해 활동 중이었다고 한다.
차베스는 그러한 다양한 위협 속에서도 2002년 쿠데타를 비롯해 일명 '사장들의 파업'으로 불리는 2002년-2003년 직장폐쇄는 물론, 2004년 자신에 대한 국민소환운동도 돌파했다. 반차베스 진영의 차베스 소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해 치러진 총선에서는 친차베스 후보들이 총 167개인 국회 의석을 모조리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카스트로는 "이제 차베스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암살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차베스, 혁명가인가 독재자인가
차베스의 개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차베스는 2002년-2003년 사장들의 파업을 이겨낸 이후 막대한 석유수익을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을 확충하는 데 사용하고, 주민자치위원회법을 제정해 풀뿌리 주민 조직의 자치 강화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석유에서 나오는 막대한 부를 통해 주민자치를 조직하고 복지를 확장하는 데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지만, 남미통합 정신에 입각해 다른 남미 국가에 원조를 확대한 것에 대해서는 중산층의 반발을 불렀다.
이 중에서도 대통령 임기제한을 없앤 개헌 추진은 차베스 지지세력 내부에서도 논란이 컸다. 차베스는 지난 14년의 임기 동안 총 14차례의 선거, 또는 투표를 치렀는데, 이중 13번을 압도적 차이로 승리했다.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패배는 2007년, 대통령 임기제한 철폐를 포함한 개헌안의 부결이었다.
당시 개헌안에는 임기제한폐지 조항 이외에도 주 36시간 노동제, 남녀·인종 차별 금지, 대학평준화와 무료화 등 진보적 조치들이 담겨 있어 차베스는 이것을 '사회주의 헌법으로의 개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반차베스 진영이 조직한 개헌 반대표는 2006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조직한 반차베스 후보의 표와 별로 차이가 없는 450만 표 정도였지만, 개헌 찬성을 위해 차베스가 조직한 표는 대선에서 획득한 730만표에서 무려 300만 표가 빠진 430만 표 정도였다.
이는 차베스를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임기제한 폐지의 문제가 매우 혼란스러운 의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2002년 쿠데타 당시 억류되어 있던 차베스 구출을 주도한 바두엘 장군은 훗날 국방장관 자리까지 올랐으나 퇴임 이후 '개헌반대' 운동진영에 몸을 담기도 했다. 당시 차베스 지지자 중에서 개헌에 반대하는 이들은 '차베스 없는 차베스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영속되어야 할 것은 차베스의 임기인가, 혁명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차베스는 이때의 패배가 지나치게 복잡한 개헌안 때문이었다고 보고, 2008년 11월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이후 임기제한 폐지만을 포함한 개헌안을 밀어붙여 2009년 2월 15일 54.85%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차베스는 지난 해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이제 막 4번째 대통령 임기에 들어섰지만, 결국 그의 임기를 가로막은 것은 암이었다.
이승만의 사사오입이나 직선제 개헌, 박정희의 3선 개헌과 뒤이은 유신독재의 악몽이 있는 우리에게는 차베스의 연임제한 철폐가 민주적으로 보일 리 없다. 그러나 임기제한 철폐를 추진했던 쪽이 논리는 대통령의 임기 제한이나 연장은 모두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지, 법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영국의 마가릿 대처는 (비록 개인에게 투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총선에서 4번 승리해 4번의 임기를 수행했고, 토니 블레어도 잇따른 총선 승리로 3번의 임기를 수행했지만, 아무도 '반민주적', '독재'라고 하지 않는다,
더구나 대통령만 아니라면 평생 동안 자기 지역구에서 의원 생활을 누리는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오바마 미 대통령도 한 때 "나는 임기 제한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임기 제한에는 한 가지 형식만 있다고 믿는다. 바로 선거에 의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베네수엘라에서의 혁명과정에 차베스의 리더십이 절대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가 없는 혁명은 상상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오래 전부터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친미성향의 반차베스 진영은 튼튼한 자금력을 동원해 노골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음에 반해, 차베스가 등장하기 전 베네수엘라 진보진영은 사분오열 그 자체였다.
이제까지 베네수엘라 진보세력은 오로지 차베스의 강력한 카리스마 덕택에 단일한 행동을 유지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차베스는 우익진영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급진 좌파 블록의 폭력에 대해서도 강력한 법적 대응을 피력해 왔을 정도로 차베스 없는 좌파 진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차베스는 자신이 없어도 혁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진보세력을 모아 '통합사회주의당(PSUV)'를 창당했으나, 차베스라는 접착제가 사라진 후에도 단일한 입장과 행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여기에 나날이 높아지는 인플레이션과 생필품 부족, 여전히 4~5백만 표를 동원할 수 있는 반차베스 진영의 공세는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 혁명의 앞날을 밝지만은 않게 한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적 이해관계자들은 30일 뒤에 열리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위로부터의 리더십과 아래로부터의 자치역량의 결합...역사에 남을 지도자
그럼에도, 차베스가 지난 14년 간 이루어놓은 업적은 올바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차베스는 헌 걸레짝처럼 구질구질해진 베네수엘라 정치판에 뛰어들어, 단시간에 베네수엘라를 전혀 다른 나라로 바꿔 놓았다.
혹자는 이것이 매장량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석유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석유가 중요한 재원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누구나 석유가 있다고 해서 빈민의 복지를 이처럼 비약적으로 확대시키지는 않는다. 또한 석유 강국이라는 자원 조건과 미국의 앞마당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은 차베스에게 안팎의 거센 위협을 가했다. 또한, 임기제한 철폐 등의 논란거리가 없진 않지만, 주요 국가시설의 국유화와 빈민복지의 확대, 주민자치의 활성화 등의 개혁 작업은 철저히 국민의 투표에 근거한 민주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베네수엘라 혁명의 독특한 특징은 위로부터의 차베스 리더십과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적 역량이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4년, 대통령소환투표에 반대표를 조직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주민자치조직화 사업은 2006년 주민자치위원회로 이어졌고, 2008년부터는 10여 개의 주민자치위원회를 지역 코뮨으로 통합하고, 새로운 인프라의 수리와 건설, 수도, 관개시설, 새로운 공동체적 경제기업 건설과 경영, 관리까지 코뮨이 도맡는 급진적 구상을 추진해 왔다.
게다가 메르코스(MERCOSUR),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과 남미은행 등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응하는 남미통합을 꾸준히 진척시킴으로써 지역(local)과 국가, 국가와 지역(region)블록을 관통하는 연대의 정신을 실현해 나갔다. 누군가에게는 괴짜였고, 누군가에게는 악랄한 독재자였음에도,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차베스는 자신들의 '사령관'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찌됐건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에서 매우 오랫동안 혁명의 상징적인 인물로 살아남게 될 것이다. 차베스 지지자들은 차베스의 사망소식이 알려진 후 광장에 모여 "차베스는 우리 안에 살아 있다"를 외치고 있다. 30일 뒤에 다시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지는 몰라도, 베네수엘라와 남미는 죽은 차베스의 영향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전망이다.
차베스의 14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에게 권력을 주는 정치,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완성해 놓고 있었던 집권 후 프로그램(그 덕분에 차베스는 1998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고 1년 뒤에 제헌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하는 등 매우 빠른 시간에 개혁의 토대를 구축한다), 민영TV를 앞세운 반차베스 진영의 공세에 비타협적인 일관성으로 혁명을 밀어붙인 리더십, 모두 우리에게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어떤 정치 지도자도 감히 21세기에 '사회주의'를 거론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보기 좋게 깨버린 차베스, 빈민들이 대통령보다는 '사령관'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차베스, 민주적인 방식과 혁명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현실에서 보여준 차베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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