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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90년대 정치

소한마리-화절령- 2014. 8. 13. 20:10
  • 1990년대 정치
  •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3당의 주도로 5공, 광주청문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의 공조체제는 외견상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야3당의 여소야대 정국에 대한 이해관계는 각기 달랐다. 여소야대 정국의 최대의 수혜자는 김대중이었다. 제1야당이 됨으로써 김대중은 87년 대선 패배의 책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고, 또한 차기 대권을 향한 길에서 김영삼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에게 제2야당이란 차기 대권 경쟁에서 그만큼 불리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0여 년 동안 박정희 밑에서 2인자 노릇을 해 온 김종필에게 야당은 생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3 김 씨 모두 전두환 정권의 피해자라는 데서 5공 청산에 쉽게 합의할 수 있었지만, 향후에도 야 3당의 공조가 계속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야3당의 공조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의 중간평가를 둘러싸고부터였다.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 유세 도중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민들에게 신임을 묻는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는데, 1989년에 접어들면서 이 중간평가를 약속대로 실시하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3 김 씨는 1989년 3월 4일 만나 중간평가를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 형식으로 실시하되, 그 시기는 5공청산 및 민주화실천 등 국민이 평가할 만한 실적을 올린 뒤여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그런데 3월 10일 김대중이 노태우와 만나 야3당의 합의를 뒤엎고 중간평가를 유보하는 데 전격 합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노태우는 3월 20일 중간평가를 유보한다고 선언하였다. 야3당의 공조체제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이어 발생한 평민당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 민주당의 동해시 보궐선거 후보 매수 사건 등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점점 더 틈이 벌어져 갔다. 김종필은 끊임없이 내각제개헌의 필요성을 띠우며 보수 세력의 연합을 주장하고 있었다. 1987년 이후 노동쟁의가 급증하고,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 의원이 잇달아 방북하는 데 놀란 보수세력 사이에서 보수세력 대연합의 요구도 높아졌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인이 청와대에서 만나 3당 합당을 선언했다. 이들은 합당의 명분을 중도민주세력의 대단합으로 정치적 안정 위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해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3당 합당은 실제로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노린 보수 세력의 대연합이었고, 진보적 민주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반민주연합이었으며, 호남을 고립시키기 위한 반호남연합이었다. 3당 합당으로 노태우는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김영삼은 차...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트웨티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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