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가시 많은 장미밭에서 춤추는 것과 같죠"
지금의 나를 만든건'로마인 이야기' '火山島''프랑스 중위의
여자'…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판타지 작품 해보고 싶어
"번역이 조강지처라면 소설은 애인 같은 존재입니다"
원문과 1대 1 대응
돼선 좋은 번역 아니다
원래 한글 소설 같다는 말 내게는 큰 찬사
'모비딕' 번역 가장 어려워… 도중에 두번이나 중단
보통은
3개월 걸리는데 이 책은 반년이나 걸려
제주 앞바다는 소년에게 두 가지 꿈을 줬다. 훌훌
육지(陸地)로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그냥 남아 오순도순 살고픈 생각도 했다. 1972년 첫 꿈이 실현됐다.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청춘이 대해(大海)를 건넜다.소년은 한국 최고의 번역가가 됐다. 김석희(金碩禧·58)다. 무심한 세월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렀다. "회갑(回甲) 전에 꼭 돌아가겠다"는 다짐이 2006년 현실로 다가왔다. 부친 사후 홀로된 노모(老母)의 곁을 그는 지키고 싶었다.
물 건너온 객(客)에게 김석희가 말했다. "6남매의 장남이었기에…생각이 많았어요.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고향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집은 어떻게 지을까, 친구·친척들과의 관계는…. 설렘과 망설임의 연속이었습니다."
작년 4월 6일 김석희는 인천항에 있었다. 장서 7000권을 비롯한 가재도구를 페리 편에 실어보냈다. 다음날 그는 대학 1년 후배인 아내와 애월로 왔다. 노장(老將)이 다시 해협(海峽)을 건넜다. 낙향(落鄕)한 지 1년,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파도가 왼쪽에서 넘실댔다. 에메랄드와 옥(玉)을 갈아넣은 듯한 빛깔이다. 유채꽃밭 너머 오른쪽엔 한라산이 버티고 있었다. 산과 바다를 품에 안은 김석희가 행복한 듯 실눈 뜬 채 말했다. "제주에서도 이렇게 좋은 땅은 별로 없어요."
- ▲ 말은 재미있게 못해도 글에는 유머·실험이 넘쳤다. 김석희는 암호 같은 문체와 싸우며 컴컴한 밤을 새웠다. 작업의 끝에서 기쁨을 맛보는 현실, 그렇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김석희가 어느날 바다 건너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렁이는 물결을 가르고 나아가는 커다란 범선처럼. / 이종현 객원기자
―고향에 돌아오는 게 그리 힘듭니까.
"귀향의 꿈을 세웠다 허물고 다시 세웠다 허물기를 반복했습니다.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집도 한번 지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집 한번 지으면 10년은 늙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친구와 친척들과의 관계 설정도 신경쓰였고요."
―난제(難題)는 오히려 쉽게 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2007년 가을 친척 결혼식에 갔다가 친구를 순댓국 집으로 불렀어요. 집 짓는 문제로 고민하는데 그가 '우리 동생 있잖아'라고 하더군요. 그의 도움을 받아 이곳저곳 구경 다니니 용기가 생기더군요. 시공은 박홍일이라고, 서예가가 해줬습니다. 한국서예대전에서 특선(特選)까지 한 친굽니다. 원래 건축을 했던 사람인데 그가 오래전부터 제 집은 꼭 자기가 지어주겠다고 했거든요. 돌이켜보면 전 행운아였어요. 여러분들이 발벗고 나서줬으니까요. 저는 저녁에 그들과 어울려 술만 마시면 됐어요."
―책이 많습니다.
"이사하려 정리해보니 1만권이 넘더군요. 그 중 3000권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고 왔어요. 그랬는데도 막상 이사 와보니 책꽂이에 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궁리 끝에 애월도서관에 연락했어요. 관장과 직원이 차를 몰고 왔습니다. 나중에 보니 관장이 제가 나온 제주일고 후배였습니다. 그렇게 기증한 책이 '김석희 기증도서'가 됐지요."
―'짐'도 인연이 될 때가 있군요.
"그로부터 1주일 뒤 두 분이 찾아왔어요. 제가 낙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요. 애월문학회가 제가 오기 얼마 전에 결성됐대요. 회장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봉직하다 은퇴한 분이고 간사는 책방 주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제게 권유했습니다 . '며칠 뒤 열리는 해변 시 낭송회에 참가해달라고, 술잔이나 나누면서 지내자고'요. 그게 계기가 돼 애월문학회 정식회원이 됐습니다. 그해 가을에 동인지를 만드는데 제가 술자리에서 폼 잡은 것 때문에 발목을 잡혔어요."
―어떻게 폼을 잡았길래요.
"'시인 황지우(黃芝雨)와 친구다, 소설가 김훈도 잘 안다'고 자랑 좀 한 거지요."
―그래서요.
"결국 동인지에 황지우, 김정환, 김훈, 최시한, 장경렬이 글을 보내줬고 고향 선배인 현기영 선생은 축사를 해줬어요. 회원들이 '우리도 전국구(全國區)가 됐다'며 기뻐하더군요. 지방에도 이렇게 아름답고 뜻있는 활동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저도 즐거웠습니다."
―제주에 온 지 두 달 만에 대작(大作) 번역에 착수했지요.
"그 책을 만난 게 어찌 보면 인연입니다. 2003년 기자와 만났을 때 '앞으로 난해하고 불가능한 번역만 골라 도전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기사를 읽고 '옳다구나'하고 무릎을 쳤던 분이 있었어요."
―누굽니까, 그 사람이.
"출판사 '작가정신'의 박영숙 사장이었어요. 그 무렵 박 사장은 아셰트에서 펴낸 클래식 시리즈의 번역 계약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 중 하나를 제게 보낸 거죠. 윽박지르기도 하고 꼬드기기도 하면서."
―그게 허먼 멜빌의 모비딕(백경)이지요?
"맡고 나서 '아이구!'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도 어려워 도중에 두 번이나 그만뒀던 책이거든요. 제가 보통 책 한권 번역하는데 석 달이 걸립니다. 모비딕은 정확히 여섯달이 걸렸어요. 200자 원고지로 3510매나 됩니다. 출판사에선 올 1월 20일까지 책을 내지 못하면 계약이 파기될 판이라고 엄포까지 놨어요. 벼랑에 몰린 심정이었지요."
―백경이 그렇게 어려운 책입니까.
"비유와 상징, 축약과 도치와 비문(非文)이 섞인 '문체의 박물관'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찌 보면 그걸 해내면서 자연스레 고향에 녹아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책을 읽다 포경선 내부 묘사부분에 질려 결국 포기한 적이 있는데.
"재미없는 부분은 획 지나가도 됩니다. 역시 제가 번역한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도 바다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시시콜콜 나옵니다. 그런 건 건너뛰고 읽어도 관계없어요."
■이상의 날개
문리대 시절 불문과엔 삼악당(三惡黨)이 있었다. 김석희, 이철, 진형준이다. 진형준이 김석희의 소설집에 쓴 발문은 이렇다. "광기(狂氣)로 말하면 그는 염치가 없었다. 그는 광기의 촉수(觸手)를 술뿐 아니라 문학에도 여지없이…."
서울대 대학신문 주최 대학문학상에서 그는 2년 연속 상(賞)을 받았다. 2학년 때 소설 부문, 3학년 때 시(詩) 부문이었다. 동일 인물이 다른 장르에서 연속 수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모두가 그의 화려한 앞날을 기대했다.
―원래 글을 잘 썼습니까.
"중학교 다닐 때 열린 백일장에는 서예(書藝)부문으로 나갔어요. 고교 입학하던 해, 그러니까 중3 겨울방학 때 처음 지금 제주일보의 전신(前身)인 제주신문 주최 3·1문학상에서 수필 부문 장원을 했지요. 고2 때는 동국대 고교생 산문부문에서 장원을 했고요. 그 시절엔 참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을유, 정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끼고 살았으니까요."
―대학에서도 그런 성적을 거뒀으니 기개도 자부심도 대단했을 텐데…, 정작 신춘문예는 서른여섯 때 됐지요.
"문지(文知)나 창비(創批)를 통해 등단하는 길도 있었지만 문리대 출신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참 약오르는 것이 최종심에만 4번 오른 거예요."
―그럼 신문에 당선작과 함께 언급됐겠네요.
"그게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생계 때문에 삼성출판사에서 1년 가까이, 다른 출판사에서도 몇달씩 일한 적이 있어요. 제 체질 때문인지, '이 길이 아니다' 싶었는지 회사에서 뼈를 묻을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상의 날개'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시절이 참 무거웠던 때였잖아요. 패러디와 말장난을 하고 싶었어요. 날개가 뭐랄까, 탈출의 매개체라 할 수도 있지요. 이상은 기생 금홍의 품에서 꿈만 꾸다 말았지만 전 죽은 이상(李箱)을 되살려 날개를 돋게 만들고 싶었어요. 한번 날아보자꾸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패러디작품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건 이례적입니다.
"패러디작품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게 제가 처음은 아니에요. 동아일보에 그
누구더라, 신동아 편집장 지낸 그 가발 쓴 분…. 그도 198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김승옥(金承鈺) 선생의 '서울, 1964년 겨울'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당선됐어요. 전 그걸 몰랐어요. 만일 알았다면 '이상의 날개'를 쓰지 않았을 겁니다."
―'이상의 날개'를 보면
주인공과 집주인의 대화가 나옵니다. '오늘 뭐 먹었소'(주인공) '삼양라면 먹었소'(집주인) '나는 삼양라면에 계란 풀어 먹었소' '세입자가
주인보다 더 잘 먹는군'. 그걸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전 문학의 기능이 비판과 유머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말은 재미있게 못해요.
남들이 한 유머를 노트해 와 집에서 아내에게 들려줄 때도 항상 제풀에 먼저 웃고 말거든요."
―소설 '아담이라는 이름의 개'에선
개(犬) 이름이 아담입니다. 소설 '태초에 돌멩이가 있었다'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부분이
연상됩니다.
"개를 아담으로 만든 건 의인화(擬人化)의 반대였어요. 뭐랄까, 개만도 못한 사람이랄까. 태초에 돌멩이가 있었다는
말장난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런 뜻이 있어요. 돌멩이가 폭력이긴 하지만 짓밟히는 사람, 즉 약자(弱者)의 수단인 겁니다. 집 헐리고 내쫓기는데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울분 같은 거죠."
―그럼 소설 '너는 누구냐'에 나오는 풀풀이라는 개는 뭘
뜻합니까. 그 개가 푸른 기와집에 산다는 것도 의미심장한데.
"풀은 영어로 가득하다(Full), 뒤의 풀은 어리석다(Fool)인데
아무도 모르더군요. 클 태(泰), 어리석다는 우(愚), 이러면 알겠지요."
―'1987년 여름-사막에서, 겨울-황야로'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창과 방패'에선 87항쟁 때 사망한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시를 인용했지요. 제목은 황지우의 시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에서 암시를 받았다고 밝혔는데. 참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라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실험적인 소설기법이라 할까, 소설에
한 페이지가량 비어 있는 공간이 나옵니다. 전 그게 독자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어떤 흔적을 남기겠느냐고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노동운동 일지(日誌)로만 한 챕터를 채우기도 했고요. 읽기가 쉽진 않을 겁니다. 중간 중간에 소설가가 등장해 흐름을
끊어놓기도 하거든요. '독자 여러분은 이런 전개를 상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제가 아까 '삼악당'얘기를 했지만 이인성,
최수철과 제가 불문과 '삼총사'라 불리기도 했어요. 자의식(自意識)이 강하다고."
―'김석희의 소설은 위악적(僞惡的)이다,
영악하다'는 평도 있고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는 평도 있습니다.
"전 소설을 쓴다기보다 짓는다,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스토리
위주가 아니진 않지만 벗어나려고 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야 팔리겠습니까. 요즘 잘 팔리는 소설은
읽어보나요?
"그러니 번역을 하고 있지요. 문학과 거리를 둬서 그런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쓰는 소설에 관심이 안 가요. 너무
사소설(私小說)화됐다고 할까, 너무 잘아졌다고 할까….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너무 그러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내 얘기네' 하고 읽을 순
있겠지요. 하지만 한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통선(共通善)의 시대가 약해졌다고
봅니다."
1979년 불문과 졸업 후 국문과에 학사편입했을 때다. 그는 돈이 궁했다. 그때 친구가 '동평사'라는 작은 출판사를 차린 뒤 말했다. "책 한권만 번역해줘. 나중에 팔리면 술 사주마." 그래서 붙잡은 게 뱅자맹 콩스탕의 '아돌프'다.
두 달간 원고지 600매를 채워줬지만 돈은 못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출판사 사장이 복학한 것이다. 2002년 이 책을 재번역했을 때 그는 이런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에 갇혀 전전긍긍하는 20년 전 모습이 보이더군요."
―본격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된 게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火山島)'와의 인연 때문이지요.
"이름이 비슷해 오해받기도 하지만 원래 그분은 성이 신씨입니다. 87년 6·29선언 후 실천문학의 이호철 선생이 일본에 가 김석범 선생을 만났어요. 화산도를 번역하기로 한 겁니다. 그때 이문구 선생이 사장, 송기원 선생이 편집장을 했는데 그 책이 제게 온 거죠. 처음 보는 순간 '이런 게 진짜 보석(寶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8년 4월 3일에 맞춰 출판기념회까지 열 예정이었는데 정작 김 선생은 끝내 오지 못했습니다."
―왜요?
"김석범 선생은 국적이 조선(朝鮮)으로 돼 있습니다. 남도 북도 아닌 그 옛날 해방 전의 국적이지요. 그것 때문에 오해를 사 입국 불허 조치가 내려졌어요. 그분이 국내에 온 건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었어요. 제가 원래 번역했던 화산도는 5권이고 그 후 2부 10권이 나왔는데 그것도 끝내 한글로 옮기지 못했어요. 출판사에서 볼 때는 '팔린다'는 전망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
―제주도민들은 4·3에 대한 감정이 특별한 것 같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참극(慘劇)이었으니까요. 군경(軍警) 쪽에선 좌익준동이라고 하지만 자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거잖아요. 이 동네에선 양민이 죽고 저 동네에선 군경이 죽었으니 부모의 원수인데 지금도 그 앙금이 남아 있지요. 오죽했으면 화합의 비석까지 세운 동네가 있겠어요. 그래서 제 소설에선 탐라독립공화국이란 설정이 나와요. 이른바 제3의 모색이지요."
―탐라독립공화국?
"원래 제주도가 고려 때 복속됐잖아요. 그 후부턴 당해오기만 했고. 관광지가 됐으니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던져준 돈 몇푼으로 먹고사는 처지 비슷하지요. 지금 제주도가 특별자치도인데 100년 뒤엔 독립공화국이 될지도 모르지요."
―아무래도 '김석희 번역'하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연상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출판사에선 처음에 시오노 나나미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일본' '여류(女流)' '아마추어'라는 단어가 확 떠오르잖아요. 시오노 나나미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 두곳에서 퇴짜를 맞기도 했어요. 한길사 김언호 사장이 도쿄에 자주 들릅니다. 서점가를 돌면 흐름을 알 수 있으니까요. 그가 한 서점에서 '시오노 코너'를 보고 책 몇권을 들고 왔어요. 그래서 정도영, 오정환씨와 제게 한권씩을 맡긴 겁니다. 두 분은 연세가 있으니 '바다도시 이야기' 같은 걸 했어요. '로마인 이야기는 15권까지 나온다니 우리가 시작해도 끝낼 수 없으니 젊은 김석희가 맡아라'고 한 거지요. 그때 굉장히 빨리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재미있었습니까.
"신조사(新潮社)에서 책이 나온 게 12월 중순이었는데 한 달 이내에 해야 했어요. 학생들 방학 마케팅이라는 게 있거든요. 워낙 서두르자고 해 하루 12시간씩 번역했어요."
―지금까지 번역한 책이 180종, 250권가량이라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로마인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고 다음이 '화산도', 그 다음은 음~,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번역하면서 '내가 소설을 안 써도 이런 책을 번역할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글쓰기의 욕망을 채워준 책이라고나 할까. 전 그 책을 3번이나 번역했어요."
―그렇다면 번역하기가 제일 어려웠던 책 세 가지를 꼽는다면?
"모비딕,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열린책들에서 펴낸 프로이트 전집 중 한권이었습니다. 일본 출신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카프카 스타일의 글을 쓰는데 암호 해독을 강요하는 것 같지요. 심리소설이다 보니 맥락 잡기도 쉽지 않고요."
―밤 작업을 주로 한다고 들었습니다. 체력 소모가 크겠지요.
"새벽 3시쯤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 낮 12시쯤 일어나고요. 제가 사실 3~4년에 한 번씩 단식(斷食)을 합니다. 신춘문예 때문에 고생했는지 30대 후반에 위궤양을 심하게 앓았어요. 그때 어떤 분이 단식을 권했어요. 단식하고 나면 위장이 깨끗해집니다. 주로 닷새를 하는데 1주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대체 몇개 국어를 합니까.
"영어야 원래 하는 것이고 프랑스어는 대학교 교양과정 때 배웠어요. 굉장히 세게 가르쳤습니다. 일본어는 국문과 학사편입할 때 배웠고요. 제주도 말도 사실 외국어나 마찬가지인데, 그럼 국어까지 합해 5개 국어를 하는 셈이네요."
―사전(辭典)을 1년마다 간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항상 사전을 들춥니다. 사전엔 사실 정해진 용법만 나오지요.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그걸 살피다 보면 가장 적확한 표현이 확 머리에 연상될 때가 있어요. 그것 때문에 사전을 보는 겁니다."
- ▲ 에메랄드와 옥을 뒤범벅한 바다 건너 제주에 김석희가 살고 있다. 김석희는 서울에서 가지고 온 장서 1000권을 애월도서관에 기증했다. 애월문학회에서 활동하고 번역하다 보니 어느덧 그는 제주사람이 돼 있었다. / 이종현 객원기자
■장미 밭에서 춤추기
자기가 맡은 책의 분위기를 느껴보려 현지를 도는 번역가가 있다. 저자를 직접 만나는 번역가도
있다. 김석희는 껄껄 웃으며 "난 불어를 전공했지만 프랑스도 안 가봤다"고 했다. 시오노 나나미도 그가 방한했을 때나 만났다고
한다.
김석희는 불문학을 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근대 이후 영미(英美) 문학이 풍성해졌지만 문학의 본령(本領)은
불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는 몽테뉴의 에세이를 예로 들며 "문학과 사상을 접목시킨 대단한 책"이라고 했다.
―제 딸도 불어를
전공했는데, 요즘 불어 해서는 살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그건 어학쪽 문제일 뿐이지요. 프랑스어를 배워 패션이나 디자인
같은 걸 하면 좋을 텐데요. 아직도 경쟁력이 충분하고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언젠가 한 매체에서 김 선생을 한국의 번역가 랭킹
2위로 올려놓았더군요.
"그때 선정한 곳이 ○출판사였는데 조금 문제가 있었어요. 1등 한 분이 바로 그 출판사에서 책을 냈는데 그걸
선전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고 전 생각해요. 그분은 중역(重譯)을 하는 걸로 아는데 그건…. 상위에 오른 또 다른 분은 번역이
아니라…."
―어떤 번역이 좋은 번역입니까.
"고교 수준의 독해가 아니니 1대1 대응이 돼선 곤란합니다. 번역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성실한 추녀(醜女)냐, 불성실한 미녀(美女)'냐는 거죠. 원문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곤 안 되지요. 쭉 하다 보면
접점이 있어요. 그럴 때 독자들의 가독성이 높아지죠. 조우석이란 기자가 절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어요. '김 아무개가 쓴 책은 원래 한글로
쓰였던 책 같다'고. 전 찬사라 생각합니다."
―'번역은 조강지처요, 소설은 애인(愛人)'이라고 한 건 또 무슨
뜻입니까.
"번역은 빛은 안 나지만 절 먹여살려주잖아요. 소설은 폼은 나는데 생활에 도움은 안 되고요. 제가 지금 번역에 몰두하고
있지만 소설과 절교한 건 아니에요. 워밍업이랄까, 때가 되면 소설을 다시 쓸 겁니다."
―번역한 것을 출판사에서 수정도
합니까.
"주로 근성이 있는 편집자들이 자기 문투로 고치지요. 처음에 두어 번 손댔기에 야단을 쳤더니 그 다음부턴 안 하더군요.
(현재 번역 중인 원고를 보여주며) 요즘엔 기껏 고쳐봤자 '끝입니다 하는'을 '끝입니다 라는'으로 바꾸는 정돕니다. 그래서 전 원고를 넘길 때
완벽하게 해서 줍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나요.
"없어요. 아니아니, 딱 한 번 있었다.
'폴리스맨(Policeman·경찰)'을 정치인이라고 한 거예요. 그때 난리가 났었어요. 천하의 김석희가 이걸 몰랐을 리는 없고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왔으니까요."
―누가 할 일 없이 그런 분석을 합니까.
"요즘 젊은 번역자들은 제가 번역한 책을
참고서로 쓴다고 들었어요. 자기들이 먼저 번역해보고 마치 정답 보듯 제 번역과 대조해가면서 공부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더
조심스러워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우리나라도 이제 문학의 엄숙주의를 벗어났지요. 아무래도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같은 작품들의 영향이 컸을거예요. 우리 대학에선 장르문학을 가르치지 않지만 전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전
판타지 쪽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고전에 대해선.
"고전, 고전 하는데 재미없는 고전(古典)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미있는 것을 읽게 만들어야지요. 서울대에서 추천하는 고전 100선(選) 같은 걸 보면 기가 차요. 선생들이 자기가 전공한 것만
추천하고. 제가 번역한 쥘 베른의 '해저 2만리'같은 작품을 대학에선 가르치지도 않지요. 그 책을 아동도서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1년에 대략 몇 권쯤 번역하나요.
"(책상에 붙은 스케줄을 보여주며) 대략 한 달에 한권이라고 보면
돼요. 올 1월엔 '아프리카'를 했고 이건 '프랑스 혁명'을 다룬 4권짜리고요. 번역료는 책 두께에 따라 다르니 일률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액수를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제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받을 겁니다. 앞서 말한 분들은 이제 번역도 안 하잖아요."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지겨워질 때도 있을 텐데요.
"소설은 천재(天才)가 하지만 번역은 시간이 갈수록 좋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번역한 걸 다시 보면 부끄러워질 때가 많아요. 번역의 능력은 연륜(年輪)에 따라 커지는 겁니다."
제주 취재를 마치고 온
뒤 김석희는 두 차례 메일을 보냈다. 원래 그에게 청춘 시절의 러브스토리와 한살 아래 아내와의 결혼 이야기를 묻고 싶었는데 "시시콜콜한
연애담보다는 번역과 문학에 대해서만 써 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메일은 이런 것이었다. "제주에서의 4·3은 여전히 이슈이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절 취재했을 때 소제목(小題目)을 추천해달라고 하셨는데 '번역은 장미 밭에서 춤추기'가 어떨까요. 제 책 '번역가의 서재'
머리말에 있습니다."
그 대목을 펴봤다. "나는 언젠가 번역을 '장미밭에서 춤추기'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고통 속의 쾌락, 거기에
번역의 매력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매력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번역을 계속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