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물다 간...

어린 여우- 이산하

소한마리-화절령- 2014. 10. 4. 23:07
어린 여우

 

이산하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너자마자, 그만 꼬리를
물에 적시고 말았다(易經 64괘-‘未濟’편 괘사)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다.
어린 여우가 건너기엔 가라앉지 않을까 우려되는
깊고 물살 센 강이 하나 있다.
그 강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어린 여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나에게 붉은 꼬리를 흔들어 보인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 꼬리가 찬란한 깃발처럼 보인다.

이른 새벽,
나는 강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제 먹은 것들을 토해낸다.
부서지지 않은 밥알들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젠 밥알 하나조차 변화시킬 수 없는
내 안의 마지막 배수진마저 무너진 것 같아
강물에 떠내려가는 지푸라기에도 큰절을 한다.
어차피 마음밖에 건널 수 없는 강
그 너머 또다른 무엇이 존재할지 몰라도
결코 지금의 여기보다 더 허무할 수는 없겠지.

제 아무리 달음박질쳐도 끝내 닿을 수 없는 곳
닿더라도 지나온 길이 다 무너져야만 시작되는 곳
지금도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
부지런히 강을 건너가는 어린 여우여
네 남루한 깃발이 흘러간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물에 적신들 가라앉기야 하겠느냐.
가라앉은들 빛이 바래기야 하겠느냐.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다.
어린 여우가 건너기엔 가라앉지 않을까 우려되는
깊고 물살 센 강이 하나 있다.

- <문학동네> 201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