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한국 청년 "군대 가지 않으려 프랑스 망명"
오마이뉴스입력2014.11.11 11:03
[오마이뉴스 안악희 기자]
저는 지난 2014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4일간 일본에서 이예다씨와 함께 징병 반대 활동을 하고 온 '안악희(가명)'라고 합니다. 이예다씨는 2012년 징병을 거부하고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오로지 병역거부라는 하나의 사유로만 망명이 받아들여진 최초의 사례입니다. 저는 앞으로 진행될 연재에서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여러분께 알리고자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예다씨의 방일은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2014년 내내 벌어진 군 내의 사고와 맞물려서, 한국군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구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얼마나 열악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아울러 민주화 이후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아직까지 병역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이예다씨는 아주 바르고 반듯한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활동가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작가 아마미야 카린씨로부터는 '예다링'이라는 애칭까지 받았습니다. 4일 동안 벌어진 질풍노도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이곳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기자 말
ⓒ 안악희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일본 외국인 특파원 협회가 위치한 유라쿠쵸 역으로 향했다. 유라쿠쵸는 도쿄의 중심인 도쿄역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쿄는 관공서와 황거(일왕 궁)를 비롯한 주요 시설이 걸어서 몇 분 안 되는 거리에 모두 모여 있다. 황거를 중심으로 조금 위로 올라가면 도쿄대가 나오고,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국회, 수상관저, 아카사카가 나오는 식이다.
지난해부터 일본인들이 줄기차게 집단적 자위권 반대 시위를 벌인 곳이 바로 이 일대였다고 한다. "국회 주변은 시끄럽지만, 긴자나 고라쿠엔 구장은 조용하다. 나에게는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표현도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침묵하는 다수" 표현은 이제 한국에서 더 잘 써먹는다.
ⓒ 안악희
ⓒ 안악희
일본 외국인 특파원 협회(아래 특파원 협회)는 1945년 종전 이후, 도쿄에 모인 외국인 기자와 방송인들이 모여서 만든 곳이다. 오래된 역사를 지닌 만큼 많은 사람들이 특파원 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달라이 라마, 하토야마 유키오, 헨리 키신저, 모리타 아키오 등 역사적인 인물들은 물론 와타나베 켄이나 새미 소사같은 연예, 체육인들도 특파원 협회의 테이블에 앉아 수많은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20층에 위치한 특파원 협회의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아마미야 카린씨와 이예다씨, 양성택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도착했다. 우리는 대기실로 인도되어 기자회견에 대한 간단한 사항을 주고 받았다. 이번 행사를 수용한 특파원 협회 측 담당자는 공교롭게도 재일동포였다. 이 분은 내 이름의 마지막에 '희'자가 들어가서 나를 여자인 줄로 착각하셨다고 한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도 '희'자가 들어가지 않느냐"고 말했다.
총의 장막 뒤에 가려진 '진짜 군대 이야기'
사실 내가 양성택씨와 이 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서 였다. 수년 전, 양성택씨는 당시 도쿄에 사는 유학생이었다. 나는 그를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에도 일본에서 징병제 반대에 관한 이야기를 주변에 계속 설파하고 다녔다.
양성택씨는 그로 인해 각종 사회단체와 연결고리가 생겼고, 일부 활동가들과도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를 그저 그런 괴짜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바로 그 시점에 그는 막 일본의 평론가나 작가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어서 조금씩 활동을 확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 역시 한국의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예비역이다. 대학시절 운동권도 아니었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운동권을 혐오하는 입장이었고(지금도 운동권 친구들이 있기는 하나 운동권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개인이 거대 담론에 짓눌리는 현상은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양성택씨와의 오랜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슨무슨 사상이나 주의보다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점에서 의견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즈음 양성택씨가 도쿄의 사회단체들과 함께 몇 가지 이벤트를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예비역의 입장에서 징병제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고, 한 번 일본에 와서 같이 이벤트도 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줘 보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나는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일본인 활동가들, 양성택씨, 좌우 양 진영의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특이하게도 나는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적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징병제라는 것이 한국을 벗어난 다른 국가에서는 엄청나게 말도 안 되는 제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때까지 나는 징병제는 어떻게든 없어지는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는 좀 어렵고, 최대한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활동을 계속해 오면서, 머릿속의 적신호는 "이 말도 안 되는 인권침해와 착취를 어떻게든 멈춰야 한다"라는 메시지로 확고하게 고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무한정으로 공짜 인력이 공급되고 있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 만난 평화주의자들은 군대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아무리 군대가 문제가 많아도 스페인 내전 때의 의용군이나 2차대전 시기 나치 독일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레지스탕스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군대는 없어질래야 없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무력집단은 존재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런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난 군대에서 무슨 큰 일을 하고 온 것도 아니고, 위관이나 영관급 장교로 전역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주 평범하게 병역을 마친 사람으로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를 좀 외부에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사실 국내에서만 해도 코믹한 군대 예능이나 스타들의 군생활만 티브이에 나올 뿐, 총의 장막 뒤에 가려진 진짜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정말이지 그 울타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외부에서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장막을 핑계로 너무 많은 부조리가 존재했다.
ⓒ 안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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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에 앞서 우리는 신 쥬리히 신문의 패트릭 졸 기자를 만나 사전 협의에 들어갔다. 그는 이 기자회견을 제안한 인물로, 한국 군대 관련 이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나와는 영어로, 이예다씨와는 프랑스어로 대화했다. 졸씨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시다시피, 최근 한국군의 문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나 언론인들도 근 몇 달간 일어났던 총기 난사나 구타 사망 사건을 알고 있고요. 하지만, 많은 기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과연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통계적인 수치는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나 가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평범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일단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가 이 곳에 서 있는 이유가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에, 군복무를 마친 한국의 남성들은, 그래도 그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 당시의 어려운 기억을 자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힘든 기억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는 한국 특유의 마초이즘 때문이기도 하고요. 저는 주로 저와 제 주변의 이야기, 그 안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전 협의가 끝나고 우리는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갔다. 발표 순서는 이예다씨, 나, 아마미야 카린씨의 순서였다. 세계 각국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 서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 기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예다씨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감옥에 가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예다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1991년에 태어났습니다. 현재 22세입니다. 2012년 7월, 20살이던 해에 징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망명을 결심하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중략)... 2013년 6월, 프랑스 정부에서 난민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징병 거부로 망명한 한국인은 있었지만, 징병제 자체가 망명의 이유로 인정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소수자나 종교를 이유로 징병을 갈 수 없다고 하여, 망명이 허용되었습니다...(중략)...
한국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체복무제도 없습니다. 징병에 응하지 않으면 1년 반 동안 수감됩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는 징병에 가지 않으면 취직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징병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략)... 내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은 한국에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망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도록 한국 정부에 요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중략)... 프랑스에 망명한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이예다씨는 이어서, 일본에서도 집단적 자위권이 인정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징병제에 대한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징병제가 실시된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자신의 이야기가 일본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최대한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요점만 정리하자면,
'대한민국 국군은 창군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열악한 군대였고, 때문에 대부분의 국방력을 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G20의 당당한 일원이 된 시점에도 거의 공짜나 다름 없는 급여를 지급하며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휴가도 굉장히 적게 주어지고, 영내 생활을 하기 때문에 휴일도 휴일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것은 국가를 지키는 힘든 일에 대한 명백한 착취다. 사실상 죄수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감시 하에 생활하는데,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병사를 당당한 요원이 아닌 소모품으로만 대우한다. 병사들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매체를 거의 사용할 수 없고, 24시간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외부의 소식도 잘 접할 수가 없다...'
등의 이야기였다.
이어서 아마미야씨의 간략한 발표가 이어졌다. 아마미야씨는 일본에서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 평화 문제, 징병제 및 인권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마미야씨의 간결하지만 의미있는 이야기가 끝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질문은 21세기의 한국인 망명자 이예다씨에게 집중되었다. 망명자로서의 생활은 어떠한지, 징병 거부의 실상은 어떠한지, 군사주의와 관련한 생각은 어떠한지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예정 시간보다 몇 분 초과하는 통에, 패트릭 졸씨는 마지막으로 의미 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둘 다 징병제에 반대하고 있지만, 한 명은 거부했고, 한 명은 다녀왔다. 매우 다른 선택인데, 둘 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가?"
이예다씨가 답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서 더한 방법도 생각했다. 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 생각도 했다. 망명이 받아들여지고 나서, 미디어를 통해서 나의 이야기가 전해진 뒤로 좋은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기회도 생기고 좋았다. 나는 상당히 행복하다."
이어서 내가 답했다.
"가끔은 군대에서의 시간들을 후회하곤 하지만, 모두 그렇듯이 그 시절은 종종 채색되어 아름답게 다가온다. 사실 나와 함께 그 안에 있던 군인들은 모두 대단한,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종종 그 '구조'가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고 폭력적으로 만들곤 한다. 사실 나는 무서워서 갔다 왔다. 안 가면 감옥에 가니까. 만약 군복무를 대체할 방법이 있었다면 안 갔을 것이다."
어느새 기자회견은 쏜살같이 끝났다. 잠시 같은 건물의 1층의 펍에서 휴식을 취하고 우리는 한 걸음에 코엔지로 달려갔다. 코엔지의 '펀디트'라는 카페에서 토크 이벤트가 계획되어 있었다. 코엔지의 작은 초밥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이예다씨는 아마미야씨의 책을 선물 받았다.
ⓒ 안악희
펀디트에서의 토크 이벤트도 여러모로 즐거웠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의 '삶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고용불안, 취업, 세대문제, 자유, 집단적 자위권, 동아시아의 평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가벼운 분위기였기에 우리는 모두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느새 펀디트에서도 이벤트가 끝났다. 그 와중에도 일본의 TBS 방송국에서 온 취재진들은 이예다씨를 밀착 취재했다. 이예다씨가 숙소로 잡은 방부터 그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모든 것을 취재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던 양성택씨는 우리의 기자회견이 벌써 유튜브에 업로드되었다고 알려왔다. 그는 펀디트에 설치된 프로젝터로 기자회견 영상을 상영했다. 스크린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이 생소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뭉클한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제 한껏 여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일의 일정이 남아 있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좀 더 걸음걸이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었다.
ⓒ 안악희
저는 지난 2014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4일간 일본에서 이예다씨와 함께 징병 반대 활동을 하고 온 '안악희(가명)'라고 합니다. 이예다씨는 2012년 징병을 거부하고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오로지 병역거부라는 하나의 사유로만 망명이 받아들여진 최초의 사례입니다. 저는 앞으로 진행될 연재에서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여러분께 알리고자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예다씨의 방일은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2014년 내내 벌어진 군 내의 사고와 맞물려서, 한국군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구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얼마나 열악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아울러 민주화 이후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아직까지 병역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이예다씨는 아주 바르고 반듯한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활동가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작가 아마미야 카린씨로부터는 '예다링'이라는 애칭까지 받았습니다. 4일 동안 벌어진 질풍노도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이곳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기자 말
▲ 일본 외국인 특파원 협회의 세 사람일본 외국인 특파원 협회(FCCJ)의 방명록에 담긴 세 사람의 서명.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예다씨, 필자, 아마미야 카린씨의 서명.
ⓒ 안악희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일본 외국인 특파원 협회가 위치한 유라쿠쵸 역으로 향했다. 유라쿠쵸는 도쿄의 중심인 도쿄역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쿄는 관공서와 황거(일왕 궁)를 비롯한 주요 시설이 걸어서 몇 분 안 되는 거리에 모두 모여 있다. 황거를 중심으로 조금 위로 올라가면 도쿄대가 나오고,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국회, 수상관저, 아카사카가 나오는 식이다.
지난해부터 일본인들이 줄기차게 집단적 자위권 반대 시위를 벌인 곳이 바로 이 일대였다고 한다. "국회 주변은 시끄럽지만, 긴자나 고라쿠엔 구장은 조용하다. 나에게는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표현도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침묵하는 다수" 표현은 이제 한국에서 더 잘 써먹는다.
▲ 일본 외국인 특파원 협회동아시아의 각종 이슈에 관한 기자회견이 열리는 유서 깊은 기자클럽이다. 이 곳에서 수많은 역사적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 안악희
▲ 어디서 많이 보던 분특파원 협회의 복도에는 이제까지 기자회견을 한 많은 명사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중에 한국에 대해 "특별"하게 "독특한 쪽"으로 관심이 많으신,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 도지사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좋아요 눌러드렸다.
ⓒ 안악희
일본 외국인 특파원 협회(아래 특파원 협회)는 1945년 종전 이후, 도쿄에 모인 외국인 기자와 방송인들이 모여서 만든 곳이다. 오래된 역사를 지닌 만큼 많은 사람들이 특파원 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달라이 라마, 하토야마 유키오, 헨리 키신저, 모리타 아키오 등 역사적인 인물들은 물론 와타나베 켄이나 새미 소사같은 연예, 체육인들도 특파원 협회의 테이블에 앉아 수많은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20층에 위치한 특파원 협회의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아마미야 카린씨와 이예다씨, 양성택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도착했다. 우리는 대기실로 인도되어 기자회견에 대한 간단한 사항을 주고 받았다. 이번 행사를 수용한 특파원 협회 측 담당자는 공교롭게도 재일동포였다. 이 분은 내 이름의 마지막에 '희'자가 들어가서 나를 여자인 줄로 착각하셨다고 한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도 '희'자가 들어가지 않느냐"고 말했다.
총의 장막 뒤에 가려진 '진짜 군대 이야기'
사실 내가 양성택씨와 이 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서 였다. 수년 전, 양성택씨는 당시 도쿄에 사는 유학생이었다. 나는 그를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에도 일본에서 징병제 반대에 관한 이야기를 주변에 계속 설파하고 다녔다.
양성택씨는 그로 인해 각종 사회단체와 연결고리가 생겼고, 일부 활동가들과도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를 그저 그런 괴짜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바로 그 시점에 그는 막 일본의 평론가나 작가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어서 조금씩 활동을 확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 역시 한국의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예비역이다. 대학시절 운동권도 아니었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운동권을 혐오하는 입장이었고(지금도 운동권 친구들이 있기는 하나 운동권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개인이 거대 담론에 짓눌리는 현상은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양성택씨와의 오랜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슨무슨 사상이나 주의보다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점에서 의견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즈음 양성택씨가 도쿄의 사회단체들과 함께 몇 가지 이벤트를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예비역의 입장에서 징병제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고, 한 번 일본에 와서 같이 이벤트도 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줘 보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나는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일본인 활동가들, 양성택씨, 좌우 양 진영의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특이하게도 나는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적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징병제라는 것이 한국을 벗어난 다른 국가에서는 엄청나게 말도 안 되는 제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때까지 나는 징병제는 어떻게든 없어지는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는 좀 어렵고, 최대한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활동을 계속해 오면서, 머릿속의 적신호는 "이 말도 안 되는 인권침해와 착취를 어떻게든 멈춰야 한다"라는 메시지로 확고하게 고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무한정으로 공짜 인력이 공급되고 있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 만난 평화주의자들은 군대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아무리 군대가 문제가 많아도 스페인 내전 때의 의용군이나 2차대전 시기 나치 독일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레지스탕스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군대는 없어질래야 없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무력집단은 존재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런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난 군대에서 무슨 큰 일을 하고 온 것도 아니고, 위관이나 영관급 장교로 전역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주 평범하게 병역을 마친 사람으로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를 좀 외부에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사실 국내에서만 해도 코믹한 군대 예능이나 스타들의 군생활만 티브이에 나올 뿐, 총의 장막 뒤에 가려진 진짜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정말이지 그 울타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외부에서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장막을 핑계로 너무 많은 부조리가 존재했다.
▲ 방명록을 적고 있는 이예다씨기자회견에 나선 우리 셋은 방명록에 서명했다. 앞쪽에는 이전에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명사들의 서명이 쓰여 있었다.
ⓒ 안악희
▲ 망명객을 위한 선물코엔지의 한 초밥집에서 이예다씨가 아마미야 카린씨의 책 <프레카리아트>를 선물로 받았다
ⓒ 안악희
기자회견에 앞서 우리는 신 쥬리히 신문의 패트릭 졸 기자를 만나 사전 협의에 들어갔다. 그는 이 기자회견을 제안한 인물로, 한국 군대 관련 이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나와는 영어로, 이예다씨와는 프랑스어로 대화했다. 졸씨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시다시피, 최근 한국군의 문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나 언론인들도 근 몇 달간 일어났던 총기 난사나 구타 사망 사건을 알고 있고요. 하지만, 많은 기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과연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통계적인 수치는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나 가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평범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일단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가 이 곳에 서 있는 이유가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에, 군복무를 마친 한국의 남성들은, 그래도 그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 당시의 어려운 기억을 자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힘든 기억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는 한국 특유의 마초이즘 때문이기도 하고요. 저는 주로 저와 제 주변의 이야기, 그 안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전 협의가 끝나고 우리는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갔다. 발표 순서는 이예다씨, 나, 아마미야 카린씨의 순서였다. 세계 각국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 서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 기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예다씨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감옥에 가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예다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1991년에 태어났습니다. 현재 22세입니다. 2012년 7월, 20살이던 해에 징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망명을 결심하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중략)... 2013년 6월, 프랑스 정부에서 난민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징병 거부로 망명한 한국인은 있었지만, 징병제 자체가 망명의 이유로 인정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소수자나 종교를 이유로 징병을 갈 수 없다고 하여, 망명이 허용되었습니다...(중략)...
한국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체복무제도 없습니다. 징병에 응하지 않으면 1년 반 동안 수감됩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는 징병에 가지 않으면 취직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징병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략)... 내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은 한국에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망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도록 한국 정부에 요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중략)... 프랑스에 망명한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이예다씨는 이어서, 일본에서도 집단적 자위권이 인정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징병제에 대한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징병제가 실시된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자신의 이야기가 일본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최대한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요점만 정리하자면,
'대한민국 국군은 창군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열악한 군대였고, 때문에 대부분의 국방력을 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G20의 당당한 일원이 된 시점에도 거의 공짜나 다름 없는 급여를 지급하며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휴가도 굉장히 적게 주어지고, 영내 생활을 하기 때문에 휴일도 휴일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것은 국가를 지키는 힘든 일에 대한 명백한 착취다. 사실상 죄수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감시 하에 생활하는데,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병사를 당당한 요원이 아닌 소모품으로만 대우한다. 병사들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매체를 거의 사용할 수 없고, 24시간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외부의 소식도 잘 접할 수가 없다...'
등의 이야기였다.
이어서 아마미야씨의 간략한 발표가 이어졌다. 아마미야씨는 일본에서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 평화 문제, 징병제 및 인권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마미야씨의 간결하지만 의미있는 이야기가 끝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질문은 21세기의 한국인 망명자 이예다씨에게 집중되었다. 망명자로서의 생활은 어떠한지, 징병 거부의 실상은 어떠한지, 군사주의와 관련한 생각은 어떠한지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예정 시간보다 몇 분 초과하는 통에, 패트릭 졸씨는 마지막으로 의미 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둘 다 징병제에 반대하고 있지만, 한 명은 거부했고, 한 명은 다녀왔다. 매우 다른 선택인데, 둘 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가?"
이예다씨가 답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서 더한 방법도 생각했다. 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 생각도 했다. 망명이 받아들여지고 나서, 미디어를 통해서 나의 이야기가 전해진 뒤로 좋은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기회도 생기고 좋았다. 나는 상당히 행복하다."
이어서 내가 답했다.
"가끔은 군대에서의 시간들을 후회하곤 하지만, 모두 그렇듯이 그 시절은 종종 채색되어 아름답게 다가온다. 사실 나와 함께 그 안에 있던 군인들은 모두 대단한,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종종 그 '구조'가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고 폭력적으로 만들곤 한다. 사실 나는 무서워서 갔다 왔다. 안 가면 감옥에 가니까. 만약 군복무를 대체할 방법이 있었다면 안 갔을 것이다."
어느새 기자회견은 쏜살같이 끝났다. 잠시 같은 건물의 1층의 펍에서 휴식을 취하고 우리는 한 걸음에 코엔지로 달려갔다. 코엔지의 '펀디트'라는 카페에서 토크 이벤트가 계획되어 있었다. 코엔지의 작은 초밥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이예다씨는 아마미야씨의 책을 선물 받았다.
▲ 기자회견이 끝난 뒤특파원 협회의 테이블에 서서 포즈를 취한 세 사람. 왼쪽부터 필자, 이예다씨, 아마미야 카린씨.
ⓒ 안악희
펀디트에서의 토크 이벤트도 여러모로 즐거웠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의 '삶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고용불안, 취업, 세대문제, 자유, 집단적 자위권, 동아시아의 평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가벼운 분위기였기에 우리는 모두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느새 펀디트에서도 이벤트가 끝났다. 그 와중에도 일본의 TBS 방송국에서 온 취재진들은 이예다씨를 밀착 취재했다. 이예다씨가 숙소로 잡은 방부터 그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모든 것을 취재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던 양성택씨는 우리의 기자회견이 벌써 유튜브에 업로드되었다고 알려왔다. 그는 펀디트에 설치된 프로젝터로 기자회견 영상을 상영했다. 스크린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이 생소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뭉클한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제 한껏 여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일의 일정이 남아 있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좀 더 걸음걸이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었다.
▲ 뜨거운 취재열기보기 드문 한국인 망명자를 취재하려는 열기 또한 뜨거웠다. 숙소에서 이예다씨를 취재중인 TBS 취재진. 이예다씨 왼쪽은 아마미야 카린씨.
ⓒ 안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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