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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마지막 수감자 "내가 배후세력이라고?"

소한마리-화절령- 2015. 1. 17. 22:30

용산참사 마지막 수감자 "내가 배후세력이라고?"

미디어오늘|입력2015.01.17 19:36

[인터뷰] 남경남 전 전국철거민연합 의장 "철거민이 싸우기에 전철연이 있다"

[미디어오늘이하늬 기자]

"내가 6년 있다 나오니까 핸드폰 사용 자체를 못하고 지하철 타는 방법을 몰라서 10분, 20분을 헤맸어요. 국회의원들이 왜 이걸로 아가씨 사진을 보다가 걸리나 했는데 화면이 참 선명하네요." 남경남(61) 전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의장이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웃었다.

수감되기 직전인 2009년, 그는 금색 폴더형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당시는 '롤리팝'이 최신 휴대전화 기기였다. 전철 역시 카드가 아니라 종이로 된 승차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명이 발전하는데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요. 이걸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마트폰을 쳐다보던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 전 의장은 용산참사의 마지막 수감자다. 다른 용산참사 수감자들이 지난 2013년 1월 설 특별사면으로 출소했을 때 그는 예외였다. 용산 지역 철거민들은 '생계형'으로 볼 수 있지만 그는 용산참사의 배후세력이라는 이유였다. 그는 5년 형기를 꽉 채우고 지난 11일 대전교도소에서 만기출소했다.



남경남(61) 전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의장을 지난 16일 서울 서대문구 전철연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진= 이하늬 기자

 

 

"배후세력? 나는 인정할 수 없어요. 정권이 폭력적으로 나오면 철거민들이 무서워서 보따리 싸서 시골로 내려가든지 노숙자가 되든지 할 거 같죠? 그런거면 전철연이 생기지도 않았어요. 철거민이 싸우기 때문에 전철연이 있는겁니다. 정부는 전철연에서 철거민들 조직해서 싸우는 거라고 분석을 하는데 영 엉터리야."


'철거민이 싸우기 때문에 전철연이 있다'는 남 전 의장의 말처럼 그 역시 철거민이었다. 1990년 경기도 용인시 수지 풍덕지구에서다. 당시 그는 1년여의 싸움을 통해 재개발 후 임대주택과 그동안 거주할 이주단지를 보장받았다. 당시의 싸움은 한겨레, MBC <PD수첩>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오는거에요. 특히 수도권에서 많이 왔어요. 어떻게 투쟁을 해서 이걸 받았나.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지역에 와서 일을 해달라고 하고. 당시 전국 각지에 철거민협의회가 있었어요. 94년에 이걸 하나로 묶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그렇게 전국철거민연합이 생겼다.

용산도 마찬가지였다. 남 전 의장은 먼저 전철연에 연락을 해온 것도 용산 철거민들이라고 기억했다. "당시 전철연에 조강특위(조직강화특위)가 있었어요. 용산 철도노조 사무실에 주민들 모시고 설명회를 했어요. 왜 우리는 개발 지역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가. 현실적인 이주대책은 왜 강구가 안 되나 (그런 내용으로)."

그렇게 남 전 의장과 용산 철거민들이 함께 하게 됐다. 대부분 철거지역이 그렇듯 당시 용산도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용역들이 (철거대책위 회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식당 앞에 죽은 쥐 갖다놓고 쓰레기 버리고 가게 앞에서 인상 쓰면서 있고. 그러다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항의하면 용역과 시비가 붙는거죠."

그 과정에서 고 이상림씨는 예비 며느리 앞에서 용역들에게 맞기도 했다. 당시 이씨의 나이는 일흔이었다. "용역들이 예비 며느리에게 성희롱 비슷한 걸 했고 그걸 보다 못한 어르신이 용역들에게 따진거죠. 그런데 철거지역은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이 안 와요. 유혈낭자는 보통 있는 일이에요."

'망루'는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용역들의 폭력에서 벗어나 싸우기 위한 철거민들의 투쟁 수단이라는 것이다. 실제 망루는 용산참사 현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철거민들은 투쟁의 수단으로 망루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들어온 것은 용산이 처음이었다.



2009년 1월 용산참사 당시 현장많은 이들이 철거민이 화염병을 던져 화재가 발생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재판에서 경찰은 당시 화염병이 꺼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철거민들은 자신들이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화재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셈이다. 국과수 실장은 재판에서 당시 망루가 사람 정전기만으로 화재가 날 수 있는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남의 옥상에 망루를 지으면 벌금을 내게 하면 돼요. 그런데 경찰이 나와서 물대포를 쏘면서 강제진압을 해요? 그때 2층에 인화물질이 있었는데 그게 공기 중에 둥둥 떠다녔어요. 그럴 때는 옷에 정전기만 일어도 불이 난대요. 어떻게 불이 났는지도 모르면서 철거민이라고 특정을 해버린 거죠. 경찰이 죽었기 때문에 저는 배후가 된 거고." 남 전 의장이 배후세력이 된 과정이다.

당시 남 전 의장은 용산참사 현장에 없었다. 억울하지 않을까. 하지만 억울함의 결이 조금 달랐다. "물론 억울하죠.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니까 철거민이 쫓겨나고 노동자가 해고되고 해고노동자가 철탑에 올라가고. 하지만 투쟁 없이 쟁취하는 역사는 없습니다."

남 전 의장에 대해 '강경파'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는 "용역깡패, 경찰, 건설업체가 다 합쳐서 몰아내는데 여기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한다"면서 "투쟁을 안 하는 건 생존권 투쟁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남 전 의장은 앞으로 철거민 운동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먹고사는 문제는 아이 엄마가 어렵게 노동을 해서 먹고 살고 있어요. 과거에 실비 식당을 했는데 죽도록 일해서 먹고 삽니다. 내가 출소를 하면 건설현장에라도 들어가 살림에 보탬이 될 줄 알았을텐데. 그래도 전철연 사무실 간다니까 휴대폰을 쥐어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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