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호락논쟁4,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소한마리-화절령- 2015. 5. 8. 09:07

호락논쟁,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등록 :2015-05-07 19:04

크게 작게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④ 이기(理氣)에서 현실까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태극도. 태극에서 음양, 오행을 거쳐 인간과 만물이 생겨나는 성리학의 우주관을 보여준다. 유학의 여러 사조 가운데 성리학이 크게 융성한 배경은 바로 이런 우주적 스케일이다.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태극도. 태극에서 음양, 오행을 거쳐 인간과 만물이 생겨나는 성리학의 우주관을 보여준다. 유학의 여러 사조 가운데 성리학이 크게 융성한 배경은 바로 이런 우주적 스케일이다.

 

 

18세기  초 충청도와 서울에서 벌어진 논쟁은 스승들이 개입하여 한쪽 제자의 손을 들어주자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학맥과 이론을 갖춘 학파가 시작된 것이다. 호론과 낙론은 그렇게 출발하였다. 문제는 결론이 서로 반대라는 데 있었다. 정반대의 결론은 지방과 서울이 가졌던 학풍의 차이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는 개개인의 판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판단은 성리학의 오래된 난제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응답이기도 했다.

 

태초에 이(理)와 기(氣)가 있었다

성리학은 유학의 여러 사조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유는 맹자가 강조했던 인간의 선한 본성을 우주 차원으로 확장한 스케일에 있었다. 이때 동원된 개념이 이(理)와 기(氣)이다.

이(理)는 우주의 질서·법칙이자, 만물에 깃들어 있는 형성의 원리이기도 했다. 우주의 질서가 하나하나의 사물에 내재한다는 대담한 설정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와 연결되었다. 이것이 ‘성즉리’(性卽理)이니, 성리학이란 명칭은 여기서 기인했다.

기(氣)는 더 변화무쌍하다. 아지랑이처럼 보일락 말락 하는 기운에서 연상된 이 개념은 만물을 움직이는 에너지처럼 생각했고, 때로는 그것이 응축되어 만물 자체가 된다고도 생각했다. 무언가 근본적인 원소가 응축하여 만물이 되는 과정을 생각해도 좋고,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포스’와 같은 에너지가 염력이나 번개 따위로 현실화하는 과정을 생각해도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기는 너무 추상적이었으므로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관련해서는 태극·음양·오행과 같은, 그나마 도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또다른 개념들을 빌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생성된 세계에서는 이·기가 어떻게 존재하고 작동하고 있는가? 성리학자들은 이·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불상리’(不相離)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불상잡’(不相雜)이란 틀을 구상해냈다. 간단히 말해 현상계에서는 함께 발현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들의 위상을 분리해낼 수 있다는 식이었다.

섞여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는 이·기의 묘한 관계는, 어떤 관점에서 어떤 측면을 말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이론을 낳았다. 조선에서 벌어진 사단칠정논쟁의 핵심 역시 이 관계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황은 섞이지 않고 따로 존재한다는 ‘불상잡’을 중시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인 사단은 이(理)가 발하고, 감각·정서인 칠정은 기(氣)가 발한다고 주장했다. 한 세대 뒤의 이이는 현실은 오로지 기(氣)로 이루어져 있고 이(理)는 그 안에 깃든 원리로 보았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상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현실에서는 오로지 칠정만이 발현되고, 사단은 칠정의 착한 측면이라고 주장했다.

 

본성과 정서가 섞인 인간의 마음

사단칠정논쟁은 이·기의 메커니즘을 인간의 무대로 끌어내려 해명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영명(靈明)한 존재인지라 이·기가 얽히는 특별한 장소를 하나 갖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이었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이·기에 기반을 둔 본성과 정서가 통일되어 있다고 보았고 이를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표현했다.

사단칠정논쟁은 결국 마음에 대한 해명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마음의 정체를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순간이 감각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의 마음, 곧 ‘미발지심’(未發之心)이었다. 이 말은 <중용>에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마음을 중(中)이라 한다’는 유명한 구절에서 나왔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고요한 마음을 유지한 미발의 상태에서 마음의 정체를 가장 잘 살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마음에 성과 정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해명하기란, 이·기의 분리와 결합을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 역시 일생을 두고 씨름했으며 구설과 신설을 남길 정도였다.

호론은 미발과 관련해서, 이·기가 함께 섞여 있다는 이이의 관점을 충실히 고수하였다. 미발 상태의 마음에서도 기로 인해 구축된 본성, 즉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은 약점이 있었다.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기의 영역을 인정하는 순간, 기로 인한 차별이나 우열의 가능성을 열어버려, 맹자의 성선설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 문제는 세계를 기(氣)로 설명하는 순간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성리학 융성 배경은 우주적 스케일
이때 동원된 개념이 이(理)와 기(氣)
이는 우주의 질서·법칙이자 원리
성리학 명칭도 ‘성즉리’에서 비롯
기는 만물을 움직이는 에너지
이황(낙론), 이·기 섞이지 않음 강조
이이(호론), 이·기 떨어지지 않음 강조
이·기론은 신분 차별 보장하는 이론

 

기로 인해 분열된 세계

이·기를 통해 우주와 인간을 설명하는 논리는 보편적이고 정합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교한 이론이 적용되는 현실은 보편적이지도, 정합적이지도 않았다는 데 애로가 있었다. 보편 질서로 간주된 이(理)는 그러한 차이나 부정합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기(氣)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물의 모든 차이는 기의 응축이나 순수함의 정도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모자라는 존재, 열등한 것, 부조리한 현상 역시 기가 탁한 결과라는 설명이 뒤따랐고, 곧이어 기를 온전히 부여받지 못한 존재를 차별하는 논리가 정점을 찍었다. 인간에 비해 동물의 기가 온전하지 못했고, 남자에 비해 여자가 그러했으며, 하위 신분에 존재한 사람들이나 유교 문명 너머의 오랑캐들 역시 탁한 기를 타고난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보면, 이·기는 세계를 설명하는 보편 이론이었지만, 중세의 신분 질서와 차별 논리를 보장하는 이론이기도 했다. 그것이 어찌 딱히 성리학만의 숙명이겠는가. 종교나 사상이 사회와 관계를 맺는 순간 현실의 차별적 질서에 대해 적당한 수순에서 타협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위대한 종교라면 보편 정신으로 인한 복원력 또한 갖고 있다. 성리학도 마찬가지였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설명은 유학의 대명제, 예컨대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착하다’, ‘하늘은 만물을 두루 내었다’ 등의 가능성을 제약할 우려가 있었다. 호론의 논리가 지닌 약점이 그것이었고 낙론은 그 문제를 보완하고자 했다.

낙론의 학자들도 마음이 작동하는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선과 악을 향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그 점은 호론과 같았다. 그러나 마음의 본체마저 기질과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적어도 미발 때에는 이(理)로 인해 구축된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이황이 말한 이의 발현을 강조하는 논리와 통하게 된 것이다.

 

이론은 이론, 현실은 현실

이론도 복잡하지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철학이 현실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기를 설명하건, 마음을 설명하건, 발언의 맥락과 현장성을 따지지 않으면 결론 또한 천변만화(千變萬化)하였다.

호론과 낙론의 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용한 경전의 같은 구절을 두고서도 논의는 달라질 수 있었다. 경전도 자기 입장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으니, 현실 발언에 이론을 맞추어 쓰는 일은 더 수월하였다. 위에서 보았듯이 낙론은 이(理)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평등 정신을 강조할 수 있었다. 일부 낙론의 학자들은 그 논리를 더욱 확장하여 오랑캐인 청나라가 변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폈다. 그러나 보편성에서 출발했더라도, 그 보편성이 ‘우리 혹은 유교 문명의 보편성’이란 프리즘을 거친다면 청에 대한 차별이나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정반대의 결론을 낳을 수도 있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호론도 마찬가지였다. 호론의 이론은 이이를 계승하였다. 이이는 기(氣)로 움직이는 현실 세계를 긍정하고, 그 이론에 기반하여 현실의 폐단을 개혁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호론의 학자들은 기가 구축한 현실의 차별성에 주목하고, 현실 질서를 흔들 수 있는 내외부의 우려스런 조짐들을 경계하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로서는, 철학을 독해하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현실’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셈이다. 그런데 호론과 낙론의 학자들이 현실에 대한 철학적 발언을 확장하기 전에, 정치 현실이 선공을 취했다. 숙종이 1720년에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정치 지형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논쟁은 상당 기간 잠복하게 되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