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싸구려 철학에 빠진 한국 미술
동시대 미술의 진정성은 과거 예술과 차별화하고 변별성을 지녀야 할 이유 및 존재의 방식, 방법적 제시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수년 내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유행과 얄팍한 대중적 코드에 부합하는 것으로는 존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와 화력(畵歷)을 불문하고 한국 미술계에 깊고 넓게 퍼진 상업적 성공에 대한 욕망은 남루한 현실을 핑계 삼아 타락을 조장하는 자본시스템을 정당화하는 현상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엄격한 미적 가치 완성을 위한 예술가들의 노력은 저렴한 통속성과 상업성에 침묵하는 식자들로 인해 곧잘 무색해지고 있다. 실제로, 넘치는 자본이 낳은 허영과 사치의 고급 아이템으로서의 미술에 순응한 예술가들이 당대 한국 미술계의 표본으로 등극하면서 동시대 예술인들의 혼란도 짙어지고 있다.
어떤 게 예술가의 길인지 알 수 없다는 자조 섞인 발언이 부유하고, 미술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와 온전히 동급을 이루는 현실 앞에 그동안 유지해온 강한 소신과 신념도 한없이 흔들리고 있다. 심지어 이젠 영혼을 팔아 장사하는 미술인, 상업주의에 끌려다니는 예술이라는 비판에도 다수의 미술인들은 무감각해졌다. 미술의 기획화가 빈번해지고 그것이 삶과 예술을 규정하는 온당한 방식이라는 그릇된 관념까지 합리화되자 싸구려 거리 철학에 매몰된 일부 작가들의 거만한 언행과 성과를 모방하고 재현하려는 추종자들마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그만큼 미술의 본질과 미적 가치관이 빈곤해졌음을 증명한다. 솔직히 같은 예술계 사람으로서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회가 예술가들에게 베풀 수 있는 단 하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저항’마저 자발적으로 벗어던진 채 시류에 따라 스스로를 오라지우고, 돈맛에 길들여진 ‘수준 높은 기술자’들이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상당수 존재함을 부정하기 힘들다.
여기서 강철 같은 자존감, 굴하지 않는 자존심, 순수한 미의식에 대한 갈망 따위는 읽을 수 없다. 그저 낮은 눈높이에 의존해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대중들에게 예술의 이상성을 기꺼이 상납하며, 변덕 심하고 약점 많은 관람자들의 간택에 열광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일쑤다. 그야말로 가무를 팔던 화가유항(花街柳巷)의 사치노예(奢侈奴隷)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사적 이익을 위한 정치에는 능숙할지언정 다수 예술가들의 삶을 외면하는 유령 같은 근경(近頃)의 지식인이 대부분인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 미술의 낙관적 미래를 예단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 예술가들의 역할과 의미, 미술세태에 상관없이 진득하게 작업하는 이들의 중요성은 강조될 수밖에 없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예술가야말로 시대를 말하는 입이자 지성으로서 자리해 왔음을 상기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점, 예술 역시 금전의 필요성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세속적 욕망의 실현을 갈망할수록 오히려 세인의 기억에서 배척됨이 부동의 진리임을 기억하는 혹자가 있다는 사실에서 그렇다. 다만 지금처럼 만족보다 치열한 성찰이 우선되지 않는 환경이 지속되는 한 대한민국의 새로운 예술사적 기술(記述)이란 실현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부동적인 것이라 인식되는 것에서 탈피하려는 전위성이 희미하다면 앞으로도 한국 미술은 그저 변방의 미술일 뿐이요, 기념비적인 작가의 탄생은 기대하기 힘들 것임에 틀림없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엄격한 미적 가치 완성을 위한 예술가들의 노력은 저렴한 통속성과 상업성에 침묵하는 식자들로 인해 곧잘 무색해지고 있다. 실제로, 넘치는 자본이 낳은 허영과 사치의 고급 아이템으로서의 미술에 순응한 예술가들이 당대 한국 미술계의 표본으로 등극하면서 동시대 예술인들의 혼란도 짙어지고 있다.
사진은 본문내용과 관련 없음.
어떤 게 예술가의 길인지 알 수 없다는 자조 섞인 발언이 부유하고, 미술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와 온전히 동급을 이루는 현실 앞에 그동안 유지해온 강한 소신과 신념도 한없이 흔들리고 있다. 심지어 이젠 영혼을 팔아 장사하는 미술인, 상업주의에 끌려다니는 예술이라는 비판에도 다수의 미술인들은 무감각해졌다. 미술의 기획화가 빈번해지고 그것이 삶과 예술을 규정하는 온당한 방식이라는 그릇된 관념까지 합리화되자 싸구려 거리 철학에 매몰된 일부 작가들의 거만한 언행과 성과를 모방하고 재현하려는 추종자들마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그만큼 미술의 본질과 미적 가치관이 빈곤해졌음을 증명한다. 솔직히 같은 예술계 사람으로서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회가 예술가들에게 베풀 수 있는 단 하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저항’마저 자발적으로 벗어던진 채 시류에 따라 스스로를 오라지우고, 돈맛에 길들여진 ‘수준 높은 기술자’들이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상당수 존재함을 부정하기 힘들다.
여기서 강철 같은 자존감, 굴하지 않는 자존심, 순수한 미의식에 대한 갈망 따위는 읽을 수 없다. 그저 낮은 눈높이에 의존해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대중들에게 예술의 이상성을 기꺼이 상납하며, 변덕 심하고 약점 많은 관람자들의 간택에 열광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일쑤다. 그야말로 가무를 팔던 화가유항(花街柳巷)의 사치노예(奢侈奴隷)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사적 이익을 위한 정치에는 능숙할지언정 다수 예술가들의 삶을 외면하는 유령 같은 근경(近頃)의 지식인이 대부분인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 미술의 낙관적 미래를 예단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 예술가들의 역할과 의미, 미술세태에 상관없이 진득하게 작업하는 이들의 중요성은 강조될 수밖에 없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예술가야말로 시대를 말하는 입이자 지성으로서 자리해 왔음을 상기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점, 예술 역시 금전의 필요성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세속적 욕망의 실현을 갈망할수록 오히려 세인의 기억에서 배척됨이 부동의 진리임을 기억하는 혹자가 있다는 사실에서 그렇다. 다만 지금처럼 만족보다 치열한 성찰이 우선되지 않는 환경이 지속되는 한 대한민국의 새로운 예술사적 기술(記述)이란 실현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부동적인 것이라 인식되는 것에서 탈피하려는 전위성이 희미하다면 앞으로도 한국 미술은 그저 변방의 미술일 뿐이요, 기념비적인 작가의 탄생은 기대하기 힘들 것임에 틀림없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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