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화력과 파괴적 열정 한국 고소설 중에 〈숙향전〉이라는 작품이 있다. 길에서 졸고 있던 어린 숙향을 발견한 장승상 부인은 가여운 마음이 들어 양녀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귀한 장신구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사향이라는 여종은 숙향이 훔쳐간 게 분명하다고 모함했다. 장승상 부인은 그럴 리가 없다며 믿어주었지만, 평소에 숙향을 질투하던 사향의 간계는 정교하고 치밀했다. 결국, 여종의 간계에 빠진 숙향은 집을 떠나 맨몸으로 유랑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소설은 고전적이지만 어쩐지 익숙해 보인다. 혈연중심적 관계와 친자 확인, 질투와 모함, 간계, 운명적 사랑. 이들은 요즘까지도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로서 대중적 호응을 얻는 요소이다(동시에 비난도 받는데, 대중이 (비난마저도)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대중 드라마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다).
문제는 집안의 귀한 물건이 사라졌을 때,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그것을 훔쳤을 거라고 판단하는 생각의 흐름이다. 숙향은 엄연한 양녀로 분명한 가족이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여지없이 타자로서 ‘표적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고하도록 일을 꾸민 자는 집안의 또 다른 타자인 ‘여종’이었다(신분과 인격, 교양, 품성이 비례한다는 발상은 기이해 보이지만, 요즘도 이런 편견은 여전히 작동하는 듯하다).
도덕적 정의에 충실한 고소설답게 사향은 천벌을 받지만, 중요한 것은 사향이야말로 신분이 높은 고위층의 사고방식, 감성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해 일을 꾸몄으며, 실제로 적중했다는 사실이다. 사향은 타인의 심리구조를 잘 헤아릴 만큼 총명했지만, 여종의 신분인 데다가 질투심이 강했고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기 때문에(왜 그렇지 않겠는가? 장승상 부인은 여종인 자기 대신, 길거리에서 졸고 있던,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걸인 여자애를 양녀로 삼았다. 여기서 사향이 처한 상대적 박탈감은 신분제 사회라는 역사적 맥락성을 배제한 채, 단지 질투라는 심성과 마음의 차원으로 이야기되었다. 사향은 악인으로 처벌받기 이전에 어떠한 사회적 인정구조 속에도 포함될 수 없었다), 자신의 안목과 능력(간교한 계략을 짜는 전략적 탁월성과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는 안목)을 ‘파괴적 열정’으로 펼쳐냈을 뿐이다.
‘열정’을 성찰하라 열정은 대체로 찬양되는 편이다. 청춘의 열정, 사랑의 열정, 학문·문학·예술·일·자녀교육에 대한 열정, 자기관리와 재테크의 열정……. 그러나 과잉된 열정은 종종 상대방이나 주변을 힘들게 하는 ‘파괴적 열정’으로 작용하기 일쑤다. 열정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과 담론이 제기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앨버트 O. 허시먼이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이에 대해 언급했다).
〈백설공주〉의 ‘왕비’야말로 질투라는 열정을 집요하고도 파괴적으로 운영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타인을 해치려는 열정 때문에 자기가 죽은 패배자다. 파괴적 열정의 표적은 공주였는데, 결국 자신을 제물로 바친 희생자가 되었다.
게다가 왕비는 처음부터 거울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가 결코 일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영원한 젊음의 주인이 되려는 열정이야말로 무모하고 어리석다)을 알고 있었다(말하는 거울이란 사실상, 왕비 자신의 내면의 음성을 상징한다. 거울이 말을 한다면, 거울에 비친 나 자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열정이 숲 속으로 공주를 찾아가는 수고를 감수하게 했고, 신분과 모습을 바꾸는 굴욕조차 감당하게 했다. 결과는 (그토록 거부하고 싶었던) 애초의 직관에 대한 인정과 승인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시기가 아동기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 모두는 파괴적 열정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를 이미 어린 시절에 섭렵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왕비(파괴적 열정의 주체)가 아닌 공주(선하고 약한 희생자)에게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 성찰을 훈련하는 대신, 감정에 동화되어 자기 연민에 탐닉하려는 나약한 충동에 휩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열정을 넘어서 영혼의 주체로 열정이 찬양되는 이유는 그것이 활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활력이란 다름 아닌 생명력이다. 생명은 아름답지만, 파괴를 지향할 때 곧바로 아름다움의 경역 밖으로 미끄러진다. 열정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동시에 열정으로 표상되는 감정 자체를 성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감정의 존재지만, 동시에 영혼의 존재다. 감정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영혼에 대해서라면 꺼려지는 측면이 있다. 종교인과 상담해야 할 것 같고, 절이나 성당, 교회나 사원에 가야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영혼이란 예술이나 문학을 통해, 또는 신과 대면함으로써 말할 수 있지만, 일상을 통해 말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영혼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언제나 인간은 영육(영혼과 육체)의 존재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또는 예기치 못한 수난과 고통을 겪을 때, 인생을 되돌아보는 극한의 지점이 생성되고, 영혼이 활성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혼자서 한 잔의 물을 마실 때도,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하루를 잘 살아가려고 몸의 균형을 잡을 때조차도 변함없이 출렁이는 영혼의 존재로서 숨 쉬고 있다.
문제는 열정에 대한 무지(또는 무심함) 만큼이나 스스로의 영혼에 대해 무자각하다는 점이다. 육체적 건강관리나 섭생, 다이어트나 동안(Anti-aging) 관리에 비해 정신과 마음, 영혼의 관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절하는 것처럼, 열정이 파괴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기 위해 나와 타인의 열정 모두를 성찰해야 한다.
이제 막 시작 단계인 영혼의 관리에 대해서도 일상화된 대화와 논의가 필요하다. 영혼의 훈련을 통해 신비화된 영성, 밀실에 가둬진 영성, 종교적 영성으로부터 소통적 영성, 대화적 영성(communicative spirituality), 인문적 영성으로 나아가 보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