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젊은 시절과 중년의 모습. 왼쪽은 연잉군 시절인 21살 때의 초상화이고, 오른쪽은 51살 때의 모습이다. 30년의 세월이 가져다주는 용모의 변화가 두드러져 보이지만, 부지런하고 민첩하면서 다소 신경질적이었던 영조의 성격은 두 초상화 모두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⑥ 영조, 새로운 판을 짜다
승승장구하던 노론은 경종 대에 이르자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그들에겐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자신들이 주도해 세운 세자(영조)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노론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추진했던 것은 오로지 국가의 앞날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등극한 영조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영조가 오랜 시간에 걸쳐 노론을 서서히 복권시키고 그 인물들을 중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한 붕당의 대변자가 아니라 모든 신하와 백성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국왕이 되고자 했다. 노론의 바람과 달리 영조는 정치, 사상 전반에 걸쳐 판을 새롭게 짰다. 호론, 낙론을 막론한 노론의 학자들은 그 판에 동참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춘추의리’(春秋義理) 내세워
오랑캐인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과
남인·소론 물리치라고 건의
탕평책 앞세운 영조는 거부
노론에는 ‘춘래불사춘’
탕평 선포 이복형이었던 경종만큼이나, 영조 또한 격렬한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경종 생전에도 세자가 경종의 시해 음모에 관련된다는 의혹이 있었다. 경종이 승하할 때 세자궁에서 올린 음식이 원인이었다는 의혹은 더 치명적이었다. 새 국왕이 선왕(경종)의 죽음에 관여되었다는 혐의, 이른바 ‘군무’(君誣)는 영조에게 가장 큰 족쇄였다. 숙종과 경종처럼, 영조도 처음에는 붕당을 갈아치워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위협했던 소론 강경파를 제거한 뒤 노론을 전격적으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영조의 혐의를 해결하기보다 자신들의 복권에 더 치중하는 듯했다. 그들은 경종의 질병을 공포하고 노론 대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자고 영조를 압박했다. 선왕의 위엄까지 건드리는 이 주장은, 남아 있던 소론의 반발은 물론, 왕실 전반의 위신을 추락시킬 수도 있었다. 실망한 영조는 두 해가 지나자 노론을 퇴진시키고 온건한 소론을 중용하였다. 그런데도 일부의 소론과 남인은 영조의 정통성을 의심했고, 급기야 영조 4년(1728)에 그들이 주도한 큰 반란이 터졌다. 일명 ‘이인좌의 난’으로 불리는 무신년의 반란이었다. 조선은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 이후 근 100여 년 만에 대규모의 반란을 경험하였다. 반란군은 박문수 등 온건파 소론에 의해 진압되었다. 기존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가 파국을 맛본 영조는 근본적인 반성에 들어갔다. “(반란의) 이유를 캐보면 하나는 조정에서 붕당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은 데 있다. (…) 또 하나는 해마다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죽을 처지에 있는데도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싸움에만 몰두하여 조정이 백성들의 신임을 잃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이는 백성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다.” 조정의 무능과 사익(私益) 추구를 원인으로 지목한 영조의 진단을 보면, 그가 왜 조선의 중흥에 성공한 명군이었는지 알 법도 하다. 반란이 진압된 뒤 1년을 조금 넘기고, 영조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탕평을 선포하였다.
세자 시절 영조 가르쳤던 한원진
‘춘추의리’(春秋義理) 내세워
오랑캐인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과
남인·소론 물리치라고 건의
탕평책 앞세운 영조는 거부
노론에는 ‘춘래불사춘’
학(學)-정(政) 체제를 분리하라! 노론과 소론이 수십 년 갈등하며 묵은 원한은 탕평의 선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영조는 경종과 자신의 일체성을 강조하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두 임금 모두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三宗)의 혈통을 이었다. 자신이 세자가 되고 왕위를 계승한 것 또한 오로지 경종의 처분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로써 노론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세자를 세워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주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왕들의 일체성을 내세우는 논리는 경종에게 불충한 노론 일부와, 자신에게 불충한 소론 일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에도 적절했다. ‘국왕이 일체라면 충성 또한 하나인데, 그들은 그것을 분리하여 보았다. 그 원인은 당론이라는 사익에 빠졌기 때문이다’라는 식이었다. 영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치 이론의 근원이자 붕당의 구성원을 공고히 묶어주는 정신적 원천, 곧 학문이나 사상과의 고리마저 끊고자 했다. 이 점은 부왕 숙종의 방식과는 정반대였다. 숙종은 학자들의 학문 논쟁에 공공연히 개입하였다. 윤휴의 저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논쟁,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논쟁, <예기유편>과 <가례원류> 논쟁 등 일련의 논쟁은 모두 숙종 대에 일어났다. 숙종은 이들 논쟁에 끼어들어 판정을 내리고, 이를 빌미 삼아 정권을 바꾸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국가가 학술·이념 논쟁에 개입하거나, 색깔론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과 흡사하다. 학문을 정치 논쟁에 남용하는 고리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영조의 해결은 간단했다. 학문에 대한 견해는 사적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공(公)을 대표하는 국가와 국왕은 간섭하지 않는다. 영조 대에는 유학자 사이의 논쟁을 국왕이 처분하고 정국 변화의 소재로 이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조 2년에 노론 유생들이 양명학을 공부한 정제두를 비난하고 나섰으나, 영조는 그 비판을 일축해 버렸다. 숙종 대에 남인과 소론의 학문을 문제 삼아 재미를 보았던 노론으로서는 새 국왕의 처분은 당혹스러웠다. 다행히 영조는 경종 대에 명예가 실추된 노론 학자들을 신원하는 데에는 열심이었다. 송시열, 권상하, 김창협 등에게 내려졌던 불리한 처분은 지체없이 삭제되었다. 실권은 챙겨주지 않으면서 명예는 인정해주는 영조의 사상 정책은, 노론의 학자들에겐 마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이 아닌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한원진의 기대와 좌절 영조는 집권 초반부터 경종 대에 소외되었던 노론 학자들을 적극 등용하였다. 호론 쪽에서는 이간, 한원진을 필두로 윤봉구, 이이근, 채지홍, 현상벽 등 강문팔학사 대부분이 부름을 받았다. 낙론에서 이재, 박필주 정도가 천거되었던 데 비하면, 영조 초반 호론의 약진은 돋보였다. 그런데 이간, 이이근처럼 상경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고, 채지홍은 영조를 만나 한원진의 천거를 재차 요구하였다. 노론의 기대는 한원진에게 집중되고 있었던 셈이다. 세자 시절 영조를 가르쳤던 한원진은 이제 국왕이 된 영조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둘의 만남을 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한원진의 학문이 제갈량과 같다고 칭찬하였다. 한원진 역시 세상에 뜻이 있어 임금이 부르는 명을 받들었다. 그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가장 시급한 일로 아뢰었다. 그러나 영조는 실제로 그의 말을 써주지 않았다. 한원진이 드디어 떠나려 하자 영조는 지성을 다해 만류하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영조와 한원진의 만남을 유비와 제갈량의 그것처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나 보다. 한원진의 기대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영조는 건성이었고 한원진은 실망하여 조정에서 물러났다. 구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원진은 ‘춘추의리’(春秋義理)를 주장하였다. 춘추의리는 어지러운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정통을 보위하고 이단을 물리쳐야 한다는 유학의 정신을 말한다. 유교문화를 위협하는 오랑캐인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이나, 군자들로 구성된 붕당이 정권을 잡고 소인들의 붕당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치이론도 모두 이 춘추의리에 기반해 있었다. 다시 말해 한원진은 북벌 정신을 고취하고, 남인이나 소론과 같은 소인 세력을 물리치라고 건의한 것이다. 그것은 숙종 말년의 모델, 즉 노론이 전제(專制)하는 정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때문에 학-정 체제의 분리를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영조와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영조와 한원진의 갈등은 몇 년 후에 다소 엉뚱한 데서 터졌다. 영조 7년(1731)에 영조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기상을 칭찬하면서 맹자를 잠시 언급하였다. 한원진이 이를 두고 다소 과격한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자신과 명 태조를 비난했다고 크게 노하여, 한원진을 뛰어난 유학자를 뜻하는 산림(山林)의 명부에서 삭제해버렸다. 사실 이 사건은, 영조의 탕평과 사상 정책을 비판하였던 한원진과, 강경한 노론 의리의 부활을 꺼리는 영조의 대립이 빚어낸 상호 오해에 불과했다. 한원진은 다시 학문을 가다듬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