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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모르는 일본](2) 그는 식민지의 아픔 알았을까

소한마리-화절령- 2016. 6. 18. 08:52

[한국이 모르는 일본](2) 그는 식민지의 아픔 알았을까

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ㆍ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몇 년 전, 일본의 포털 사이트인 야후 재팬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편지 한 장을 입수했다. 1919년 5월6일에 시베리아 하바롭스크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사가 고향 후쿠시마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다. 왜 일본 병사가 시베리아에 있었을까? 오늘은 이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편지 내용을 읽어보면, 이와이 오장(伍長)은 시베리아에 있으면서 아버지 다미조에게 종종 편지를 썼던 것 같다. 흑룡강 물을 길어온 것을 사서 마시는데, 급수 상황이 좋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가 주둔한 하바롭스크에는 일본 육군 매점도 있고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의 가게도 있어서, 그때그때 이들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했나보다. 러시아에서 술을 안 판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필자가 이 편지를 잘못 해석하고 있나 싶어 몇 번이나 확인했다. 당시는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 내란이 일어난 시기였기 때문에 술이나 달걀 같은 일상품이 귀했던 것 같다. 그런 중에도 담뱃값은 쌌다고 하니, 필자 같은 비흡연자에게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다.

시베리아 주둔 일본 통신병이 전선을 수리하는 모습.

시베리아 주둔 일본 통신병이 전선을 수리하는 모습.


또 편지 내용을 보면 이와이 오장의 통신소대가 주둔한 부대 앞에는 미군 막사가 있었다고 한다. 1919년 당시 일본군과 미군은 러시아 혁명 당시 소비에트 세력에 대항하는 제정 러시아 측을 지원하는 연합군으로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붉은 군대 즉 적군(赤軍)에 맞서는 백군(白軍)을 지원하는 것은 영국, 캐나다, 미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등이었다.

이 가운데 흥미로운 존재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휘말려 시베리아를 떠돌던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점령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후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탈출하려 했다. 적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탈출을 저지하자 이들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미국, 일본 등의 연합군이 1917~1918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서 행군 중인 미국, 일본, 캐나다 연합군.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서 행군 중인 미국, 일본, 캐나다 연합군.


일단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은 다른 연합군 부대들과는 달리 시베리아 내륙으로 진격을 계속해서 바이칼호 근처까지 점령했다. 일본군의 진격을 따라 일본인과 일본 상업 세력의 시베리아 진출도 본격화되었다. 시베리아에서 일본인들이 활동하던 거점 가운데 하나가 아무르강(흑룡강)이 사할린 섬과 만나는 어귀에 자리한 니콜라옙스크항이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 침략을 본격화하고 당시 적군에 맞서 시베리아 각지에 세워진 백군 정권들을 후원하자 일본군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적개감이 고조되었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무장 독립 세력들도 이에 호응하여 적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20년 3월 적군과 조선인 연합군은 니콜라옙스크항을 공격하여 수백 명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이와이 오장도 이때 전사했다. 1920년 3월12일의 일이었다. 간섭 전쟁의 전문가인 하라 데루유키(原輝之)에 따르면 이때 참전한 박병길(와실리 박)의 한인 제2중대는 군율이 엄격해서 약탈과 폭행에 가담하지 않아 적군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적군과 조선 독립군의 연합공격으로 초토화된 니콜라옙스크항.

적군과 조선 독립군의 연합공격으로 초토화된 니콜라옙스크항.


필자가 경매 사이트에서 입수한 또 하나의 문서가 있다. 니콜라옙스크항 사건으로 전사한 이와이 오장을 추모하는 비석의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배포된 행사 안내문이다. 1920년 7월7일이라고 적혀 있다. 후쿠시마 시골 출신 육군 병사가 시베리아에서 보낸 편지와 1년 뒤 그를 추모하는 행사의 안내문이 시차를 두고 한국에 있는 필자의 손에 들어왔다. 이와이라는 일본 청년에 대해 무언가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연유다.

여기까지 쓰고 그치면, 전 세계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된다. 그러나 이와이 오장이 편지를 쓰고 전사한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에 지금 살고 있는 필자로서는 그가 편지를 쓰기 두 달 전에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편지에서는 3·1 운동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또한 니콜라옙스크항 사건 이후 일본군은 조선 독립군에 대한 적개감으로 연해주의 조선인들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한다. 연해주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의 거두였던 함경도 노비 출신의 최재형도 1920년 4월 초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총살되었다. 조선을 병합하고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은 두 나라의 혼란을 구하는 정의의 세력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대외적으로 선전했다. 니콜라옙스크항 사건은 정의의 세력인 자신들을 조선과 러시아의 사악한 세력이 공격했다는 피해자 의식을 일본인들에게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필자 김시덕


국가와 개인이 전쟁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기억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17~20세기 유라시아 동부의 전쟁사를 연구하고 있다. 외국인 최초로 제4회 일본 고전문학 학술상을 수상한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 <그들이 본 임진왜란> <교감 해설 징비록>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등 10여권의 저서, 50여편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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