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모르는 일본](3) 조상의 책을 지킨다는 것
ㆍ가문의 전 재산과 맞바꾼 후손들의 ‘기록 유산’ 지키기
한반도에는 옛 문헌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접한다. 물론 남아 있는 기록이 한반도보다 더욱 적은 나라도 많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 또는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나라와 비교하면 아쉬울 때가 많다. 한반도엔 왜 이렇게 기록이 많지 않은 걸까? 어떤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민족이 한반도의 기록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모두 없애버린 탓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일본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건 한반도와 달리 이민족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늘은 이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규경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다. 그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남겼다. 여기 실려 있는 ‘우리나라 서적의 수난(受難)에 대한 변증설’이라는 기사에는, 한반도에서 책이 없어진 이유가 열 가지로 정리돼 있다. 상당히 재미있는 기사이므로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책이란 고금의 큰 보배이므로 때로는 조물주의 시기를 받기 때문에 항상 재난이 있는가 보다. 우리나라에도 책의 수난이 있었는데, 대강만 헤아려도 열 가지는 된다. 당나라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침략하고는 국내의 전적(典籍)을 평양에 모아 놓은 다음 고구려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모두 불태운 것이 그 하나이다. 신라 말기에 견훤이 완산주(完山州)에 할거하여 삼국시대의 전해 내려오던 책을 모조리 옮겨다 두었는데, 그가 패망하자 모조리 불태운 것이 그 둘째이다. 고려시대에 여러 번 전쟁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없어진 것이 그 셋째이다. 조선 명종(明宗) 계축년에 일어난 경복궁의 화재로 사정전(思政殿) 이남이 모조리 탔는데, 그때 역대의 고전(古典)도 함께 탄 것이 그 넷째이다. 선조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할 때 난민(亂民)과 왜적이 방화하여 불태운 것이 그 다섯째이다. 인조 병자년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할 때 난민들이 방화하여 대부분 불탄 것이 그 여섯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중국의 장수와 왜적이 경향 각지의 민가에 있던 전적을 모조리 찾아내어 싣고 간 것이 그 일곱째이다. 인조 갑자년에 역적 이괄(李适)이 관서(關西) 지방의 장수로서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여 그나마 약간 남아 있던 것마저 불태워 없어진 것이 그 여덟째이다. 우리나라 풍속이 책을 귀중하게 여길 줄을 몰라 책을 뜯어 다시 종이를 만들거나 벽을 발라 차츰 없어진 것이 그 아홉째이다. 장서가(藏書家)들이 돈을 주고 사들여 깊숙이 감추어 놓고 자기도 읽지 않으며,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아 한번 넣어두면 내놓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이 흘러 좀이 슬고 쥐가 갉아먹으며, 종들이 몰래 팔아먹거나 하여 완질(完帙)이 없는 것이 그 열째이다. 내가 일찍이 탄식을 금치 못하면서 책의 수난 가운데서도 장서(藏書)가 가장 피해가 크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한국고전종합DB)
이규경은 이민족의 침략이 가져온 피해도 크지만, 그 이상으로 한반도 내부의 난리 때 없어진 책도 많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종이를 뜯어버리거나, 반대로 책을 너무 귀하게 여겨서 숨겨두고만 있다가 없어져버린다고 한탄한다. 한반도에 책이 없는 이유를 이민족의 침략 탓으로만 돌리는 일각의 주장에 비하면, 조선시대 후기를 산 이규경은 훨씬 더 자성적이고 귀기울일 만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 정말로 섬나라라서 이민족의 침략이 적다 보니 기록이 많이 남은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에서는 내전 때문에 책이 사라지는 일이 많았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오다 노부나가가 저항하던 교토 동북쪽 히에이잔(比叡山)의 불교 세력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오다는 본보기로 히에이잔을 통째로 불태워버렸다. 산속에 살던 승려 등 수천명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은 것은 물론, 유서 깊은 여러 사찰에서 전해지던 수많은 문헌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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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뿐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천재지변 때문에도 책이 많이 사라졌다. 1788년 교토에 대화재가 있었는데 도시의 80%가 불탔다. 교토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다. 이곳에 전해진 귀중한 기록이 큰 피해를 입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당시 교토의 지식인들은 화재로 어떤 문헌이 없어졌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화재를 피한 문헌들을 열심히 연구했다. 더 이상 문헌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절박감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 고증학이 발생했다(이치노헤 와타루 <우에다 아키나리의 시대>).
20세기 일본에서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1923년에 발생한 간토대지진이다. 당시 도쿄대학 등에는 일본, 오키나와, 한반도의 귀중한 문헌이 많이 수집되어 있었는데, 이들 문헌이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시대의 문헌과 일본의 옛 기록도 많이 소실되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오키나와 관련 문헌이었다. 오키나와의 옛 왕국이었던 류큐왕국의 주요 문헌이 도쿄대학 등에 옮겨 와 있었는데, 대지진으로 거의 모두 소실된 것이다.
오키나와 문헌은 또 한 차례 수난을 겪는다. 1945년 미·일 전투의 주무대가 된 오키나와는 지역 주민의 3분의 1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때 간토대지진의 피해를 간신히 피한 류큐왕국의 문헌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으로 인한 문헌의 소실과 파괴는 오늘날까지 류큐왕국을 연구하는 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일본 본토의 옛 기록도 태평양전쟁 말기에 많이 소실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미국으로 인해 입은 피해라고 하면 대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마지막 항전 의욕을 꺾은 것은 일본 주요 대도시에 퍼부은 미 공군의 대규모 폭격이다.
여기서 오늘의 주인공 마쓰우라 다케시로(松浦武四郞·1818~1888)가 등장한다. 러시아와 일본이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를 두고 경쟁하던 19세기 중엽, 이들 지역의 주요 선주민이었던 아이누인은 일본인들의 식민지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상인들은 아이누인 남성들을 노예처럼 혹사시키고, 여성들은 납치해 성노예처럼 부렸다. 타고난 방랑벽으로 일본 곳곳을 여행하던 마쓰우라는 아이누인들이 살던 지역에 갔다가 이러한 실상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마쓰우라는 아이누인의 참상을 일본 본토 사람들에게 고발하기 위해 출판의 힘을 빌렸다. <에조만화(蝦夷漫畵)>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에조만화>는 일본인들에게 아이누인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 일종의 계몽서 역할을 했다.
마쓰우라를 온정주의적인 식민주의자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아이누인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 내지는 무관심을 고려한다면, 마쓰우라의 태도를 오늘날의 잣대를 들이대 일방적으로 폄훼하거나 비판할 수만은 없다. 참고로, ‘홋카이도’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도 마쓰우라다. 아이누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호칭인 ‘아이노’ 또는 ‘카이노’를 지명에 반영한 것이다.
마쓰우라의 이러한 활동에 주목한 도쿠가와 막부와 메이지 정부는, 마쓰우라에게 아이누인에 대한 국가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작성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마쓰우라 문서를 그의 후손들은 마쓰우라의 개인적인 기록이 아니라 “높은 곳(막부·정부)에서 맡겨진 것”이라 여기고 엄중하게 지켰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이들은 집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포기하고 마쓰우라 문서만 리어카에 싣고 피신했다.
2차 대전 말기에 미군의 공습이 빈번해질 때도, 마쓰우라 후손들은 마쓰우라 문서를 수레에 싣고 시골로 피했다. 피란을 떠난 사이에 이들의 집은 공습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원래 부유한 집안이었던 마쓰우라 후손들은 그렇게 몰락했다. 직계 후손인 마쓰우라 가즈오는 가문의 전 재산과 맞바꿔서 지킨 문서들을 마쓰우라 다케시로 기념관에 기탁했다. “책벌레를 막는 데 쓰는 약재인 장뇌(樟腦)를 살 돈이 없어서, 할아버지가 남긴 문서들을 일일이 바깥에 펼쳐서 햇볕에 말렸다”고 마쓰우라 가즈오는 회상한다(이상은 <마쓰우라 다케시로 선집 2> 인용).
한 점의 옛 기록이 오늘날에 전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를, 마쓰우라 문서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가와 개인이 전쟁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기억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17~20세기 유라시아 동부의 전쟁사를 연구하고 있다. 외국인 최초로 제4회 일본 고전문학 학술상을 수상한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 <그들이 본 임진왜란> <교감 해설 징비록>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등 10여권의 저서, 50여편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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