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인간

[콜 미 이슈마엘 - 최명애의 고래 탐험기](7) 고래와 한 몸이 되는 삶 에스키모의 ‘생계 포경’

소한마리-화절령- 2016. 6. 25. 20:41

[콜 미 이슈마엘 - 최명애의 고래 탐험기](7) 고래와 한 몸이 되는 삶 에스키모의 ‘생계 포경’

글·사진 최명애 환경지리학자 myungae.choi@gmail.com

ㆍ알래스카 포인트 호프

십자가와 고래뼈가 한데 세워진 포인트 호프 마을 묘지.

십자가와 고래뼈가 한데 세워진 포인트 호프 마을 묘지.

긴 해외출장에서 돌아와 인천공항에 들어서면 새삼스럽게 ‘한국’ 냄새가 난다. 공기 입자가 가라앉은 것처럼 촘촘하고, 쌉싸름하고, 살짝 매캐한 냄새.
프로펠러 경비행기가 포인트 호프 활주로에 착륙할 때도 낯선 냄새가 났다. 안개처럼 가라앉아 있는 낯선 비린내. 고래 냄새다.
어떤 장소는 냄새로 기억된다. 포인트 호프가 그랬다. 알래스카 서북단, 바다 건너 러시아 추코트카 반도를 마주 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알래스카의 220여개 마을 중에서
고래잡이가 허용된 11개 마을 중 하나다. 고래잡이가 생계와 문화의 근간이라 지역 주민들에게 제한적으로 고래를 잡을 수 있도록 한, 이른바 ‘원주민 생계 포경(Aboriginal subsistence whaling)’ 지역이다.


■생존을 위한 북극고래 포경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가 대형 고래 13종의 상업적 포경에 대한 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한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포경은 금지된 상태다.


이 국제 포경 금지의 예외가 몇 가지 있는데, 아이슬란드 포경, 논란 많은 일본의 ‘과학적 포경’, ‘원주민 포경’이다. 원주민 포경은 IWC로부터 포획 쿼터를 부여받아 실시한다. 많지는 않다. 그린란드 이누이트가 밍크고래와 혹등고래를, 러시아 추코트카의 에스키모가 귀신고래를, 카리브해 섬나라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주민들이 혹등고래를 잡는다. 알래스카 에스키모들은 북극고래를 잡는다.

에스키모 청소년들이 마을 외곽의 고래뼈 무덤에서 놀고 있다. 갓 해체한 고래의 뼈에 남아있는 붉은 살점은 마을 주변의 북극곰과 북극여우가 갉아먹는다.

에스키모 청소년들이 마을 외곽의 고래뼈 무덤에서 놀고 있다. 갓 해체한 고래의 뼈에 남아있는 붉은 살점은 마을 주변의 북극곰과 북극여우가 갉아먹는다.


알래스카 포경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주민들은 ‘기억할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부터라고 주장하고, 가깝게는 북극 툴레 문화가 알래스카로 확장된 11세기 즈음이라고도 한다. 에스키모의 북극고래 사냥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1848년 뉴욕 출신의 포경선 선장 토머스 웰컴 로이스가 알래스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원주민들이 잡는 북극고래의 경제적 가치를 단박에 알아챘다. 입이 활처럼 길게 휘어져 있어 영어로는 보헤드(bowhead)라고 부르는 고래였다. 큰 것은 몸길이가 20m에 달하는 데다 지방층이 두껍고 수염도 유난히 많았다. 심지어 사냥하기 좋도록 움직임이 느리기까지 했다. 이후 50여년간 미국 포경선들은 2700여차례에 걸쳐 북극고래를 잡았다. 지방은 짜서 기름을 만들고, 고래 수염은 여성복의 치마살로 쓰거나, 코르셋 뼈대로 만들었다.

물범 가죽으로 만든 전통 보트 우미아크. 고래 사냥을 위해 손질을 끝낸 우미아크는 집 앞이나 바닷가에 널어서 말린다.

물범 가죽으로 만든 전통 보트 우미아크. 고래 사냥을 위해 손질을 끝낸 우미아크는 집 앞이나 바닷가에 널어서 말린다.


19세기 중반 알래스카의 북극고래 개체수는 최대 2만여마리. 1915년까지 양키 포경으로 포획된 개체가 1만9000여마리였다. 사실상 멸종이 눈앞이었다. 양키 포경선들은 재빠르게 퇴각했고, 에스키모는 고래가 사라진 ‘배고픈 봄’을 겪어야 했다. 그들이 근근이 잡은 것이 한 해 15~20마리였다. IWC가 북극고래 포경을 금지한 1970년대 말부터는 쿼터를 받아 매년 50여마리를 잡고 있다. 쿼터는 고래 수나 작살 던지는 횟수(스트라이크)로 주어지는데, 한 해에 고래 56마리를 잡거나, 작살을 67번 던질 수 있다. 알래스카 11개 포경 마을이 이 쿼터를 나눠 갖는다. 포인트 배로가 스트라이크 20개로 가장 많고, 포인트 호프는 10개다.


■포인트 호프의 고래 잡는 사람들

6월의 포인트 호프는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였다. 북극선도 훌쩍 넘은 북위 68.34도. 컨테이너 가건물 같은 조립식 주택들 앞에는 녹다 만 눈이 쌓여 있었다. 에스키모가 이글루에 산다는 것도 옛말. 오랫동안 땅을 파서 순록과 고래 뼈로 지탱하는 땅속집(sod house)에서 살아왔는데, 1970년대 마을 전체가 현재 위치로 이주해왔다. 산업단지 배후도시 같은 풍경은 그러나 어딘가 당혹스러웠다. 현관에 빨래처럼 말라가는 것이 있어서 다가가 보면 북극곰, 그것도 머리까지 통째로 달린 가죽이었고, 집 앞에 타이어처럼 놓여 있는 것은 고래 수염이었다. 공항 맞은편의 바닷가에는 사과상자 크기로 깍뚝깍뚝 썰어놓은 살덩어리가 보였다. 고래다. 지난주에 잡아서 해체하고 남은 흔적이라고 했다.


포인트 호프는 이 해 고래를 세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그나마도 얼음이 깨져서 한 마리는 다 잡았다 놓치고, 간신히 두 마리를 건졌다. 포경 시즌이 5월로 사실상 끝난 걸 감안하면, 올해 포경 실적은 시원찮은 편이다. 명색이 포경 마을이지만, 포경이 가능한 때는 짧다. 알래스카의 북극고래는 베링해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북상해 베링 해협을 거쳐 보퍼트 해에서 여름을 난다(지도). 고래는 숨을 쉬러 물 위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북극해의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해야 움직인다. 북극고래가 포인트 호프 앞바다를 지날 때는 3월 말부터 두 달. 이때를 기다려 10여척의 마을 포경선 전체가 바다로 나간다. 얼음을 깨어 길을 만들고, 고래가 얼음 틈으로 몸을 내미는 그 순간을 노리는 거다. 운이 좋으면 하룻밤에도 잡지만, 일주일 넘게 보초를 서고도 못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1970년대엔 한 시즌에 6~7마리를 잡았다는데, 요즘은 서너 마리가 고작이다.


에스키모의 ‘원주민 포경’이 맨 몸으로 고래와 맞서는 그런 방식은 아니다. 다른 마을들처럼 포인트 호프의 포경도 ‘전통’과 ‘현대’가 섞여 있다. 예전엔 나무 작살이었지만, 지금은 폭약이 장착된 작살을 쓴다. 19세기 양키 포경에서 배운 방법이다. 작살이 꽂히면 폭약이 터져, 명중만 시키면 고래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배는 날쌘 모터 보트나 고무 보트 대신 여전히 전통 보트 ‘우미아크(umiaq)’를 쓴다. 나무로 틀을 만들고, 물범 가죽 6~7장을 꿰매 붙여 씌운 카누 모양의 보트다. 얼음 사이에서 움직이기가 쉽고, 바다에서 찢어져도 수선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잡아온 고래를 나누는 방식도 여전히 전통 그대로다.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마을 포경선 전체가 힘을 합쳐 끌고 돌아온다. 이미 소문을 전해들은 주민들이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있다. 고래 해체는 장정 20~25명이 덤벼도 꼬박 5~6시간이 걸리는 대작업이다. 성공한 포경선의 선장과 선원 예닐곱명이 먼저 좋은 부위를 챙기고, 나머지는 900여명의 동네 사람들 몫이다. 마을 축제 때 쓸 부위도 챙겨 놓고, 바닷가까지 나오지 못한 노인들 몫도 떼어 놓는다. 성공한 포경선 선장은 이날 자기 집 문을 활짝 열어놔야 한다. “동네 사람들이 들어와서 아무거나 막 가져가는 거야. 내 혼다(4륜 오토바이)도 가져가고, 울버린 털 코트도 가져가 버렸더라고. 그래도 기분 좋지. 찢어지지.” 팝시 키니바크도 여느 포경선 선장처럼 인심이 넉넉한 마을 유지였다. 고래 해체와 나누기의 끝은 ‘블랭킷 토스’다. 성공한 우미아크의 가죽을 벗겨 밧줄에 꿰어 단단히 붙들고, 트램펄린 삼아 팡팡 뛰어오른다. 성공한 포경선의 선원들이 먼저 올라간다.


■고래는 나의 운명

현관에서는 북극곰 가죽이 말라가지만, 에스키모 주택의 내부는 딴 세계였다. 아이들은 플레이스테이션과 닌텐도를 갖고 놀고, 구멍이 숭숭 뚫린 크록스 신발을 신고 다닌다. 인터넷은 물론, 위성 접시로 24시간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 에스키모 아주머니는 순복음교회 미국 방송을 쭉 봐 왔다며, ‘설교자 조’ (조용기 목사인 듯하다)를 아느냐고 물었다. 엠마 키니바크의 집에서도 저녁 메뉴는 두 가지였다. 스팸을 넣은 마카로니와 치즈, 혹은 흰고래 벨루가로 끓인 수프. 시어머니가 갖다 준 마크탁(maktaaq)도 식탁에 올랐다. 고래 껍질과 지방이 붙어 있는 부위를 물에 오래 삶아서 먹는 일종의 수육인데, 에스키모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전통 음식이다. 마크탁은 김치와 궁합이 딱이어서, 포인트 배로의 한인 가게에 갈 때마다 김치를 사온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마카로니와 치즈를 퍼 주면서 엠마는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마크탁이 필요해요. 고래가 한 마리도 안 잡힌 해가 있었어요. 2002년. 결국 남자들이 포인트 배로에 가서 고래잡이를 도와주고 한 마리를 얻어왔어요. 그걸로 간신히 크리스마스를 났어요.”


이들에게 고래는 단지 음식 문화로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포인트 호프엔 산업이랄 것도 없고,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농업도 없다. 고래와 물범을 잡고, 여름엔 베리를 따고 새알을 줍는 게 일이다. 몸이 약해 고래잡이를 못 나가는 사람들은 고래 뼈나 수염으로 장식품이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판다. 엠마는 요즘 에스키모 인형을 만든다. 바다표범 가죽으로 조그만 우미아크도 만들고, 블랭킷 토스를 하는 사람들도 만들었다. 고래 축제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겨울에는 동네 사람들이 마을회관에서 에스키모 전통춤을 연습해, 일종의 에스키모 전통 축제인 ‘에스키모 올림픽’에 나간다. 조상 대대로 고래를 잡으며 살아온 이 마을에서 고래는 단지 음식만이 아니라, 마을을 하나로 통합하고, 에스키모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수단인 것이다.


포인트 호프 사람들은, 그리고 대부분의 에스키모들은, 고래가 ‘잡힌’ 게 아니라 ‘잡혀준’ 것이라고 믿는다. 거친 북극해에서 조각배와 작살 한 자루로 집채만 한 고래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자연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얻은 고래는 마을 전체가 마지막 한 점까지 알뜰히 나눠 먹는다. 고래고기 식당도 없고, 판매도 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미국 해양포유류보호법이 고래 등 해양포유류의 판매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 고래고기 한 점은, 울산 앞바다에서 누군가의 그물에 혼획되어, 검시를 거쳐, 경매로 팔려, 냉동차에 실려 서울의 횟집으로 옮겨져, 한 점의 ‘쓰키다시’로 올라오는 고래고기와 다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고래는 한 점의 ‘상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우리는 ‘소비자’로 만들어진다. 누가 어떻게 잡았는지, 잡힌 고래의 고통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과 자연의 밀접함(proximity)이 포인트 호프에는 있다. 전통과 현대가 아무리 혼재돼 있어도 그래서 ‘원주민’ 포경이다.

마을 외곽의 묘지에는 오랜 세월 인간의 뼈와 고래의 뼈가 한 덩어리가 되어 세워져 있었다. 거기서 나는 샤먼이 고래의 몸이 되어 북극고래와 함께 항해했다는 에스키모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고래가 샤먼에게 말했다. “항해를 하다가 인간들을 보게 될 걸세. 인간에게 스스로를 주려거든, 깨끗하고 맑은 우미아크를 선택하게. 그 우미아크의 주인들이 다른 이들과 동물을 존경을 갖고 대하는 이들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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