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아픔을 먹고 사는 예술의 힘

소한마리-화절령- 2017. 2. 7. 08:04
아픔을 먹고 사는 예술의 힘
유 지 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예술가를 조심하라. 사회 모든 계급을 뒤섞으니 가장 위험하다.”
  위 문장은 1940, 50년대 205명 블랙리스트를 휘두르며 ‘할리우드 10인’을 감옥에 보낸 매카시즘 선전 포스터의 문구이다. 그런데 제왕적 권력, 호위무사 등등… 마치 사극 드라마 같은 용어가 난무하는 현재 이곳에도 그 파장이 느껴진다. 바로 그 매카시즘은 이제 ‘트럼피즘’과 짝패가 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조지프 매카시는 거짓말쟁이, 선동가, 날조꾼”으로, “트럼프는 과장이나 자아도취 같은 매카시 자질을 가졌다”라는 시사 칼럼니스트 리처드 코언의 진단처럼. 메릴 스트립이 골든 글로브 수상식에서 트럼프 이민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 이어,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트럼피즘 비판과 풍자가 연일 화제 뉴스로 등장하는 것은 과거 이들이 겪은 블랙리스트 트라우마를 연상시킨다.

거꾸로 가는 세상사, 작가에게 글쓰기 영감을

   마침 지난해 개봉한 〈트럼보〉(2015, 제이 로치)를 이참에 다시 보았다. 블랙리스트 난리 통을 겪으며 다시 보니, 할리우드 영화사의 그림자가 더욱 강력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트럼보가 〈공주와 평민〉이란 제목으로 쓴 초고가 대명작가의 아이디어로 〈로마의 휴일〉이란 근사한 제목으로 바뀌었고, 불굴의 의지로 자유를 찾아 탈주하는 〈빠삐용〉과 〈스파르타쿠스〉속에는 검열 사회를 살아낸 작가의 아픔이 다른 세상의 일이 아니란 점 때문이다.

   이 작품은 블랙리스트 핵심 인사로 고난을 겪은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1905~1976)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1947년, 비미활동조사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HUAC)에 불려나간 그는 대법원에는 진보적 판사가 있기에, 소송비용은 들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진보적 판사의 사망으로 상황이 꼬인다. 애국과 안보 심지어 자유까지 내건 매카시즘 광기는 갈수록 사상 검열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1년여 감옥생활을 하고 출소한 그는 10개도 넘는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쓰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다른 작가 이름으로도 아카데미 각본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아픈 쾌거를 올리기도 한다. 그의 말대로, 글쓰기란 생각과 삶의 흔적이기에, 출세욕에 불타 권력에 아부하는 동료들의 모습, 거꾸로 가는 세상사는 오히려 그에게 글쓰기 영감을 가득 안겨준 셈이다.

   최고의 고료를 받던 작가는 싸디싼 원고료를 받는 가명 작가가 되어 하루 18시간씩 타자기를 두드린다. “탁탁~ 타타탁~” 화면을 울리는 이 소리는 그가 두 손가락으로 자판을 정신없이 두들겨대는 소리이다. 심지어 그는 홀로 작업하기 위해 욕조에 반신욕 자세로 기대 작업대 위에 타자기를 놓고 두들겨댄다. 한 부분을 오려내 다른 데 붙여넣으며 컴퓨터식 편집기능을 아날로그식으로 한다. 허구세상 만들기에 몰입하는 이런 장면들은 아픔을 먹고 사는 예술 생성의 현장이다. 고통스런 상황인데도 웃음 짓게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오스틴 파워〉등의 코미디를 만든 제이 로치 감독의 유머재능이 정치적 결로 드러난 셈이다.

“또 다른 봄이 올 거에요”

   〈굿나잇 앤 굿럭〉(2005, 조지 클루니)도 역사적 회고담의 격려를 보내준다. 1950년대 초, CBS 뉴스 다큐멘터리 ‘지금 그것을 보라(SEE IT NOW)’를 진행했던 에드워드 R. 머로와 제작팀은 매카시즘에 정면대결을 선언한다. 냉전기이기에 정권은 안보 위협을 내걸고 사상통제에 매진한다. 그 광풍에 언론조차 겁먹은 상황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 프로그램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흑백 TV 시절 현실감을 살려낸 흑백화면은 방송국 속사정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블랙리스트의 뿌리인 매카시가 클로즈업 이미지로 수차례 등장하기도 한다. “그들이 옳다면 TV는 바보상자가 되어 세상과 격리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겠죠. TV는 지식을 전합니다. 깨달음도, 영감도 선사합니다. … 그렇지 않으면 TV는 번쩍이는 바보상자에 불과합니다. 좋은 밤, 행운을 보냅니다(Good night, and Good luck).” 머로의 인상적인 밤인사가 영화 제목이 되었다. 화면을 감싸며 당대 분위기를 전하는 재즈도 영화를 받쳐준다. "울지마요. 또 다른 봄이 오니까 … 오, 슬퍼하지 말아요. 우린 반드시 함께할 거예요." 다이안 리브스의 〈또 다른 봄이 올 거예요(There will be another spring)〉! 이 선율을 음미하며, 블랙리스트 청산에 들어간 이곳에서 입춘대길 봄바람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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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다양성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2005 동국대 명강의상〉수상

· 저서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등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