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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성관은 정치적 문제로 보지 않는가"

소한마리-화절령- 2017. 10. 18. 11:38

"왜 여성관은 정치적 문제로 보지 않는가"

입력 2017.10.18. 10:49

[한겨레21] 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21> 페미니즘 특강 문 열어…
“남녀 관계는 정치의 최종 심급이자 무의식의 원형”


“남자의 적은 남자 아냐? 남자들도 얼마나 싸워요. 아니, 왜 여자의 적만 여자예요? 저는 박근혜씨와 자매애를 맺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여성학자 정희진이 손사래를 치자, 폭소에 가까운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졌다. “페미니즘은 틈새를 확장하고 제도와 협상해서 목소리를 가시화하는 거예요.” “폭력이란 인간의 감정을 제도화하는 거죠, 동창회나 가족 제도처럼. 이성애는 나쁜 게 아니에요. 이성애 제도가 나쁜 거지.” 강의실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이 보였다. 10월11일 저녁 7시30분, <한겨레21> 페미니즘 특강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가 문을 열었다. 첫 강의는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요즘처럼 페미니즘 도서가 보편화하기 전, 그는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 페미니즘을 소개했다. 혼돈을 정리하고 통념에 질문하는 그의 문장들은 적잖은 팬덤을 만들어냈다. 이날도 2012년 2월부터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해온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3년 동안 읽었다는 고등학생을 비롯해 여러 마니아들이 자리를 지켰다. 애초 마련한 160개 좌석이 모자라 의자를 더 놓아야 했다. <한겨레21> 페미니즘 특강은 ‘성평등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슬로건에서 출발한다. 지난해 11월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 시작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까지 많은 시민은 간절하게, 또 성실하게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그 촛불시민 가운데 ‘누군가’는 문재인 정부의 ‘민주주의’에 초대받지 못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약한 문재인 대통령은 그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 정희진은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젠더 관점에서 진단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큰 스캔들이 없다면 이 정권이 꽤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고 본다. 그렇게 봤을 때 문재인 정부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는 촛불 시민이 만들어낸 문재인 정부와 한국 사회를 젠더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더 나은 삶의 답을 찾기 위해 달려 나가는 강의다. 정희진은 그 여정의 첫 질문을 다음과 같이 던졌다. 왜 젠더 권력 관계(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여야 공방(남성과 남성의 관계)으로 사소화되는가. 이 질문의 답에 이르는 과정을 요약해서 전달한다. _편집자
10월11일 <한겨레21> 특강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민주주의’가 문을 열었다. 180여 명이 자리를 빼곡히 채워 여성학자 정희진의 강의에 귀 기울였다.


동성애 혐오, 트럼프가 잘생겼다(폭소)…. 다 힘든 말이지만, 나를 가장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너는 지금 중대한 다른 문제가 있는데, 왜 가장 사소한 이 문제를 가지고 이러느냐. 북핵 문제가 있는데 왜 성폭력을 말하느냐. 문재인 정부가 잘돼야 하는데 지금 탁현민이 중요하냐. 외세하고 싸우는데 가사 분담하라는 거냐. 자본가랑 싸우는데 애를 보라는 거냐. 남성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사소하다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 젠더 관점에서 진단해봐야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여성관에 문제가 있다. 직장에서 예쁜 애는 신경이 쓰여 일에 방해가 되니 안 뽑는단다. 가슴이 절벽인 여성이 탱크톱을 입으면 테러당하는 기분이라는 얘기도 책에 썼다.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후보자. 그에게도 여러 문제가 있었다. 부동산 투기를 했고, 뉴라이트 역사관을 가졌다. 그러나 탁현민 행정관의 여성관은 과거사이기 때문에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지금 반성하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문제냐고 반문한다. 박성진 후보자도 청문회에서 (자신에 대한 의혹을) 다 부인했다. 그렇다면 그것도 과거사가 아닌가.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다. 왜 부동산 투기와 뉴라이트 역사관은 정치적 문제이지만, 여성관과 젠더 문제는 정치적 문제로 보지 않느냐는 거다. 젠더를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나누면, 세상에는 남성과 남성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 여성과 여성의 관계가 있다(얘기를 하기 전에 짚어둔다. 굳이 표현하자면 인간은 모두 간성, 인터섹슈얼(intersexual)이다. 극단적 남성과 극단적 여성이 있고 그 사이에 수많은 젠더‘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말하기가 너무 복잡하니까, 폭력적이지만, 간단하게 남성·여성으로 말한다).

남성과 남성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그 자체로 역사고 정치다. 트럼프와 문재인의 관계는 곧바로 한-미 관계가 된다. 남성 상사와 남성 부하의 관계는 부하와 상사의 관계다. 그러나 여자 상사와 여자 부하의 관계는 그냥 ‘여자들’ 간의 관계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은 별로 없다. 모녀 관계, 고부 관계 정도다. 남성이 돈을 버는 것은 조국과 민족과 가정을 위해서지만 여성이 돈 버는 것은 자아실현이라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공적 역사, 정치적 관계가 되지 못한다. 그저 연애를 하거나 섹스를 하는 관계, 잘못해서 애를 낳는 관계가 될 뿐이다.(폭소)


자본주의-가부장제-이성애 제도

그러나 남녀 관계는 실제로 매우 ‘정치적’인 관계다. 정치의 최종 심급, 정치의 가장 무의식이다. 이런 문제가 왜 자꾸 로맨스로, 섹슈얼리티로 사소화되는 걸까. 답은 전제를 살펴보면 나온다.

현재 사회의 전제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몸과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 브라질의 아마존, 북극 빙하까지 자본주의가 장악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전제는 가부장제다. 가부장제 없이는 자본주의가 작동할 수 없다. 인간은 하루 24시간 일할 수 없으며 반드시 재생산노동(돌봄노동)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사회에서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된 것은 집에 육아와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젠더와 인종을 핑계로 한 임금 격차 없이 작동할 수 없다.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는 한국의 경우 100:63이다(2015년 기준). 남성이 100만원 받을 때, 여성은 63만원 받는다. 이주노동자는 30만원 받는다. 이 차별로 사회 전체의 임금을 조절한다.


가부장제는, 이성애 제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성별 분업을 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전제, 이성애 제도가 필요하다. 모두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말하고,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를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제는 가부장제고, 가부장제의 전제는 이성애 제도다. 5천 년 역사를 가진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정치적 문제다. 이성애 제도가 파열음을 내면, 전체 사회의 기반이 흔들린다. 한국 대통령선거 4번 다 젠더에 의해서 승패가 갈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사회과학자도, 어떤 매체도 젠더가 대선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한 적이 없다.


남녀 문제가 계급 문제라는 점은 성매매, 성폭력에서도 드러난다.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남성의 몸이 아니라 여성의 몸에서 일어난다. 약자의 몸은 늘 강자에게 전쟁터로 제공된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처럼. 미국 남성이 한국 여성을 강간하면,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과 싸우는 게 아니라 미국 여성을 강간하는 판타지를 꿈꾼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주최한 전시에 <더러운 잠>(박근혜 전 대통령이 옷을 벗고 누워 있는 그림)이 포함됐을 때 ‘박사모’는 표 의원이 아니라 그의 부인을 벗겼다.


남녀 관계는 사적이지 않다

결국 말해야 하는 것은, 남녀 관계가 사소한 사적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관계라는 점이다. 너무나 오래됐고 우리 의식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는 공기와 같아서 이같은 사실을 자각하기 힘들다. 공기 바깥은 진공이다. 페미니즘은 공기와 같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게 아니다. 남성의 파이를 뺏는 게 아니라 파이를 같이 만들자는 거다. 왜? 지금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파이는 못 먹을 파이니까.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