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영국적인 쿠데타” |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
‘기록의 나라’ 영국의 정치인들은 학계와 전문 서평자들의 주목을 받는 저술들을 끊임없이 세상에 내놓는다. 그 종류도 전기, 자서전, 회고록이나 편지와 일기는 물론이고 순수문학과 장르소설에 이르기까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다양하게 넘나든다. 지난 연말 전자책으로 읽었던 소설 『매우 영국적인 쿠데타(A Very British Coup)』는 텔레비전 시리즈물로도 제작돼 영국영상예술아카데미(BAFTA)상을 수상했던 정치스릴러다. 저자 크리스 멀린은 최근까지 4반세기 가깝게 노동당 의원으로 있으면서 당과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중진 정치인이지만, 그 와중에도 여러 권의 일기와 회고록 그리고 소설 네 편을 펴낸 중견 작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와 진보개혁 ‘민주주의는 진보정권을 어떻게 거부하는가’라는 부제가 어울릴 법한 그 책에는, 새롭게 들어선 노동당 정권이 집권 초에 단호하게 공약사항들의 정책화를 추진하지만, 채 1년도 안 돼 모든 개혁시도가 허망하게 종결된다는 스토리가 시종 흥미진진하고 급박하게 전개된다. 노동당이 총선공약으로 내걸었던 정책들은, 아아, 지금은 아스라한 향수가 된 과거 당내 좌파가 주장하던 단골메뉴들, 곧 유럽공동시장 탈퇴, 연금과 보험기금을 포함한 금융의 국유화, 상원철폐, 서작명단(honours list)과 사립학교 폐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토탈퇴와 모든 외국 주둔군의 철수, 영국의 일방적 비핵화 같은 것들이었다. 청산 없이 개혁 없다 민주주의 모국이라는 영국에서조차 위의 소설적 상상이 가능하다면, 기존의 기득권 구조와 관행이 엄연한데, 이제 겨우 이행단계를 거친 한국 민주주의는 과연 어느 수준의 개혁을 감내할 수 있을지, 혹은 과연 우리에게 의미 있는 개혁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아득해진다. 모든 청산이 그렇듯, 적폐청산이란 성공해 봐야 기껏 본전치기, 그 자체가 정권의 목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 개혁은 누적된 과오를 바로잡는 데서 비로소 정당성 혹은 권위를 획득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서 적폐 위에 조성된 광범위한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 개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망한 노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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