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의 꿈 / 고명섭
입력 2018.07.31. 15:16 수정 2018.07.31. 15:26
[한겨레]
고명섭
논설위원
지난주 타계한 작가 최인훈은 작품 고쳐 쓰기를 되풀이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광장>은 작가의 땀과 혼이 밴 대표작답게 판을 바꿀 때마다 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망명지로 가는 배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묘사하는 소설의 첫 구절은 여러 차례 다시 쓴 끝에 다음과 같은 표현을 얻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초판에 없던 쉼표들은 주인공 이명준의 망설임과 회한과 꿈을 품고 있는 듯하다.
<광장>은 우리 현대사의 핵심을 건드린 문제작이다. 작가의 분신인 이명준은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 남과 북 양쪽 체제를 다 경험하지만 어느 쪽에도 귀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남북 어디에도 진정한 ‘광장’은 없다. 남의 현실에 대해 이명준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정치의 광장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여 있어요. (…)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 (…)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 아닙니까?” 환멸 때문에 북을 택한 이명준에겐 다른 환멸이 기다린다. “당은 저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북의 ‘광장’에는 “꼭두각시”만 서 있다. 그걸 광장이라고 부를 순 없다.
철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이명준이 “어느 책에서고 Dialektik(변증법)의 D자만 보아도 반한 여자의 이름 머리글자를 대하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작가 최인훈은 ‘모순의 대립과 지양’을 설파하는 헤겔 변증법에서 남북 분단의 극복이라는 꿈을 읽어내려 한 것 같다. <광장>은 주인공의 자살로 끝나지만, 소설의 바탕엔 강렬한 희망이 도사리고 있다. 진정한 ‘자유와 민주의 광장’을 향한 꿈이 이 소설을 끌고 가는 힘이다. 그런 힘이 느껴지는 건 이 소설이 4·19혁명의 열기 속에서 집필됐기 때문일 것이다. 4·19가 열어젖힌 그 광장에서 대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쳤다. 이 외침은 작가가 <광장>을 발표하고 8개월이 채 안 돼 5·16정변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사람들은 흩어져 밀실로 숨어들었다.
<광장>의 최인훈이 1964년에 발표한 <회색인>은 군사정변 뒤 암담한 현실 속에서 쓴 작품이다. 광장을 잃어버린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과 그 주위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만의 밀실로 들어가 사변적인 관념을 파먹고 산다. 19세기 독일의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좌절한 당대 철학자들이 관념세계로 들어가 철학의 체계를 구축했던 것과 유사하게, <회색인>의 인물들은 내면세계 혹은 관념세계를 망명지로 삼아 거기서 역사와 정치와 이념의 성채를 쌓아올린다. 남북 이데올로기의 흑백논리를 부정하고 두 극단 사이 중간쯤에서 혁명을 꿈꾸기도 한다. 이명준도 독고준도 흑백 이분법의 눈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회색인이다.
그 ‘회색’을 패배와 좌절의 색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명준의 중립국 선택이 남북의 억압적 질서에 대한 저항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고준의 내적 망명도 뒤집어 보면 절박한 ‘부정의 정신’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는 이 회색인들의 꿈이 밀고 온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남북 분단이 낳은 억압체제에 숨죽이고 웅크린 듯이 보여도 때가 되면 밀실을 뛰쳐나와 광장을 되찾은 수많은 회색인들이 만들어온 역사가 우리 현대사다. 회색인 이명준이 보았던 ‘크레파스보다 진한 바다’는 멀리서 가물거리는 꿈이지만, 이 꿈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원리’고 역사의 변증법을 밀고 가는 힘이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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