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사북항쟁' 27주년, 이젠 화해만 남았다

소한마리-화절령- 2009. 11. 3. 20:09

'사북항쟁' 27주년, 이젠 화해만 남았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07.04.22 11:23

 




[오마이뉴스 강기희 기자]



▲ 사북항쟁 당시 경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안경다리. 광부들은 안경다리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찰의 접근을 막았다. 광부들은 최루탄을 쏘며 기어오르는 경찰들을 향해 철로에 있는 돌을 던졌다.
ⓒ2007 강기희
검은 땅, 검은 산이었던 시절 사북에 사는 사람들도 검은 차림이었다. 검은 얼굴, 검은 손을 하고서 탄광을 나선 이들은 탄을 캐는 산업 전사. 그들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의 광부들이었다.

산업전사라는 이름으로 국가 에너지를 생산하던 이들의 손은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더 바빠졌다. 당시 정부는 '제7광구'라는 노래까지 유행시키며 석유파동을 넘어서려 했지만 이 나라에서 석탄 외의 에너지를 확보하는데는 실패했다.

당시 사북 동원탄좌에서 캐 내는 석탄은 전국 생산량의 9%. 생산량만으로도 동원탄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석탄을 캐 내는 것은 광부들의 몫이었다. 광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3교대로 개미집 같은 막장을 드나들었다.

어용노조와 회사가 광부들 분노케 해

광부들은 스스로를 '막장인생'이라 했다.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인 탄광에서 일하는 그들에게 한 밑천 잡아보겠다는 욕심은 애초 없었다. 갈 곳 없어 밀려난 인생들이라는 자조가 그들 스스로를 막장인생으로 내 몰았다.

동원탄좌는 타 업체에 비해 정년도 빨랐다. 정년 45세로 묶여있는 동원탄좌에서 밀려나면 그들은 하청 탄광으로 몸을 옮겼다. 그들이 선택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탄을 캐고 나르는 일 밖에 없었다.

일을 그만두라고 할까 싶어 진폐증에 걸렸어도 애써 병증을 숨기며 일을 했다. 살아남는 일이 절박한 시절. 대형 탄광인 동원탄좌에 다니는 것만 해도 영광이라 여겼다. 그런 이유로 목욕탕 시설은 언감생심, 먹을 물도 나오지 않는 성냥갑 같은 사택에서 견뎌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광부들은 미래를 품고 살아갔다. 그러던 탄광노동자들이 떨쳐 일어났다. 1980년 4월 21일이었고, 신군부의 총칼이 서늘하게 빛나던 봄날이었다. 이른 바 '사북사태'다.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된 '사북사태'의 배경엔 억눌린 노동자들의 분노가 있었다.

어느 회사를 막론하고 당시만 해도 어용노조가 판을 치고 있었다. 어용노조는 회사와 권력의 비호아래 노동자들 위에 군림했다. 노동자들 편에 서야 할 노조는 회사와 권력의 편에 있었다. 신군부인 합동수사본부도 그들을 용인했다.

사북사태는 계엄상황에서 터졌다. 서울의 봄은 왔다지만 모두들 숨죽이고 있던 때였다. 해발 700m가 넘는 사북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날은 포근했고 비도 오지 않았다. 따스한 봄날 광부들이 채탄을 거부하고 경찰과 마주쳤다.

사건의 발단은 동원탄좌 노조지부장인 이재기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이미 광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어용노조의 지부장이었다. 광부들은 사북사태 이전부터 노조 지부장 이재기의 사퇴를 촉구했다.

21일 경찰과 사북읍사무소가 약속한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자 광부들이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지부장인 이재기는 경찰 개입을 요청했고 경찰 50여명이 동원탄좌로 출동했다. 하지만 숫적으로 밀린 경찰들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달아나려던 경찰 지프를 광부들이 가로막았다. 다급했던 경찰은 앞을 가로막은 광부들을 치고 달아났다. 광부 네 명이 차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다. 일부 광부들은 경찰이 광부를 죽였다며 흥분했고, 사태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북사태의 발단은 동원탄좌와 노조지부장인 이재기였지만 불은 경찰이 질렀다. 21일 오후 시위 해산을 위해 사북을 찾았던 장성경찰서장이 몰매를 맞는 일이 생기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노동자민중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북항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북항쟁, 경찰이 도화선에 불 지펴



▲ 동원탄좌의 마지막 근무조. 동원탄좌는 2004년 11월 1일자로 문을 닫았다.
ⓒ2007 강기희


▲ 수직갱으로 들어가는 입구. 엘리베이터를 타고 350 미터를 내려가 그곳에서 각자의 일터로 간다. 멀게는 4km나 간다.
ⓒ2007 강기희
지난 19일 사북항쟁 27주기를 앞두고 사북을 찾았다. 사북은 예전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강원랜드가 들어서고 난 이후 사북은 급속도로 변해갔다. 광부들이 살던 사택은 철거 되었으며 광부들의 거리는 유흥가로 변모해 있었다. 안경다리와 진달래꽃을 활짝 피운 산자락만이 80년 4월의 사북을, 그리고 지난 27년의 세월을 굽어보고 있는 듯 했다.

광부들의 분노케 했던 동원탄좌 건물을 둘러보았다. 수직갱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나 광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에는 당시 사용하던 각종 물건들이 유물로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 사북항쟁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에게 경찰과 광부들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안경다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당시 이재기 노조지부장의 부인인 김순이씨가 광부들에 의해 묶였던 기둥도 사라지고 광부들의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동원탄좌 건물은 폐허로 변했다. 항쟁이 있은 21일부터 24일 아침까지 노조지부장 부인은 광부들과 가족들에게 큰 곤욕을 치렀다.

남편 이재기씨가 받아야 할 죄를 홀로 감당한 김순이씨는 아직 당시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있다. 광부들과 가족들이 겪었던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과 회사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는 2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회사 관계자들에 대한 폭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회사 관계자들은 마치 해방 후 떠나는 일본인과 친일파인 듯 했고, 광부들은 해방된 민중과도 같았다. 해방구인 사북거리에 약탈이나 방화는 전혀 없었다. 광부들 먹으라고 내어놓는 막걸리와 국수는 주민들의 뜨거운 애정이었다. 심지어 낼 것 없는 다방에서는 커피를 대야로 타주었다.

어용노조와 회사를 상대로 한 싸움이 경찰과의 싸움으로 전이 되면서 많은 부상자와 구속자를 냈다. 22일 '안경다리 전투'에서는 경찰의 사망자도 나왔다. 최루탄을 쏘며 동원탄좌로 진입하던 경찰에 맞서 광부들은 사북역 태백선 철로 위에서 돌을 던지며 극렬하게 저항했다.

대패하고 철수한 진압 경찰들



▲ 당시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사진 우측)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좌측은 전호덕(사북항쟁동지회 회원)씨다.
ⓒ2007 강기희
22일 오후 칼빈총으로 무장을 한 경찰은 광부들에게 대패했다. 경찰은 사북을 떠났고 지서 건물은 광부들이 접수했다. 그때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사북은 광부들의 해방구였다. 이때 시위에 참가했던 인원은 6000여명에 이른다. 그때 광부들이 3000여명이었으니 그 가족과 주민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광부들은 고한과 증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막고 경찰의 진입을 막았다. 기자들이 취재를 했으나 합수부에서는 기사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23일 급기야 공수부대가 사북에 투입된다는 정보가 항쟁 지도부에 들어왔다.

절대절명의 시간. 당시 강원도지사와 도경국장이 지도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 시간 공수부대는 원주에 있었으며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의 경우를 보더라도 작전권이 있는 미국의 승인 없이도 공수부대는 투입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문제는 대통령의 재가였으나 당시의 권력 구도로 미루어보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항쟁 지도부는 동원탄좌에 1000여점의 소총과 사북 전체를 날리고도 남을 다이너마이트 60여톤이 있다며 공수부대가 투입되면 모두가 공멸할 것이라고 협상단에게 알렸다.

합수부에서 공수부대 투입을 주저한 것은 광부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화력이었다. 광주처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보면 소총과 다이너마이트까지 확보한 광부들을 자극할 경우 자신들의 피해도 클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 같다.

당시 사북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와 피해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많은 양민을 학살한 광주민주화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협상단은 그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었고 23일 낮부터 시작된 협상은 다음날 새벽1시가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지도부는 억류해 놓았던 김순이씨를 경찰에 인도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24일 오전이었다. 상황은 그렇게 끝나는 듯 싶었다. 광부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으며 사북거리는 평상시의 모습으로 수습되었다.

책임 묻지 않겠다던 경찰의 검거작전

경찰은 일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합의를 어기고 항쟁 지도부들을 하나씩 파악해 나갔다. 정선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차린 경찰은 비밀리에 항쟁 가담자들을 확보해나갔다. 당시의 일에 대해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68·사북항쟁동지회 회장)씨에게 물었다.

"24일날 모든 게 끝났잖아요. 책임소재를 전혀 묻지 않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했으니 우리도 그런 줄 알았지요. 평상시처럼 근무 나가고 근무 끝나면 사태 수습도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경찰은 이미 주동자들을 파악해놓고 잡아 들일 기회만 보고 있었던 겁니다. 열흘쯤 지나니 기분이 이상합디다.

그러더니 5월 6일부터 잡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정신 없었습니다. 졸지에 지도부가 합수부에 잡혀 들어가니 광부들도 정신이 없었지요. 대책이라고는 세울 수도 없었고요. 항쟁의 기운을 이어가긴 무리였거든요. 당시가 거리에 군인들이 총들고 돌아치던 계엄령 상태 아니었습니까. 무서운 시절이었지요. 5월 20일까지 많은 사람이 잡혀 들어갔습니다."

- 어디로 갔나요. "처음엔 정선경찰서에 갔지요. 취조실을 급조해 만들었는데 옆에서 때리고 고문하는 소리가 다 들려요. 물고문, 전기고문 안 받아본 게 없어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오히려 화가 나더군요. 이유 없이 붙잡혀 온 이들도 많아요. 며칠씩 고문당하고는 나가고 다른 이가 들어오고 여자들은 성고문까지 당했지요. 말도 말아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네요."

- 몇 분이나 군법회의에 넘어갔나요. "처음에 구속된 사람이 140명이나 되는데 재판에 회부된 이는 28명입니다. 집행유예로 나간 사람도 있고 실형을 선고 받은 이도 있지요. 저는 그때 10년 구형을 받았는데 1심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 받았어요.

그랬는데 웬일인지 계엄사령관이 2년을 깎아주데요. 고등군법회의에 항소를 했더니 서울고등법원으로 넘어가더군요. 거기 가니 그때서야 민간인들이 보이더군요. 거기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어요. 그때 이미 1년 5개월을 구치소에서 살았으니 무죄라고 선고할 수는 없었겠지요."

지난 해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북항쟁에 대한 조사를 했다. 곧 결과가 나올 테지만 사북사람들은 적어도 '사북사태'라는 오명만은 벗어지길 기대한다. 당시 항쟁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씨와 신경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어 사북사태로 인한 명예회복을 했다. 아직 18명이 명예회복 신청 계류중이다.

사북항쟁 상처, 이젠 화해해야



▲ 광부들이 떠난 건물엔 옷을 수선하던 미싱만이 덩그러이 남아있다.
ⓒ2007 강기희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나오는 결과가 그들을 폭도란 이름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건져낼 수 있을 지 주목된다. 현재의 명예회복 기준은 당시 판결문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개인적 신청이 받아 들여지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사북사태'가 '사북항쟁'으로 인정된다면 명예회복은 쉽게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의 판결문은 고문에 의한 조작입니다.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니 그때의 판결문으로 명예회복을 심사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이원갑씨는 판결문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타 사건이 그러하듯 계엄령 하에서 치러진 군사재판이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출감한지 3년 이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이가 3명이나 된다고 하니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27년이 흘렀습니다. 이젠 화해와 상생을 할 때가 아닙니까? "그때의 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모진 고문을 받은 광부들과 가족들이 그러했고, 경찰들도 죽거나 많이 다쳤습니다. 정작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했지요. 이젠 화해 해야지요. 함께 가야하는 세상 아닙니까. 화해하기 위해 동지회에서는 사망한 경찰관의 묘소에도 다녀왔습니다."

- 지부장 부인인 김순이씨와는 화해가 가능하겠습니까. "어렵더라도 해야지요. 다들 도망치고 혼자 남아 있었기에 욕을 봤던 겁니다. 따지고보면 그 분은 큰 잘못 없어요. 남편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것이지요. 당시야 죽일 놈 살릴 놈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지부장인 이재기씨도 회사로부터 이용만 당했더군요. 광부들과 경찰, 이재기씨, 그리고 부인까지 다들 피해자입니다. 피해자들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 이젠 화해 해야지요. 그러고 싶어요."

광풍이 불었던 그해 4월 이후 27년이 흘렀다. 사북항쟁이 어느 누구로부터 발화되었던 간에 그 책임은 민중이 아니라 정권과 권력을 쫒는 광산재벌들에게 있다. 그러한 당시의 사회적 구조를 만든 것은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였고 그것과 결탁한 광산재벌에게 무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화창한 사북거리에서 화해와 상생을 약속하는 그날이 어서와 지난 날 훌훌 털고 손잡고 살아갈 날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가져본다. 아울러 사북사태는 아직 '사북사태'로 남아있다. 사북사태가 '사북항쟁'으로 평가 받는 날 상생의 춤을 추며 화해의 깃발이 하늘 높이 나부끼길 기대해 본다.

/강기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