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2009년 12월 18일 황인오 최후진술

소한마리-화절령- 2009. 12. 18. 22:13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지난 1980년 4월의 사북노동항쟁을 계기로 사회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고 그 과정에서 3차례에 걸쳐 10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사북노동항쟁 직후 계엄합수부와 이른바 남영동 대공분실 등에 구금되어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풀려난 이후에도 정상적인 취업을 못하는 등 끊임없는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1985년 김수환 추기경님과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의 도움으로 사북에서 ‘가톨릭광산노동문제상담소’를 운영하면서 탄광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에 대해 노동조합 등 아무도 돌보지 않고 외면할 때에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애쓰다가 87년 구속되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저는 한 번도 제가 피해자라거나 희생자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좁게는 저의 유년과 청춘의 뿌리이자 부모님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탄광과 그 탄광의 두 겹 하늘을 이고 죽음과 맞닥뜨리는 노동에 종사하는 탄광노동자들의 권익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여겼고, 넓게는 이 나라 민주화 대장정에 벽돌 하나라도 보테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행운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것은 이 재판을 당하여서도 변함없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제가 좀 더 현명하고 역량 있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고비의 하나였던 사북노동항쟁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가 널리 자리 잡게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북노동항쟁은 80년 서울의 봄과 5.18을 예비한 사건입니다. 사북항쟁의 의의가 더 널리 규명되지 못하고 묻혀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5월 광주항쟁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이 일어나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북항쟁 참가자 가운데 저를 비롯하여 이를 제대로 규명하고 널리 알릴 수 있는 지적 역량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데에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사북노동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좀 더 규명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역사적 의무라고 생각하여 2001년 46세의 늦은 나이로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하고 2003년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편입하여 2005년 졸업한 뒤 ‘들꽃역사’라는 풀뿌리 민중운동역사연구모임을 만들어 내년 30주년을 맞아 이에 관한 문헌을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친구의 아버지이자 잘 아는 동네 어른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지울 길 없고 가능한 한 돌아가신 친구의 아버지가 처했던 실존적 상황을 석명해보겠으나 그렇다고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경계가 어디일지 고민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일천하나마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드는 아쉬움은 또 있습니다. 아마도 80년 사북이 없었다면 80년 이후 우리 사회 우리 역사의 대립은 좀 덜 치열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80년 이후 우리 사회의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의 치열한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생각하면 그때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을 최소한이라도 수행했다면 수백 명의 노동자와 부녀자들이 계엄사에 끌려가 그토록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수천 억 원의 사회적 비용을 손실하고 이후의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이토록 격렬하게 만드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았을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때 계엄당국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복역하고 지금도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억울한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들이 두 겹의 하늘에서 피땀으로 번 돈으로 납부한 노동조합비가 제대로만 쓰였다면 80년 4월의 사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때 사랑하던 친구의 가족들이 지금껏 겪고 있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제 평생 동안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함께 복역하고 지금도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며 저는 이철수 사건을 생각하였습니다. 1973년 미국의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인 갱 단원을 죽인 혐의로 10여 년간 복역하다 무죄로 풀려난 재미교포 이철수 씨는 감옥 안에서 다른 갱 단원을 실제로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구속된 사건이 무죄로 밝혀지자 나중에 감옥 안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그가 억울하게 구속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건 역시 무죄로 평결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는 일입니다.

 

 노동조합은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기능하는 노동조합은 기업과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기능을 합니다. 바로 80년 사북이 이를 증명합니다. 노동자들의 일상적 이해를 대변하고 갈등과 대립요소를 사전에 해소함으로써 그 갈등과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아 사회 안녕을 해치는 정도로 발전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장치가 바로 노동조합입니다. 70년대 유신헌법 치하에서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제약하고 노동조합을 국가의 간접적 노동통제의 하부기구로 강제했던 정치현실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기업과 노동조합, 그리고 그 종사자들이 이러한 노동조합의 올바른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용화의 길로 들어 선 것이 노동조합 간부 개개인에게만 책임 지울 수 없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당시의 그렇게 어려운 정치 환경 속에서도 많은 노동조합과 그 종사자들이 최소한의 갈등해소 기능을 고민한데 비해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기업과 관권에만 의존하려 했던 80년 사북 현장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남아있습니다.

 

 내년이면 80년 사북이 일어난 지 30년, 꼭 한 세대가 지나는 해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내년 4월에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30년 전의 탄광 사북이 당사자들에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밝히는 책을 출간할 것입니다. 거기서도 이 재판의 쟁점이 되고 있는 서술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그때 또 저는 이 재판정에 서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 명예훼손을 다투는 하나의 희비극(喜悲劇)으로, 마치 초등학생들의 서로 뺨때리기로 전락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라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과 재판부 여러분!

 

 저는 지난 30여 년 동안 불법적인 군사법정에 서보기도 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하고 근 10년 가까운 세월을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사건은 저 개인의 이해를 넘어 80년 사북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직결된 일이기에 어느 때보다 엄숙한 태도로 재판에 임하고 있습니다. 과오도 적지 않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이 땅의 사회민주화운동의 일각을 담당해 온 저에 대한 개인적 평가의 성격도 있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재판에 임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거니와 재판의 결과와 상관없이 친구와 그 가족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모색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동안 애써주신 재판장님과 재판부 여러분, 그리고 보수도 받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변호해 주시는 변호사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무엇보다 지난 30년 동안 심신의 상처로 아파해 온 고소인들과 그 가족들께도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9년 12월 18일 항소인 황인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