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처럼

음식 만드는 손에 술 솜씨를 돌려줘야

소한마리-화절령- 2010. 3. 27. 13:44

음식 만드는 손에 술 솜씨를 돌려줘야

                                                                         허 시 명 (술 평론가)

 술은 지극히 정치적인 음식이다. 국가는 술에 주세라는 특별세를 부과한다. 양조장의 면허가권도 국가에서 가지고 있고, 단속권도 가지고 있다. 술독을 구입하면 세무서에서 그 용량을 측정하고, 술독의 위치를 옆방으로 옮기려고만 해도 세무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는 주세가 국세의 30%를 차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산업이 다각화되어 주세가 국세의 3%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술을 팔아 국가 운영자금을 마련하던 시절도 있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집에서 술을 못 빚게 하고 양조장을 활성화시켜 주세를 걷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후반 메이지시대였다. 그 세금을 걷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고, 한반도 침탈을 감행했다. 일본 청주에 주정(순도 높은 에틸알코올)이 들어간 것도 1930년대 전쟁을 치를 때 병사들에게 제공할 청주량을 늘리면서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때에 맛보았던 청주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때부터 알코올이 첨가된 청주가 일본청주의 주도적인 술이 되었다. 전쟁은 정치인들이 일으키는 것이니, 전쟁과 술과 국가와 정치의 운명은 어떻게든 얽혀 있는 셈이다.

 보통 한국의 술문화는 단조롭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민들이 문화에 대한 인식이 일천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술의 역사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문화란 이어달리기와 같다. 갑자기 급습한 식민지 외래문화의 충격으로 이어달리기하던 문화의 바통을 우리는 분실해버린 것이다. 술문화에서 그 대표적인 것이 주막문화다.

 20세기 초반까지 우리 술 문화는 양조장이 주도해오지 않았다. 주막과 가정집이 주도해왔다. 집에서는 제주로 술을 빚고, 명절 때 술을 빚고, 농주로 술을 빚어서 마셔왔다. 그 시절 술은 김치나 된장 같은 가정의 발효음식이었다. 감히 술을 빌리거나 사와서 제사를 지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집밖을 나서면 주막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주막에서는 주모가 직접 술을 빚고, 그에 어울리는 음식을 내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주막이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경위는 이렇다.
1909년에 처음으로 일본인의 주도로 주세법이 만들어졌다. 이때의 법령은 주조 실태를 파악하는데 주력한 것으로, 술을 빚고 있다고 신고하면 모두 양조면허를 허가해줬다. 그런데 1916년에 강화된 주세령이 발령되었다. 이 주세법은 통제 중심으로 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최저생산량을 규정하여 이에 미달하는 제조장을 폐지시키거나 통합시켰다. 주류제조장의 술과 자가용 술을 분리하여 자가용 술 제조를 위축시키고, 술 제조장에서 음식과 함께 파는 것을 제한함으로써, 주막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특히 남부지방의 주막들은 대부분 탁주나 약주를 제조하는 겸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은 일본인들이 1935년에 펴낸 <조선주조사>에 나와 있다. “1916년경의 조선주 제조장 12만은 거의 전부가 주막이었으나 그 후 제조장의 집약 정리에 수반하여 점차 그 수가 감소되면서 1919년에는 7만여, 1925년에는 3만여, 1930년에는 5천 이하의 소수로 되었으므로 주류의 수급상 일반 음식점 외에 제조장 전속의 주류 배급소를 각지에 설치하여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에 따라 한 군에 10 내지 20, 전 조선 5천~6천의 특정 판매소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술과 음식을 함께 팔던 주막 12만개가 15년만에 5천개로 줄어들어버린 것이다. 주막은 오늘날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일정 거리마다 있었던 휴게의 공간이다. 그때는 걸어 다녔으니, 한나절 걷는 시간,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 무렵에 도달하는 거리에는 어김없이 주막이 있었다. 짚신을 신고 평탄치 않은 길을 걸었으니 1시간에 4㎞ 정도 걸었을 것이다. 한나절 6시간 동안 부지런히 걷는다면 25㎞ 안팎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거리만큼의 간격으로 전국의 산밑과 강나루와 장터와 마을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던 주막이 일제시대를 경과하면서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술과 음식이 함께 하는 주막문화가 현대적으로 복원되어야 할 필요성은, 우리 스스로가 주막문화를 폐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박탈되어버린 것, 정치적으로 박탈되어 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 술과 음식을 함께 만드는 공간을 되찾아야 한다. 식민지 시절 과세와 징수의 편의로 했던 일이니, 이제 음식을 만드는 손에 술 빚는 솜씨를 되돌려줘야 한다. 술과 음식을 함께 만들어내는 독일식 맥주집, 하우스 맥주집이 지금 도시에 버젓이 있는 것처럼, 하우스 막걸리집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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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허시명
· 여행작가이자 술평론가
· (사)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
· 저 서: <조선문인기행>, <비주, 숨겨진 우리술을 찾아서>
          <허시명의 주당천리>,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여행 40>
          <맛이 통하면 마음도 통한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