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사망 20주기]“그때의 슬픔과 보람은 우리 삶의 힘이자 짐이다”
대담 | 김별아 소설가 -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
경향신문 | 이영경·김형규 기자 | 입력 2011.04.25 22:06 | 수정 2011.04.26 00:04
소설가 김별아씨(오른쪽)와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이 지난 20일 경향신문사 앞에서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으로 촉발된 1991년 봄의 학생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씨는 "학생운동 경험이 인생의 큰 자산"이라고 했고, 안씨는 "당시 학생운동이 지금 시민사회운동의 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김영민 기자
1991년 봄은 그 시대를 함께 경험한 이들의 가슴에 빼낼 수 없는 옹이처럼 박혀있다. 한 달 동안 이어진 투쟁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잇따른 동료들의 죽음은 갓 스무살을 넘겼을 뿐인 이들에게 쉽게 소화하기 힘든 기억이다. 대학가를 휩쓴 열기의 한가운데 있었던 소설가 김별아씨(42)와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39)이 지난 20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나 그 해 5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연세대 국문과 88학번인 김별아씨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로 투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안진걸 팀장은 중앙대 법대 91학번으로 강경대군(당시 19세)과 같은 1학년 새내기였다.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99년 < 개인적 체험 > 이라는 자전소설을 펴내기도 한 김씨는 "그 시절의 기억은 살아가는 데 힘이자 짐이다. 상처나 훈장은 아니지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 등록금넷 간사 등을 맡으며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씨는 "그때의 참혹한 슬픔, 그리고 기쁨과 보람이 지금까지 활동하는 데 동력이 된다"고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20대에 대한 격려와 지지로 이어졌다. 흔히 '91년 5월투쟁'은 잊혀진 기억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91년 5월은 우리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소설가 김별아씨(이하 김별아) = 어젯밤 다시 소설 < 개인적 체험 > 을 꺼내 읽었다. 소설에도 한 대목이 나오는데 회상한다는 건 과거의 시간에 들어가서 다시 갈가리 찢기는 것이다. 당시의 고통이 상기돼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때 연세대 총학생회 교육부장이었다. 4월26일 강경대군의 시신이 연세대로 들어올 때 받은 사람이 나다. 총학생회실에서 시신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생처에 찾아가 세브란스병원에 급하게 자리를 만들었다. 그날 서울대에서 열린 김세진 열사 5주기 집회에 모두 참여했는데, 나 혼자 총학생회실을 지키고 있어 그 일을 맡았다. 그날 밤부터 소위 말하는 '5월투쟁'이 시작됐다. 5월 한 달간 학교를 통째로 시위대와 유족들에게 내주고 집에는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분신 소식도 우리가 가장 먼저 듣고 사진을 받아 영정을 만들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회상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이하 안진걸) = 다음달 전대협 동호회와 한국진보연대 등과 함께 강경대 20주년 기념 및 추모 문화행사를 조촐하게 열려고 계획 중이다. 기념이란 말이 밝아보이는 게 거슬려 한자를 찾아봤는데, 기념이란 말이 '기원할 기'에 '생각할 념'이어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념이란 말을 하고 2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일이 엊그제 벌어진 일만 같다. 그날 서울대에서 열린 김세진 열사 5주기 집회에 참여했는데 김세진 열사 어머니가 단상에서 말씀 도중 쓰러지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런데 경찰과 백골단이 갑자기 철수하기 시작했고 "명지대 강경대군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명지대로 버스를 타고 옮기는데 경찰도 버스를 타고 명지대로 가고 있었다. 그때 전국의 1학년들은 눈물로 한 달을 보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같은 학번이라 더 슬펐나 보다.
김별아 = 한 달 동안 열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틀 사흘에 한 번꼴로 목숨을 잃었다. 분신에 대해 말하자면 할 말이 많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당시 죽음이 투쟁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직선제 쟁취가 이뤄지고나서 일반 대중과 학생운동이 괴리되기 시작하면서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한 압박들이 있었던 것 같다. 기대와 희망은 큰데 사회적 동력은 약한 시대상황에서 학생운동이 마지막 보루 같았다. 고립감을 느끼며 더 열렬해지고 비장해진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안진걸 = 당시 1학년들은 '친구가 죽었다, 선배가 분신했다'는 생각에 피 끓는 분노와 눈물로 싸웠다. 매일처럼 사람이 죽는데 눈 하나 깜짝 안하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분노가 높았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어쩔 수 없는 역사적 국면이었다고 생각한다. 피 끓는 젊음과 국민들의 시선 사이엔 간극이 있었지만 4·19와 87년 6월의 정신을 이어받아 직접민주주의를 위해 대중이 봉기했다는 것 자체가 역사에서 굉장한 함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5월투쟁은 굉장히 참혹한 패배로 끝났지만 그래도 그 기운이 95년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이어지며 일정부분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김별아 = 정치적 성과가 일부 있었지만 그때를 정점으로 해서 사회운동 지형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면서 이제는 전과 다른 시대가 오는구나 하고 느꼈다. 예전 방식으로는 대중을 집단화하고 추동할 수 없는 '개인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 삶에 대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내부에 있던 사람은 어쨌든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5월투쟁은 개인적으로는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 계기가 됐다.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만 열심히 하고 공부는 거의 못하면서 문학과 운동 사이에서 갈등했다. 5월을 겪으면서 당시 '30만~40만의 경험이 결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구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내가 경험하고 본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문학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안진걸 = 5월투쟁과 그 이후 학생운동 시절을 생각하면 대체로 뿌듯하다. 하지만 남는 건 실존의 무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야 했는가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온다. 참혹한 슬픔과 눈물, 기쁨과 보람이 공존하면서 그 힘이 지금까지 버티게 한 동력이 됐다. 당시 혁명보다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런 생각으로 묵묵히 노력하는 것이다.
김별아 = 91년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 대학교 2학년생인데, 딱 그때 분신한 사람들의 나이다. 그 세대와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20대를 커다란 연민으로 바라보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대학 때 싸우면서 생각했던 게 '후배들한테는 이런 학창시절을 보내게 하지 말자,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사랑하면서 즐겁게 대학을 다니게 하자'였는데 기성세대가 된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 이렇게 세상을 만든 책임이 있으니까.
안진걸 = 한 대학 신문에서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20대를 꾸짖어달라는 글을 청탁받았는데 정반대 글을 써보냈다. 지금 20대는 등록금과 스펙 쌓기, 상대평가로 인한 학점 부담, 청년실업으로 굉장히 가혹한 구조 안에 있다. 따뜻한 위로와 대화가 필요하다. 90년대 초중반 대학사회는 정치적 낭만주의, 대학문화, 이념이 존재해 지금보다 좋았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고뇌를 이해해주고 얘기해야지 '니네는 왜 못해'와 같은 접근법은 옳지 않다.
김별아 = 20대에게 일단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동시에 역사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돌이켜보면 우습게도 우리는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섰다. 어린 나이였지만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고 과도한 책임과 부담을 떠안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20대는 스스로를 아직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구조나 경제상황 자체가 20대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구조이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선 자기가 어떤 사회적·역사적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20대에게 지금 당장은 책 읽고 운동 열심히 해서 몸과 마음을 가꾸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는… 두 가지만 부탁하고 싶다. 하나는 투표를 꼭 하라는 것. 누굴 뽑든 정치적 선택권을 버리면 안된다. 또 하나는 수많은 시민단체 중 하나 정도는 후원이나 참여를 통해 건강한 시민이 되는 실질적 방법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안진걸 = 그때 우리는 생명까지 짓밟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분노,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청년 학생이 조국과 민족과 민중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정신만은 영원했으면 좋겠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학생이 91년처럼 거리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 등록금 문제와 취업난, 여기에 물가대란이나 전세대란으로 인한 가정경제 파탄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실망이 겹쳐 인내가 한계점에 달한 것이다. 최근 분위기가 고조돼 몇십 년 만에 학생총회가 성사되는 학교들도 늘고 있다.
김별아 = 이제는 청년들이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것 같다. 또한 촛불집회 등을 지켜보면, 시대가 바뀌면서 집회·시위 형식도 바뀌고 젊은이들도 그 공간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나이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나 촛불 이후 4대강 사업과 같은 더 큰 문제들에 대한 투쟁의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제 투쟁이란 게 단발적으로 거리에서 이뤄지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안진걸 =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고로 숨진 효순·미선양 추모, 2004년 탄핵 무효,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로 이어지는 촛불의 흐름을 보면서 권력이 심하게 탈선하고 실망스러울 때 국민들이 과감히 거리로 나오는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 활동가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면면이 흐르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의기를 느꼈고, 직접민주주의, 다중지성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김별아 = 학생운동의 경험이 나에게는 큰 재산이다. 고통이든 죽음이든 꿈꿨던 희망이든 그 기억을 가진 걸 감사한다. 내가 누구인가, 실존적 문제를 고민할 때 언제나 내가 사회역사적 존재라는 걸 알게 해 준 계기가 됐고, 그때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각계각층에서 자기 몫을 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안진걸 = '5월투쟁 20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 시민사회운동의 굉장한 동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87년 6월의 성과와 91년 5월의 실패를 통해 혁명적 시도와 대중적 패배를 함께 맛보며 대중적으로 좀 더 유연한 시민사회단체가 만들어졌다. 살아남은 자로서 또는 후배로서 갖는 도덕적 동력이 한국 시민사회를 끊임없이 건강하게 해주고 있다. 이것이 91년 5월이 우리에게 남긴 자산일 것이다.
< 이영경·김형규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
연세대 국문과 88학번인 김별아씨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로 투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안진걸 팀장은 중앙대 법대 91학번으로 강경대군(당시 19세)과 같은 1학년 새내기였다.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99년 < 개인적 체험 > 이라는 자전소설을 펴내기도 한 김씨는 "그 시절의 기억은 살아가는 데 힘이자 짐이다. 상처나 훈장은 아니지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 등록금넷 간사 등을 맡으며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씨는 "그때의 참혹한 슬픔, 그리고 기쁨과 보람이 지금까지 활동하는 데 동력이 된다"고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20대에 대한 격려와 지지로 이어졌다. 흔히 '91년 5월투쟁'은 잊혀진 기억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91년 5월은 우리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소설가 김별아씨(이하 김별아) = 어젯밤 다시 소설 < 개인적 체험 > 을 꺼내 읽었다. 소설에도 한 대목이 나오는데 회상한다는 건 과거의 시간에 들어가서 다시 갈가리 찢기는 것이다. 당시의 고통이 상기돼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때 연세대 총학생회 교육부장이었다. 4월26일 강경대군의 시신이 연세대로 들어올 때 받은 사람이 나다. 총학생회실에서 시신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생처에 찾아가 세브란스병원에 급하게 자리를 만들었다. 그날 서울대에서 열린 김세진 열사 5주기 집회에 모두 참여했는데, 나 혼자 총학생회실을 지키고 있어 그 일을 맡았다. 그날 밤부터 소위 말하는 '5월투쟁'이 시작됐다. 5월 한 달간 학교를 통째로 시위대와 유족들에게 내주고 집에는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분신 소식도 우리가 가장 먼저 듣고 사진을 받아 영정을 만들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회상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이하 안진걸) = 다음달 전대협 동호회와 한국진보연대 등과 함께 강경대 20주년 기념 및 추모 문화행사를 조촐하게 열려고 계획 중이다. 기념이란 말이 밝아보이는 게 거슬려 한자를 찾아봤는데, 기념이란 말이 '기원할 기'에 '생각할 념'이어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념이란 말을 하고 2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일이 엊그제 벌어진 일만 같다. 그날 서울대에서 열린 김세진 열사 5주기 집회에 참여했는데 김세진 열사 어머니가 단상에서 말씀 도중 쓰러지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런데 경찰과 백골단이 갑자기 철수하기 시작했고 "명지대 강경대군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명지대로 버스를 타고 옮기는데 경찰도 버스를 타고 명지대로 가고 있었다. 그때 전국의 1학년들은 눈물로 한 달을 보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같은 학번이라 더 슬펐나 보다.
김별아 = 한 달 동안 열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틀 사흘에 한 번꼴로 목숨을 잃었다. 분신에 대해 말하자면 할 말이 많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당시 죽음이 투쟁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직선제 쟁취가 이뤄지고나서 일반 대중과 학생운동이 괴리되기 시작하면서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한 압박들이 있었던 것 같다. 기대와 희망은 큰데 사회적 동력은 약한 시대상황에서 학생운동이 마지막 보루 같았다. 고립감을 느끼며 더 열렬해지고 비장해진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안진걸 = 당시 1학년들은 '친구가 죽었다, 선배가 분신했다'는 생각에 피 끓는 분노와 눈물로 싸웠다. 매일처럼 사람이 죽는데 눈 하나 깜짝 안하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분노가 높았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어쩔 수 없는 역사적 국면이었다고 생각한다. 피 끓는 젊음과 국민들의 시선 사이엔 간극이 있었지만 4·19와 87년 6월의 정신을 이어받아 직접민주주의를 위해 대중이 봉기했다는 것 자체가 역사에서 굉장한 함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5월투쟁은 굉장히 참혹한 패배로 끝났지만 그래도 그 기운이 95년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이어지며 일정부분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김별아 = 정치적 성과가 일부 있었지만 그때를 정점으로 해서 사회운동 지형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면서 이제는 전과 다른 시대가 오는구나 하고 느꼈다. 예전 방식으로는 대중을 집단화하고 추동할 수 없는 '개인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 삶에 대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내부에 있던 사람은 어쨌든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5월투쟁은 개인적으로는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 계기가 됐다.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만 열심히 하고 공부는 거의 못하면서 문학과 운동 사이에서 갈등했다. 5월을 겪으면서 당시 '30만~40만의 경험이 결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구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내가 경험하고 본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문학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안진걸 = 5월투쟁과 그 이후 학생운동 시절을 생각하면 대체로 뿌듯하다. 하지만 남는 건 실존의 무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야 했는가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온다. 참혹한 슬픔과 눈물, 기쁨과 보람이 공존하면서 그 힘이 지금까지 버티게 한 동력이 됐다. 당시 혁명보다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런 생각으로 묵묵히 노력하는 것이다.
김별아 = 91년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 대학교 2학년생인데, 딱 그때 분신한 사람들의 나이다. 그 세대와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20대를 커다란 연민으로 바라보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대학 때 싸우면서 생각했던 게 '후배들한테는 이런 학창시절을 보내게 하지 말자,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사랑하면서 즐겁게 대학을 다니게 하자'였는데 기성세대가 된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 이렇게 세상을 만든 책임이 있으니까.
안진걸 = 한 대학 신문에서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20대를 꾸짖어달라는 글을 청탁받았는데 정반대 글을 써보냈다. 지금 20대는 등록금과 스펙 쌓기, 상대평가로 인한 학점 부담, 청년실업으로 굉장히 가혹한 구조 안에 있다. 따뜻한 위로와 대화가 필요하다. 90년대 초중반 대학사회는 정치적 낭만주의, 대학문화, 이념이 존재해 지금보다 좋았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고뇌를 이해해주고 얘기해야지 '니네는 왜 못해'와 같은 접근법은 옳지 않다.
김별아 = 20대에게 일단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동시에 역사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돌이켜보면 우습게도 우리는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섰다. 어린 나이였지만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고 과도한 책임과 부담을 떠안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20대는 스스로를 아직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구조나 경제상황 자체가 20대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구조이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선 자기가 어떤 사회적·역사적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20대에게 지금 당장은 책 읽고 운동 열심히 해서 몸과 마음을 가꾸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는… 두 가지만 부탁하고 싶다. 하나는 투표를 꼭 하라는 것. 누굴 뽑든 정치적 선택권을 버리면 안된다. 또 하나는 수많은 시민단체 중 하나 정도는 후원이나 참여를 통해 건강한 시민이 되는 실질적 방법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안진걸 = 그때 우리는 생명까지 짓밟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분노,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청년 학생이 조국과 민족과 민중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정신만은 영원했으면 좋겠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학생이 91년처럼 거리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 등록금 문제와 취업난, 여기에 물가대란이나 전세대란으로 인한 가정경제 파탄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실망이 겹쳐 인내가 한계점에 달한 것이다. 최근 분위기가 고조돼 몇십 년 만에 학생총회가 성사되는 학교들도 늘고 있다.
김별아 = 이제는 청년들이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것 같다. 또한 촛불집회 등을 지켜보면, 시대가 바뀌면서 집회·시위 형식도 바뀌고 젊은이들도 그 공간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나이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나 촛불 이후 4대강 사업과 같은 더 큰 문제들에 대한 투쟁의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제 투쟁이란 게 단발적으로 거리에서 이뤄지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안진걸 =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고로 숨진 효순·미선양 추모, 2004년 탄핵 무효,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로 이어지는 촛불의 흐름을 보면서 권력이 심하게 탈선하고 실망스러울 때 국민들이 과감히 거리로 나오는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 활동가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면면이 흐르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의기를 느꼈고, 직접민주주의, 다중지성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김별아 = 학생운동의 경험이 나에게는 큰 재산이다. 고통이든 죽음이든 꿈꿨던 희망이든 그 기억을 가진 걸 감사한다. 내가 누구인가, 실존적 문제를 고민할 때 언제나 내가 사회역사적 존재라는 걸 알게 해 준 계기가 됐고, 그때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각계각층에서 자기 몫을 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안진걸 = '5월투쟁 20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 시민사회운동의 굉장한 동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87년 6월의 성과와 91년 5월의 실패를 통해 혁명적 시도와 대중적 패배를 함께 맛보며 대중적으로 좀 더 유연한 시민사회단체가 만들어졌다. 살아남은 자로서 또는 후배로서 갖는 도덕적 동력이 한국 시민사회를 끊임없이 건강하게 해주고 있다. 이것이 91년 5월이 우리에게 남긴 자산일 것이다.
< 이영경·김형규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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