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당신이 60년 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한겨레21 | 입력 2010.06.25 18:11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대전
[한겨레21] [특집]
< 한겨레21 > 이 단독 입수한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요시찰인카드'…
경찰이 90년대까지 '업데이트', 아직도 관리하며 공무원 선발 등에 자료로 활용
전쟁이 일어났다. 한 남자는 숙부의 말을 따라 노동당원으로 가입했다. 참호를 파고, 담배 심부름 따위를 했다. 그 죄값으로 1년이 넘게 옥고를 치렀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자, 부역자라는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40년, 그 남자가 세상을 뜰 때까지도 그 낙인은 여전히 남았다. 자녀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고향에 남은 이웃들은 60년 전의 이야기를 더이상 하지 않는다.
< 한겨레21 > 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도운 부역자와 보도연맹원 등을 종전 뒤 공안기관에서 감시하기 위해 작성·관리해온 '요시찰인카드'를 단독 입수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요시찰인카드는 감시 대상자의 세세한 일상을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까지 철저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이념 갈등 속에서 한 개인의 선택이 낳은 불행과, 그 개인을 끝까지 감시망에 가둬둔 국가의 집요한 보복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구나 이 자료들은 '공안조회'를 통해 남아있는 가족의 삶에까지 두터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 한겨레21 > 이 한 지방의 경찰서에서 입수한 요시찰인카드는 총 5권이다. 요시찰 대상자 1명당 1권씩으로 묶여있다. 각권은 관찰보호자 카드, 감시망 체계도, 요시찰인 자택 약도, 요시찰인 가옥 구조도, 재판 기록, 보안처분 대상자 신고서, 주민등록등본, 공안사범 조회 리스트, 신원조회 신청 기록 등으로 구성된다.
부부 다툼까지 기록한 요시찰인카드
우선 관찰보호자 카드는 요시찰 대상자의 본적과 주소, 가족관계에서부터 키, 머리 모양, 눈썹, 코, 치아, 언어(표준어 구사 여부) 등에 이르는 신체 묘사와 재산 관계 등을 적시하고 있다. 요시찰인카드의 핵심 내용은 관찰보호자 카드에 붙어있는 '시찰 내용'이다. 이는 대상자가 사망할 때까지 월 1회에서 3회 정도(많게는 10여 회까지) 경찰이 그의 동향을 사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상자 시찰 요령'도 자세히 규정돼 있는데, △용공 불순분자 접촉 여부 △빈번한 여행과 장기 출타 및 그 이유 △불분명한 가족의 증가 및 왕래와 그 확인 결과 △급격한 재산 증가와 생활수준 향상 및 동 자금의 출처 △전적, 개명 등 인적 사항 변동과 그 이유 △각종 범법행위 및 기타 특이사항 △현 국가 시책에 대한 참여도 등이 주 내용이다. 사찰 내용에는 공안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벼농사의 파종 상황이나 부부 다툼 등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세세히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개인별 차이는 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게 손글씨로 일일이 '업데이트'됐다. 또 시찰담당자인 경찰이 지역감시자와 인접감시자, 망원감시자 등을 둬서 이중·삼중으로 감시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는 감시망 체계도라는 문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요시찰 대상자가 경찰서 관할 지역 밖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 담당 경찰관부터 감시자까지 전부 일괄 조정됐고, 이 내용도 요시찰인카드에 업데이트됐다.
흥미로운 것은 감시 대상자의 주거지 약도와 자택의 가옥 구조도다. 약도에는 관할 경찰서(또는 지서)를 기준으로 도보 및 차량으로 걸리는 거리와 시간이 기록됐다. 또 가옥 구조도에는 "대문이 없고 앞쪽 돌담이 헐어지고 삼면이 나무 울타리로 하시든지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함" 등 담장에 대한 묘사와 출입 가능 여부가 적혀 있다. 해당 경찰서 관계자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도주로를 미리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정환경조사서를 덧붙여 성격이나 주변평, 사상, 가정생활, 교육 정도, 교우 관계, 재산 관계 등 관찰보호자카드에 기록된 것보다 좀더 자세한 개인 신상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한국전쟁 당시 한 개인이 북에 협조한 이후의 삶 전부를 감시해 기록한 것이다.
지난 6월16일 요시찰 대상자 가운데 한 명인 ㄱ씨를 찾아나섰다. 요시찰인카드에 나온 그대로 찾아가보기로 한 것이다. '지서에서 남쪽으로 1.7km 첫 동리.' ㄱ씨 요시찰인카드에 기록된 약도는 여전히 정확했다. 카드 안에 있는 평면도처럼 삼면이 나무 울타리였으며 앞쪽으로는 돌담이 1m 이하로 둘러쳐져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 지난 일을 왜 갑자기 물어요?"
여든을 넘긴 노구가 된 ㄱ씨 부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연방 반복했다. 그 말에는 경계심이 잔뜩 묻어났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어요. 무슨 일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고생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똑똑한 사람도 아닌데, 왜 그 사람이 빨갱이였겠어요."
60년 전,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ㄱ씨의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국전쟁이 난 지 두 달 뒤인 그해 8월이었다. "숙부가 와서 집안 심부름을 하라는데 못하겠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심부름을 다닌 거예요. 동네에서 걷은 돈도 가져다드리고, 담배 심부름도 하고. 그게 다예요."
법이 사찰한, 법을 모르는 사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요즘처럼 수상한 시절에 서울 올라간 자식들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며 "나는 더는 모른다"는 말로 인터뷰를 사양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ㄱ씨 주변인들의 말과는 달리 요시찰인카드에 드러난 ㄱ씨는 수십 년 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던 공안사범, 빨갱이였다. "1950년 8월 괴뢰군 전투용 참호를 구축하고 괴뢰군 비행기 헌납금 3000원을 제공했음. 숙부인 ㄱ씨에게 양말 등 수종의 물품을 제공하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2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1953년 6월6일 출소한 자." 기록에는 이런 묘사도 있다. "인근 주민의 세평이 양호한 편임. 사상은 현 정부 시책에 순응하나 기회주의 사상을 포지함. 성질은 음험하고 내성적임."
ㄱ씨에 대한 경찰의 감시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이었다. "76년 5월×일. △△시장에 농기구를 구입차 다녀온 사실이 있음" "76년 5월×일 본인의 생일로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당일 ㅇ씨(장모)가 다녀감" 등을 망원의 전언이나 경찰의 직접 관찰로 상세하게 기록했다. 경찰이 동네 주민을 망원으로 동원하면서까지 감시한 ㄱ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법 없이도 살 사람'과 '성질이 음험한 기회주의자'의 간극은 어떻게 메워질 수 있을까?
동네 사정에 밝다는 ㄷ씨의 집을 찾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이 마을에서 살아온 토박이로 최근까지 동네 이장을 지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ㄷ씨는 대뜸 "죽음을 면한 것만 해도 감사해하는 분위기였다"며 "이 동네에서만 수복 뒤 9명이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즉결 처분됐다"고 말했다.
"8월에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오자마자 지서 앞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은 선전부장, 당신은 여성부장, 당신은 연락부장' 이렇게 호명했죠. 그때 누가 '저 못하겠어요'라고 나설 수 있었겠어요. 그때 ㄱ씨도 연락병인가를 했을 거예요. 그때 부장 한 사람 중에 열심히 한 이들은 다 죽고, ㄱ씨도 지서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와서 똥물 먹고 살아났죠. ㄱ씨랑 같이 잡혀간 사람은 매질로 인해 저 세상에 갔고요."
ㄱ씨가 숙부를 도왔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처벌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되물었다. ㄷ씨는 그 숙부라는 사람의 이름과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빨치산 출신으로 당시 면 단위의 노동당 간부를 맡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ㄱ씨가 경찰의 기록대로 자신의 성향을 감추고 살아온 사람인지를 물었다. ㄷ씨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라니까…,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래도."
그런 사람을 왜 경찰이 수십 년 동안 감시했을까?
"팔푼이였다니까!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다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던 ㄱ씨는 실은 '법을 모르는' 정신지체인이었다.
벌써 30년 전에 폐기됐어야
비인간적인 감시의 사슬은 더 이상 ㄱ씨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는 22년 전인 1988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요시찰인카드는 계속 남아 그의 가족을 옥죄고 있다.
ㄱ씨는 숨지기 전인 1979년 이미 보안관찰 면제처분을 받은 사람이다. 요시찰인카드가 작성된 나머지 4명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요시찰인카드는 이미 1980년 관찰보호자 일제 정비계획에 따라 삭제됐어야 하는 자료다. 이들의 요시찰인카드에는 실제로 '삭제'라고 표기돼 있다. 그럼에도 폐기나 봉인 등 다른 절차 없이 여전히 해당 경찰서가 이 자료들을 전산과 서류로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요시찰 대상자인 ㅎ씨의 경우에는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뒤에도 여전히 사찰이 계속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ㄱ씨의 가족, 특히 직계가족은 한국전쟁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점 때문에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을지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 관계자는 "한국전쟁 관련 공안기록은 폐기되지 않고 전국 각 지역 경찰서에 남아 있을 것"이라며 "지역의 경찰서에서는 당사자가 있는 한 계속 기록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기록은 '요시찰인카드' 또는 '부역자 카드'로 불린다"며 "이후 발생한 공안사범 관리와 함께 진행한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가 밝힌 요시찰인에 대한 관리 실태는 다음과 같다. 요시찰인카드가 남아 있다면 우선 손으로 문서를 직접 작성해 업데이트를 한다. 부역자와 관련된 이사, 사망 등 변동 사항이 있으면 수시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다음 전산 작업을 거친다. 전산화를 통해 해당 경찰서의 과학수사팀이 전담해 관리한다. 이는 수사나 신원 조회 때 조회가 가능하다. 다만 이 조회는 우리가 흔히 아는 '범죄경력 조회'(이른바 전과 조회)와는 별도의 절차다. 한국전쟁 부역자에 관한 내용은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과 함께 '공안 조회'라는 절차를 거친다. 공안 조회에서는 직계가족도 관련자로 기록돼 보관된다.
아버지의 기록이 자식을 옥죄다
공안 조회는 주로 공안 사건을 수사하거나 공무원 및 정부투자기관 직원 등을 선발할 때 참고자료로 쓰인다. 직계가족 중에 부역자가 있다면 당사자가 사망했더라도 기록은 그대로 남아 공안 조회를 통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좌제 폐지가 공언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한국전쟁 부역자들에게는 이런 굴레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법무부는 최근 연좌제 논란이 일었던 '공안사범자료관리규정'을 개정해 6월11일자로 시행에 들어갔다. 주요 내용은 "공안사범자료는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게 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이는 촛불집회 참가자를 입건한 경찰이 당사자는 물론 가족의 공안 기록까지 첨부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고, 검찰이 이 자료를 법원에 증거물로 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연좌제 논란을 불러일으킨 뒤 나온 것이다. 당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까지 나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규정의 개정이나 폐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 표명을 했다. 하지만 '불이익한 처우를 받게 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새 규정은 그 적용 범위가 모호하고 공안기관간 협조 의무 규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공안사범 관리는 특별히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일선 경찰들의 의견이다.
남아있는 한국전쟁 부역자들에 대한 정보는 폐기돼야 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공안사건 관련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법"이라며 "보관해야 할 법률적 근거가 없는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들은 폐기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는 수사상의 예단을 갖게 하기 쉬울 뿐 아니라 헌법상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오 국장은 "일반적으로 공안기관에서는 법률이 아닌 규칙이나 예규를 보유 근거를 내세우는데, 이는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많은 정보들인 만큼 법률상의 보관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모두 폐기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역사에 대한 기록인 점을 감안하면 우선 경찰 등 공안기관의 자료로는 폐기하되 개인정보를 모두 삭제한 뒤 국가기록원에 기밀자료로 일괄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고스란히 남겨 기억하자는 것이다.
자녀 정보까지 담은 사찰기록
장례식까지 사찰한 집요함
"형식적인 관리였을 겁니다. 다 노인네들이고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 분들이고, 그렇지 않겠어요?" '요시찰인카드'에 대해 한 경찰서의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일까? 요시찰인카드를 살펴보면 그의 말은 100% 거짓말이다. 요시찰인에 대한 사찰은 한마디로 '집요함'을 특징으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 민청원(??)으로 부역했으며 백미를 주민들에게 거둬 괴뢰군에게 제공해 적을 방조한 자라는 죄목(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산 ㅂ씨의 사례를 보자. ㅂ씨는 월 3회 이상 형사가 직접 탐문하거나 망원(주변 감시자)을 통해 보고됐다. 이 보고는 단순히 ㅂ씨의 상황뿐만 아니라 ㅂ씨 자녀들의 직장명과 거주지까지 담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시찰 당시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거나 "동네에서 돌팔이 의사로 불리고 있다"는 등 당시 정황이나 주변인들에게 떠도는 소문까지 담겼다. 말하자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담은 것이다.
공간에 대한 묘사만 집요한 것이 아니다. 기록은 1975년부터 94년까지 20년에 걸쳐 있다. 보고의 끝은 바로 ㅂ씨의 죽음이다. 특히 1993년에는 "간경화 합병으로 거동이 불편해 바깥출입을 못할 정도"라고 보고돼 있음에도 "형식적인 시찰 지양할 것. 망원 정확한 시찰하에 기재할 것. 보안계장"이라고 '파란 펜'으로 기재하기도 했다. ㅂ씨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상자는 주거지에서 계속 간질환 등 병환으로 자가 치료 중이던 자로 병세가 악화돼 94년 0월00일 자가에서 사망하여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기타 불순 동향은 발견치 못함."
'중요 동향'이라는 난에는 사망일로부터 한 달 정도 뒤 '사망삭제'라고 기록돼 있지만 해당 경찰서에서는 이를 폐기하지 않고 따로 관리했다. ㅂ씨의 카드 마지막에는 공안사범 전산기초자료서가 부착돼 있다. 그의 죄목과 범죄사실을 전산시스템에 입력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족들의 인적사항까지 담겨 있다.
주변인까지 동원한 '망원체계'
망원 자신도 몰랐던 망원 노릇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국가권력 혹은 지배 방식은 전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 질서가 반복·재생산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미셸 푸코)
< 한겨레21 > 이 입수한 '요시찰인카드' 자료를 보면, 요시찰인을 사찰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다. 마을 이장부터 이웃, 친구, 친척 등이 주요한 감시자가 됐다. 경찰은 이를 쉽게 줄여 '망원'(網員·간첩이나 특무조직 따위의 비밀망에 속해 있는 사람, 북한말)이라고 불렀다. 요시찰 대상자가 이사 등의 이유로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당연히 이 망원 조직은 달라진다. 망원 조직이 달라질 때마다 변화된 망원 조직표 또한 요시찰인카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감시의 주무는 시찰담당자로 통칭하며 순경이나 경장 계급의 경찰관이 맡아왔다. 시찰담당자 아래로 지역감시자 2명(대공조장과 대공요원), 인접감시자 1명, 망원감시자 1명 등이 구성된다. 1명의 요시찰 대상자를 경찰 1명, 민간인 4명 등 총 5명이 감시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자들 또한 본적과 주소를 기입하고 직업과 성명, 생년월일, 성별, 학력과 경력 등 인적사항을 기록한다. 사찰 내용은 출타 상황, 직장 근무태도 등을 공통으로 하며, 가까운 이웃인 경우 가족 상황(인접감시), 매일 일과 점검(망원감시) 등의 임무가 추가됐다. ㄱ씨의 경우 이 감시자들은 모두 마을 사람이며 이장과 이웃 주민 등으로 구성됐다.
요시찰인의 존재 유무나 현재의 감시체계에 대해 경찰은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서도 "현재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ㄱ씨의 요시찰인카드에 등장하는 망원들의 소재를 파악해보니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정작 망원으로 활동했던 이장 ㄷ씨는 자신이 망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ㄷ씨는 "경찰이 무슨 행사 같은 게 있으면 찾아와 ㄱ씨가 잘 지내는지 묻고 가기는 했지만, 정기적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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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 이 단독 입수한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요시찰인카드'…
경찰이 90년대까지 '업데이트', 아직도 관리하며 공무원 선발 등에 자료로 활용
< 한겨레21 > 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도운 부역자와 보도연맹원 등을 종전 뒤 공안기관에서 감시하기 위해 작성·관리해온 '요시찰인카드'를 단독 입수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요시찰인카드는 감시 대상자의 세세한 일상을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까지 철저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이념 갈등 속에서 한 개인의 선택이 낳은 불행과, 그 개인을 끝까지 감시망에 가둬둔 국가의 집요한 보복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구나 이 자료들은 '공안조회'를 통해 남아있는 가족의 삶에까지 두터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 한겨레21 > 이 한 지방의 경찰서에서 입수한 요시찰인카드는 총 5권이다. 요시찰 대상자 1명당 1권씩으로 묶여있다. 각권은 관찰보호자 카드, 감시망 체계도, 요시찰인 자택 약도, 요시찰인 가옥 구조도, 재판 기록, 보안처분 대상자 신고서, 주민등록등본, 공안사범 조회 리스트, 신원조회 신청 기록 등으로 구성된다.
부부 다툼까지 기록한 요시찰인카드
우선 관찰보호자 카드는 요시찰 대상자의 본적과 주소, 가족관계에서부터 키, 머리 모양, 눈썹, 코, 치아, 언어(표준어 구사 여부) 등에 이르는 신체 묘사와 재산 관계 등을 적시하고 있다. 요시찰인카드의 핵심 내용은 관찰보호자 카드에 붙어있는 '시찰 내용'이다. 이는 대상자가 사망할 때까지 월 1회에서 3회 정도(많게는 10여 회까지) 경찰이 그의 동향을 사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상자 시찰 요령'도 자세히 규정돼 있는데, △용공 불순분자 접촉 여부 △빈번한 여행과 장기 출타 및 그 이유 △불분명한 가족의 증가 및 왕래와 그 확인 결과 △급격한 재산 증가와 생활수준 향상 및 동 자금의 출처 △전적, 개명 등 인적 사항 변동과 그 이유 △각종 범법행위 및 기타 특이사항 △현 국가 시책에 대한 참여도 등이 주 내용이다. 사찰 내용에는 공안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벼농사의 파종 상황이나 부부 다툼 등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세세히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개인별 차이는 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게 손글씨로 일일이 '업데이트'됐다. 또 시찰담당자인 경찰이 지역감시자와 인접감시자, 망원감시자 등을 둬서 이중·삼중으로 감시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는 감시망 체계도라는 문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요시찰 대상자가 경찰서 관할 지역 밖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 담당 경찰관부터 감시자까지 전부 일괄 조정됐고, 이 내용도 요시찰인카드에 업데이트됐다.
흥미로운 것은 감시 대상자의 주거지 약도와 자택의 가옥 구조도다. 약도에는 관할 경찰서(또는 지서)를 기준으로 도보 및 차량으로 걸리는 거리와 시간이 기록됐다. 또 가옥 구조도에는 "대문이 없고 앞쪽 돌담이 헐어지고 삼면이 나무 울타리로 하시든지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함" 등 담장에 대한 묘사와 출입 가능 여부가 적혀 있다. 해당 경찰서 관계자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도주로를 미리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정환경조사서를 덧붙여 성격이나 주변평, 사상, 가정생활, 교육 정도, 교우 관계, 재산 관계 등 관찰보호자카드에 기록된 것보다 좀더 자세한 개인 신상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한국전쟁 당시 한 개인이 북에 협조한 이후의 삶 전부를 감시해 기록한 것이다.
지난 6월16일 요시찰 대상자 가운데 한 명인 ㄱ씨를 찾아나섰다. 요시찰인카드에 나온 그대로 찾아가보기로 한 것이다. '지서에서 남쪽으로 1.7km 첫 동리.' ㄱ씨 요시찰인카드에 기록된 약도는 여전히 정확했다. 카드 안에 있는 평면도처럼 삼면이 나무 울타리였으며 앞쪽으로는 돌담이 1m 이하로 둘러쳐져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 지난 일을 왜 갑자기 물어요?"
여든을 넘긴 노구가 된 ㄱ씨 부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연방 반복했다. 그 말에는 경계심이 잔뜩 묻어났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어요. 무슨 일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고생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똑똑한 사람도 아닌데, 왜 그 사람이 빨갱이였겠어요."
60년 전,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ㄱ씨의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국전쟁이 난 지 두 달 뒤인 그해 8월이었다. "숙부가 와서 집안 심부름을 하라는데 못하겠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심부름을 다닌 거예요. 동네에서 걷은 돈도 가져다드리고, 담배 심부름도 하고. 그게 다예요."
법이 사찰한, 법을 모르는 사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요즘처럼 수상한 시절에 서울 올라간 자식들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며 "나는 더는 모른다"는 말로 인터뷰를 사양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ㄱ씨 주변인들의 말과는 달리 요시찰인카드에 드러난 ㄱ씨는 수십 년 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던 공안사범, 빨갱이였다. "1950년 8월 괴뢰군 전투용 참호를 구축하고 괴뢰군 비행기 헌납금 3000원을 제공했음. 숙부인 ㄱ씨에게 양말 등 수종의 물품을 제공하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2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1953년 6월6일 출소한 자." 기록에는 이런 묘사도 있다. "인근 주민의 세평이 양호한 편임. 사상은 현 정부 시책에 순응하나 기회주의 사상을 포지함. 성질은 음험하고 내성적임."
ㄱ씨에 대한 경찰의 감시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이었다. "76년 5월×일. △△시장에 농기구를 구입차 다녀온 사실이 있음" "76년 5월×일 본인의 생일로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당일 ㅇ씨(장모)가 다녀감" 등을 망원의 전언이나 경찰의 직접 관찰로 상세하게 기록했다. 경찰이 동네 주민을 망원으로 동원하면서까지 감시한 ㄱ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법 없이도 살 사람'과 '성질이 음험한 기회주의자'의 간극은 어떻게 메워질 수 있을까?
동네 사정에 밝다는 ㄷ씨의 집을 찾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이 마을에서 살아온 토박이로 최근까지 동네 이장을 지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ㄷ씨는 대뜸 "죽음을 면한 것만 해도 감사해하는 분위기였다"며 "이 동네에서만 수복 뒤 9명이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즉결 처분됐다"고 말했다.
"8월에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오자마자 지서 앞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은 선전부장, 당신은 여성부장, 당신은 연락부장' 이렇게 호명했죠. 그때 누가 '저 못하겠어요'라고 나설 수 있었겠어요. 그때 ㄱ씨도 연락병인가를 했을 거예요. 그때 부장 한 사람 중에 열심히 한 이들은 다 죽고, ㄱ씨도 지서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와서 똥물 먹고 살아났죠. ㄱ씨랑 같이 잡혀간 사람은 매질로 인해 저 세상에 갔고요."
ㄱ씨가 숙부를 도왔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처벌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되물었다. ㄷ씨는 그 숙부라는 사람의 이름과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빨치산 출신으로 당시 면 단위의 노동당 간부를 맡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ㄱ씨가 경찰의 기록대로 자신의 성향을 감추고 살아온 사람인지를 물었다. ㄷ씨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라니까…,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래도."
그런 사람을 왜 경찰이 수십 년 동안 감시했을까?
"팔푼이였다니까!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다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던 ㄱ씨는 실은 '법을 모르는' 정신지체인이었다.
벌써 30년 전에 폐기됐어야
비인간적인 감시의 사슬은 더 이상 ㄱ씨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는 22년 전인 1988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요시찰인카드는 계속 남아 그의 가족을 옥죄고 있다.
ㄱ씨는 숨지기 전인 1979년 이미 보안관찰 면제처분을 받은 사람이다. 요시찰인카드가 작성된 나머지 4명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요시찰인카드는 이미 1980년 관찰보호자 일제 정비계획에 따라 삭제됐어야 하는 자료다. 이들의 요시찰인카드에는 실제로 '삭제'라고 표기돼 있다. 그럼에도 폐기나 봉인 등 다른 절차 없이 여전히 해당 경찰서가 이 자료들을 전산과 서류로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요시찰 대상자인 ㅎ씨의 경우에는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뒤에도 여전히 사찰이 계속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ㄱ씨의 가족, 특히 직계가족은 한국전쟁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점 때문에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을지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 관계자는 "한국전쟁 관련 공안기록은 폐기되지 않고 전국 각 지역 경찰서에 남아 있을 것"이라며 "지역의 경찰서에서는 당사자가 있는 한 계속 기록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기록은 '요시찰인카드' 또는 '부역자 카드'로 불린다"며 "이후 발생한 공안사범 관리와 함께 진행한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가 밝힌 요시찰인에 대한 관리 실태는 다음과 같다. 요시찰인카드가 남아 있다면 우선 손으로 문서를 직접 작성해 업데이트를 한다. 부역자와 관련된 이사, 사망 등 변동 사항이 있으면 수시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다음 전산 작업을 거친다. 전산화를 통해 해당 경찰서의 과학수사팀이 전담해 관리한다. 이는 수사나 신원 조회 때 조회가 가능하다. 다만 이 조회는 우리가 흔히 아는 '범죄경력 조회'(이른바 전과 조회)와는 별도의 절차다. 한국전쟁 부역자에 관한 내용은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과 함께 '공안 조회'라는 절차를 거친다. 공안 조회에서는 직계가족도 관련자로 기록돼 보관된다.
아버지의 기록이 자식을 옥죄다
공안 조회는 주로 공안 사건을 수사하거나 공무원 및 정부투자기관 직원 등을 선발할 때 참고자료로 쓰인다. 직계가족 중에 부역자가 있다면 당사자가 사망했더라도 기록은 그대로 남아 공안 조회를 통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좌제 폐지가 공언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한국전쟁 부역자들에게는 이런 굴레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법무부는 최근 연좌제 논란이 일었던 '공안사범자료관리규정'을 개정해 6월11일자로 시행에 들어갔다. 주요 내용은 "공안사범자료는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게 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이는 촛불집회 참가자를 입건한 경찰이 당사자는 물론 가족의 공안 기록까지 첨부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고, 검찰이 이 자료를 법원에 증거물로 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연좌제 논란을 불러일으킨 뒤 나온 것이다. 당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까지 나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규정의 개정이나 폐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 표명을 했다. 하지만 '불이익한 처우를 받게 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새 규정은 그 적용 범위가 모호하고 공안기관간 협조 의무 규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공안사범 관리는 특별히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일선 경찰들의 의견이다.
남아있는 한국전쟁 부역자들에 대한 정보는 폐기돼야 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공안사건 관련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법"이라며 "보관해야 할 법률적 근거가 없는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들은 폐기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는 수사상의 예단을 갖게 하기 쉬울 뿐 아니라 헌법상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오 국장은 "일반적으로 공안기관에서는 법률이 아닌 규칙이나 예규를 보유 근거를 내세우는데, 이는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많은 정보들인 만큼 법률상의 보관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모두 폐기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역사에 대한 기록인 점을 감안하면 우선 경찰 등 공안기관의 자료로는 폐기하되 개인정보를 모두 삭제한 뒤 국가기록원에 기밀자료로 일괄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고스란히 남겨 기억하자는 것이다.
자녀 정보까지 담은 사찰기록
장례식까지 사찰한 집요함
"형식적인 관리였을 겁니다. 다 노인네들이고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 분들이고, 그렇지 않겠어요?" '요시찰인카드'에 대해 한 경찰서의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일까? 요시찰인카드를 살펴보면 그의 말은 100% 거짓말이다. 요시찰인에 대한 사찰은 한마디로 '집요함'을 특징으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 민청원(??)으로 부역했으며 백미를 주민들에게 거둬 괴뢰군에게 제공해 적을 방조한 자라는 죄목(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산 ㅂ씨의 사례를 보자. ㅂ씨는 월 3회 이상 형사가 직접 탐문하거나 망원(주변 감시자)을 통해 보고됐다. 이 보고는 단순히 ㅂ씨의 상황뿐만 아니라 ㅂ씨 자녀들의 직장명과 거주지까지 담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시찰 당시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거나 "동네에서 돌팔이 의사로 불리고 있다"는 등 당시 정황이나 주변인들에게 떠도는 소문까지 담겼다. 말하자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담은 것이다.
공간에 대한 묘사만 집요한 것이 아니다. 기록은 1975년부터 94년까지 20년에 걸쳐 있다. 보고의 끝은 바로 ㅂ씨의 죽음이다. 특히 1993년에는 "간경화 합병으로 거동이 불편해 바깥출입을 못할 정도"라고 보고돼 있음에도 "형식적인 시찰 지양할 것. 망원 정확한 시찰하에 기재할 것. 보안계장"이라고 '파란 펜'으로 기재하기도 했다. ㅂ씨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상자는 주거지에서 계속 간질환 등 병환으로 자가 치료 중이던 자로 병세가 악화돼 94년 0월00일 자가에서 사망하여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기타 불순 동향은 발견치 못함."
'중요 동향'이라는 난에는 사망일로부터 한 달 정도 뒤 '사망삭제'라고 기록돼 있지만 해당 경찰서에서는 이를 폐기하지 않고 따로 관리했다. ㅂ씨의 카드 마지막에는 공안사범 전산기초자료서가 부착돼 있다. 그의 죄목과 범죄사실을 전산시스템에 입력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족들의 인적사항까지 담겨 있다.
주변인까지 동원한 '망원체계'
망원 자신도 몰랐던 망원 노릇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국가권력 혹은 지배 방식은 전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 질서가 반복·재생산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미셸 푸코)
< 한겨레21 > 이 입수한 '요시찰인카드' 자료를 보면, 요시찰인을 사찰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다. 마을 이장부터 이웃, 친구, 친척 등이 주요한 감시자가 됐다. 경찰은 이를 쉽게 줄여 '망원'(網員·간첩이나 특무조직 따위의 비밀망에 속해 있는 사람, 북한말)이라고 불렀다. 요시찰 대상자가 이사 등의 이유로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당연히 이 망원 조직은 달라진다. 망원 조직이 달라질 때마다 변화된 망원 조직표 또한 요시찰인카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감시의 주무는 시찰담당자로 통칭하며 순경이나 경장 계급의 경찰관이 맡아왔다. 시찰담당자 아래로 지역감시자 2명(대공조장과 대공요원), 인접감시자 1명, 망원감시자 1명 등이 구성된다. 1명의 요시찰 대상자를 경찰 1명, 민간인 4명 등 총 5명이 감시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자들 또한 본적과 주소를 기입하고 직업과 성명, 생년월일, 성별, 학력과 경력 등 인적사항을 기록한다. 사찰 내용은 출타 상황, 직장 근무태도 등을 공통으로 하며, 가까운 이웃인 경우 가족 상황(인접감시), 매일 일과 점검(망원감시) 등의 임무가 추가됐다. ㄱ씨의 경우 이 감시자들은 모두 마을 사람이며 이장과 이웃 주민 등으로 구성됐다.
요시찰인의 존재 유무나 현재의 감시체계에 대해 경찰은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서도 "현재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ㄱ씨의 요시찰인카드에 등장하는 망원들의 소재를 파악해보니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정작 망원으로 활동했던 이장 ㄷ씨는 자신이 망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ㄷ씨는 "경찰이 무슨 행사 같은 게 있으면 찾아와 ㄱ씨가 잘 지내는지 묻고 가기는 했지만, 정기적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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