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반MB연대를 넘어 대안 중심 진보대연합으로
이번 6.2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야권의 승리로 이명박 정권의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시대착오적인 토목 공사인 4대강 죽이기 사업, 수도권 중심주의를 고수하려는 탐욕에서 나온 세종시 수정안 추진,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 지난 2년 동안 현 정권이 무리하게 추진하거나 민주주의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행태가 분명한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현 정권의 패배와 야권의 승리는 모두가 인정하듯이 기존 야당, 특히 민주당이 책임 있는 대안 정당이어서 나온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 정권이 보인 비민주적, 독단적, 시대착오적 행태에 대해 국민이 냉정하게 심판한 결과이며, 진보정치 세력이 힘 있는 대안을 보여주지 못한 상태에서 이른바 기득권을 가진 민주당으로 대중의 눈길이 쏠렸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이번 지방선거의 또 다른 패배자는 진보 진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보 진영의 패배는 낡은 패러다임과 태도에 붙잡혀 미래적인 대안을 제출하지 못한 무능과 관성에서 나온 것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복지 국가의 쇠퇴와 신자유주의적 전환 그리고 냉전 질서의 해체와 다양한 갈등의 일반화는 한국 사회에서 고유한 민주화의 과정과 중첩되었다. 이는 각각 53년 정전협정 체제, 87년 민주화 체제, 97년 신자유주의 체제 및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세 종류의 과제의 중첩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각 체제가 지닌 고유한 모순의 해결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러한 세 체제의 모순은 하나의 국면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총체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과제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국면에 대한 종합적인 대안의 제출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 진영이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체제나 민족의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평화라는 관점에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사고하고 평화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했다. 또한 87년 헌법에 표현되어 있는 형식적, 제한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권력 구조 및 형성의 방식을 더욱 민주적인 형태로 바꾸고, 자유권을 넘어 사회권을 확대하는 방향의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이는 1997년부터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안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직된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는 것만으로는 구조 조정과 노동의 유연화에 대응할 수 없으며, 미조직 노동자와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한 전 국민의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대안적 경제 체제를 수립하는 것만이 문제의 해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했다. 끝으로, 이제는 일반화된 생태주의적 가치를 가치로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의 유기적 구성 부분으로 포괄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전무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진보 진영의 관성과 무능, 여기에 더해 자파 이기적인 태도 때문에 그동안 진보 진영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결과 진부한 민주주의 대 경제적 환상이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벌어진 2007년 대선에서 진보 진영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낸 것 이상의 결과를 낳지 못했다. 그나마 진보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관성과 무능을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지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진영의 다수파는 ‘5+4’로 표현되는 반MB연대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지방선거를 치르려 했다. 역사적으로 근대의 사회 변화는 민주주의 운동의 형태를 띠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나, 신자유주의적 계급 정책의 일방적 추진과 독선적이고 비합리적 태도를 보인 현 정권의 행태에 대한 공분으로 보나 반MB 민주대연합은 그 자체로 보면 일정한 정당성이 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이 민주대연합에 참여할 때 자신의 고유한 방향과 내용을 연합 내에서 관철하고 연합의 성격을 진보적으로 전환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 운동 자체가 형해화할 뿐만 아니라 진보적 가치와 대안마저 상실한다는 것을 이번 지방선거는 뼈아프게 보여주었다. 특히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반MB면 무조건 된다는 전략 부재와 자파 세력의 확대라는 선거 공학적 손익 계산 속에서 그들이 일정하게 표현하는 진보적인 가치와 대중의 힘을 고스란히 보수적 자유주의와 개혁적 자유주의의 잡탕인 민주당에 넘겨주었다. 이들이 내린 고뇌에 찬 결단의 땀방울은 민주주의 제단에 뿌려진 희생의 피가 아니라 이후 진보 운동의 진전을 가로막는 수렁이 될 것이다.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외형적 ‘약진’을 진보 진영의 성과라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이에 비해 우선 진보대연합을 제대로 이루어야 민주대연합도 당면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성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사회당도 일찍부터 이런 인식 속에 대안을 지닌 진보대연합을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진보대연합 논의는 그 자체로도 늦게 시작되었으며 지방선거가 가까워올수록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렇듯 진보대연합 논의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던 것은 특히 민주노동당이 이를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책임 있는 논의와 행동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한편, 민주노총 지도부는 진보대연합을 자신의 대중 조직을 추스르는 방편으로만 생각했다. 따라서 대안을 가진 진보대연합이 아니라 그저 조직 통합을 위한 압박으로 사태를 몰아갔다.
노회찬과 심상정으로 대표되는 진보신당이 ‘5+4’라는 틀에 참여했다 탈퇴한 것, 진보신당의 김석준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각각 사퇴한 것은 개인들이 감당해야 했을 사태의 무게와 상관없이 진보대연합과 민주대연합의 관계, 진보대연합의 원칙, 선거연합과 정치연합 등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주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안적인 내용을 지닌 진보대연합만이 민주대연합을 추동하여 민주주의를 확장할 수 있다. 따라서 진보대연합과 민주대연합은 결코 대립적인 두 개의 과제가 아니다. 또한 정치연합의 한 형태인 선거연합은 누가 후보가 될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서, 연합 안에서 진보대안을 어떻게 관철할 것인가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와 심상정 후보의 사퇴는 반MB 민주연합의 대의와 약세 후보로서의 처지 사이에서 개인의 고뇌만 보여주었을뿐 반MB 민주연합에 어떻게 진보대안을 관철할 것인가라는 고민, 즉 진보정치의 고뇌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민주노동당의 연대전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던 문제이다. 그들은 용의 이빨을 뿌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황금 양모를 가져간 것은 다른 이들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귀중한 성과이다. 천안함 사건을 이용한 안보 위기 조성 속에서도 국민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한국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53년 체제가 지연된 형태이긴 하지만 적어도 국민의식 차원에서는 이미 시효 만료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노동의 유연화를 통한 착취의 강화, 금융적, 지대적 수탈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적 계급 정책이 대중의 삶을 벼랑으로 몰아넣고 있는 97년 체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여전히 무정형적인 상태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찰력을 막무가내로 행사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 현 정권의 독단적, 반민주적, 시대착오적 태도에 대해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나선 민주당과 시민사회 일각의 주장이 정세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니 이들이 사자의 몫을 챙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보 진영에 닥친 이러한 산사태 속에서도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가 끝까지 진보의 독자적 가치를 표현하는 인물로 남은 것은 이후 진보 진영이 진보대연합이라는 큰 틀에서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사회당은 지방선거 기간 진보 진영의 주요한 대안이라 할 수 있는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로 정치연합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했고, 의미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밖에 이번 지방선거의 과정과 결과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는 열정을 지닌 여러 집단과 인물이 있다는 것 또한 진보 진영의 자산이다. 특히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모임’은 진보 대안 논의를 위한 장으로서, 여러 진보정치 세력의 매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자산을 바탕으로 진보 진영은 대안적인 진보대연합을 구성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우선 진보 정치의 독자성을 분명하게 수립해야 한다. 이때 독자성은 완주니 아니니 하는 결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정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방식으로 진보대안을 민주연합에 관철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진보정치의 독자성은 민주주의 운동 및 과제와 구분되는 독자성이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에 대한 진보적인 대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를 위해 진보적인 대안을 생산하고 공론화하며 사회적으로 확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논의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 대안 없는 통합과 정세적인 일회성 연합을 넘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연합으로 가기 위해서는 진보적 대안의 생산과 공유, 확산이 필수적이다. 끝으로, 이 두 가지 과제를 정치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상설적인 정치연대체를 만들어야 한다. 당면의 과제를 수행하는 틀이자 미래의 진정한 대안세력 등장을 기획하는 틀, 곧 미래를 여는 희망이 될 정치연대체를 통해 진보 진영은 새로운 출발을 알려야 한다.
대안을 지향하는 혁신을 통해 진보를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회당은 진보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모든 진보 세력과 함께 머리를 맞댈 것이며, 최선을 다해 스스로의 몫을 다할 것이다.
2010년 6월 11일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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