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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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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미경 |
| 모든 것이 멈춰져 있었다. 그래서 일상에 복귀하는데는, 어쩔 수 없이 다소간의 진통이 필요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내 집의 생소함, 거울 속에 들어있는 내 얼굴의 낯설음, 출근은 하였으나 처리해야 할 업무들은 연결이 되지 않고, 저만치 뚝 떨어진 낭떠러지라도 사이에 두고 있는 듯, 그 세상과 이 세상은 존재감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세상에 연결되어 있던 팽팽한 끈들이 투두둑 끊어져 나간 거기에는 짙푸르게 일렁이는 산과, 눈부시게 치솟아 올라간 바위와 잿빛으로 뿌옇게 가물거리는 바다가 있었다.
도대체 뭘 한 건가? 벗어놓은 온몸이 부딪히고 찢기고, 긁히고 뭉개지고, 거기에다 물리고 데이기까지 한, 온갖 종류의 상처들로 울긋불긋 천변만화를 이루었다. 어디서 얻은 것인지 기억도 선명한 상처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는 상처들…. 바위를 오르는 대가는 상처에 아로새겨진다. 그리하여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흉터들은 아슴해지는 전율의 순간들을 현실로 되살려낸다. 음… 또 한 건 한 거야….
무게가 모든 것을 압도하다
설악의 자락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건 공기다. 한결 낮아진 온도와 산과 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진 설악만이 지닌 냄새, 그것은 겹겹이 굽이쳐가는 능선마다에 넓고 깊은 골짜기들을 품은 지리산의 냄새만큼이나 주술적이어서, 사람을 망각과 몰입의 세계로 사정없이 끌어들인다. 지난 8월 초 드디어 울산바위 돌잔치길을 간다. 끝이 무사할 것이라고 확언장담할 수 없는, 설악에서 보낼 한 주일의 시작이다.
돌잔치길의 멤버는 세 명이다. 우리의 리더 최모씨는 딱 1년 전 4박 5일의 설악등반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등반을 여러 차례 함께 하며 익숙해진 베테랑 선등자이며, 또한 김모씨는 그 파워와 기량에 있어 자타가 공인하는 톱 클래스에 속하는 우수한 클라이머이다. 나의 체력이 좀 문제이긴 하지만 적어도 1인분은 할 것이니, 돌잔치길이 힘들고 어렵다 해도 멤버들의 면면이 든든하여 걱정스런 생각은 손톱끝 만큼도 들지 않는다. 그래 잘해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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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봉 첫피치 선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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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미경 | 배낭을 꾸리는 건 예술이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가려내는 일, 물품들을 빈틈없이 쌓으면서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구별하는 일, 매기 힘들지 않도록 무게를 분산시키고 제각각인 모양의 물품들을 채곡채곡 추스려, 다 쌌을 때의 배낭 모양을 매끈하게 만드는 일, 배낭 하나 꾸리는 데에서도 사람의 갖가지 성격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온갖 종류의 등반장비를 구색맞춰 장만하고 목숨처럼 챙기는 우리의 리더 최모씨는 배낭만큼은 아직도 변변한 것을 소유하지 못하였는데, 그나마 꾸리는 모양마저 변변치 못하여 옆에서 지켜보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마구잡이로 쑤셔넣은 물건들이 제자리를 못잡아 이리로는 툭 불거져 나오고, 저리로는 움푹 꺼져들었다. 그러니 세워놓으면 앞으로 쓰러지고, 받쳐놓으면 뒤로 쓰러지고 할 밖에. 저렇게 꾸려서야 고생좀 하시겠군 쯔쯔….
하지만 배낭은 끔찍하도록 무거웠다. 등반장비와 비박장비, 2박 3일간의 식량에다 마지막으로 물을 얹으니, 배낭은 커다란 돌덩어리라도 된 듯 꿈쩍을 안 한다. 그 짐을 지고, 들머리인 지옥문을 찾아 헤매는 동안, 6시에 출발한 시계바늘이 9시를 넘어섰다. 덕분에 커다란 동굴의 입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지옥문 앞에서 장비를 착용할 때에는 벌써 지쳐서 긴장도 흥분도 느끼지 못한다. 들머리를 찾은 반가움도 잠시 뿐, 마치 들머리인 지옥문을 찾는 것이 목표라도 되었던양, 쉬고 싶을 뿐이다. 장비가 빠져나간 배낭도 무겁긴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이제 출발이다.
사실상 제1봉 첫피치를 오르며 이미 모든 것을 예감했다. 지옥문을 통과하여 바로 왼쪽에서 시작되는 첫 피치에는, 이미 중천에 떠버린 해가 맹렬한 기세로 바위를 달구고 있었다. 난이도 5.10의 두 피치를 통과해야 하는 제1봉, 족히 3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지고 5.10 크랙을 뜯는다는 것은 거의 지옥을 경험하는 일이다.
무지막지한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고, 시간은 흘러도 길은 축나지 않으니, 간신히 1봉을 넘어 2봉을 통과하는데 한나절이 지난다. 그리하여 가장 길고 어렵다는 3봉을 앞에 두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벌써 현실을 인정해가고 있었다. 첫날의 목표가 9봉을 넘어 오아시스에서 비박하는 것이었으나 진행속도로 보아 수정이 불가피하다. 6봉을 지나 전망대쯤이나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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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봉 첫피치 후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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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미경 |
| 3봉에 좌절하다
마의 3봉이었다. 난이도 5.11b의 곤두선 크랙을 뚫는 일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첫 피치를 완료하기도 전인데 벌써 해가 기울어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 3봉을 통과하기는 틀린 것 같다. 4피치 종료점의 비박지까지 가는 것으로 목표를 재수정한다. 하지만 두 번째 피치의 선등이 완료되자 해는 이미 능선 너머로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직 올라야 할 것은 배낭 3개와 두 명의 후등자, 시간이 없다.
최모씨가 오르자 높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높이의 암벽위 테라스에 혼자 남았다. 이제 어두워져서 랜턴을 켜야한다. 홀링할 수 있게 묶어 고정시킨 육중한 배낭이 성큼성큼 허공으로 들려 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속초시의 야경은 검은 대지 위의 한 조각 섬처럼 떠있고, 검은 바다 수평선에는 오징어배의 불빛이 환하게 밝혀졌다. 어둠, 거세지는 바람, 위에서는 확보작업을 다시 하는지 한동안 지시가 없다.
공포감은 긴장을 불러온다. 뜨거운 낮 동안의 육체적 고통은 공포감이 들어설 자리를 내주지 않았으나, 어둠 속에 혼자 남자 덮쳐온 공포감은, 곧이라도 죽을 것 같던 피로감을 몰아내버리고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해야 할 일을 새겨본다. 저 무거운 배낭을 매고 크랙을 뜯으며 줄지어 박혀 있는 프렌드들을 남김없이, 절대로 놓치지 말고, 완벽하게 회수해야 한다. 지시가 왔다.
“확보준비 완료, 자일이 둘이니 두 명이 하나씩 확보 볼 겁니다. 둘다 묶으세요.”
음… 좋은 생각이군. 잠시 생각하다 비어있는 자일을 배낭헤드에 묶는다. 이렇게 하면 배낭무게로 인해 허리가 뒤로 제껴지는 걸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출발” 다시 무전기에서 조용한 말소리가 울려나온다.
“장비회수는 하지 마세요. 내일 아침에 우리가 할 겁니다. 올라오기만 하세요.”
오 이런, 사람 감동시킬려고 작정을 했나.
“알게쓰 되는대로 하게쓰. 출발!”
첫 번째 프렌드를 수월하게 회수한다. 크랙도 손맛이 좋아 뜯을 만하고…. 그러자 되는대로 하리라던 장비회수가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가 이번 등반에서 1인분을 하느냐 못하느냐를 판가름하는 한판의 피터지는 승부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처음에 수월하던 장비회수는 중간쯤을 넘어서자 끔찍한 작업이 되었다. 프렌드 하나를 추가할 때마다 덜컥덜컥 더해지는 무게라니! 뒤에서는 배낭이, 앞에서는 주렁주렁 달린 프렌드가 몸을 아래로 늘어지게 하고, 크랙은 얇아져가고 바위는 점점 더 일어서고 팔에는 펌핑이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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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봉의 두번째 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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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미경 | 작은 랜턴의 불빛은 이 짙은 어둠을 밀어내기엔 역부족이다. 겨우 두뼘 정도 밖에 밝히지 못하는 랜턴 불빛에 의존해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프렌드를 회수하는 일에 집중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 가뜩이나 모자란 프렌드인데 말이다. 어떤 등반에서든 한 번씩은 이렇게 고도로 집중하는 순간이 있다. 그 집중의 순간은, 길던 짧던 사람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한계를 넘어서게 만든다.
내가 바위에 매료된 것은 아마도 그런 체험들 덕분일텐데, 그것은 그야말로 칼끝 같은 집중과 산과 같은 용기와, 그리고 우직한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위에서 두 사람이 끌어당기는 힘이 거의 괴력에 가깝다. “하나, 둘, 셋”에 호흡을 맞춰 한땀씩 위로 전진한다. 자일을 몸과 배낭에 각각 묶었기 때문에, 가끔씩 힘의 균형이 깨지면 그만 바위에 코를 박고 만다. 이까이꺼 코가 깨진들 대수냐….
마지막 턱은 거의 끌어올려졌다. “완료” 나를 끌어올리느라 사력을 다하고 있는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의 안도감, 하지만 이제 더는 갈 수가 없다. 4피치 종료점의 비박지에도 당도하지 못하고 결국 이 경사진 좁은 테라스에서 첫날의 등반을 마친다. 그래도 여기가 몸이라도 붙여볼 수 있는 테라스인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어쨌든 모든 것을 떠나서 우선은 먹어야 한다.
새벽부터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시간은 밤 9시를 넘어서고, 밥을 먹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거세어진 바람이 밤을 다 새우고 다음 날까지 우리를 그토록 시달리게 할 줄은, 그때는 알 수가 없었다. 비록 계획의 반도 못 가고 마친 등반이었지만 먹을 때만큼은 여유있고 행복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프렌드를 몽땅 회수해왔는지에 관한 검증작업도 했다. 사실 두 사람, 특히 장비에 꼼꼼한 최모씨는 결코 믿으려 들지를 않았으니까. 하지만 일단은, 어디까지나 일단은 100% 회수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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