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알아보는 법
야영장은 조용하였다. 곤히 잠든 동료들을 깨워 한바탕 부산을 떨고나자 잠자리를 챙길 차례다. 우리가 찜질방에 가기로 의기투합한 것은, 지탱할 수 없는 피로감에 더하여 오로지 씻어야 한다는 일념에서였을 게다. 내가 등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찜질방을 여기에 한 꼭지로 할애하는 것은, 그것이 나로서는 참으로 경이로운 한 편의 문화체험이었던 까닭이다.
찾아간 24시 찜질방은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카운터에서 돈을 지불하고 성별로 갈라져 들어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메인 홀에서 다시 만난다. 이것이 공통적인 찜질방의 시스템이다. 찜질방에서 미아 생겼다는 말 들어본 적 없고 들어가서야 잘 일밖에 없으니 만날 시간이고 장소고 정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씻고 옷 갈아 입고 메인 홀로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아뿔싸! 뭔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적어도 300평은 됨직한 어마어마한 홀을 가득 채우고 누워 있는 사람들! 마치 커다란 도시락에 김밥을 나란히 줄지어 담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4열 횡대로 줄 맞춰 누워 있는 광경…. 아아! 장관이었다. 이토록 거대하고 집단적이며 또한 개방적인 잠자리는 영화는커녕 SF소설 속에서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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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토왕 암장 낙화유수길 |
ⓒ 최정열 |
똑같은 옷을 입고 누워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면 여자와 남자를 구별해내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으니까. 너무나 개방적이어서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되는 이 이율배반적인 공간에서 두 바퀴째에도 허탕을 치게 되자 그만 초조해진다. 홀을 돌다 말고 우두커니 앉아서 생각해본다.
‘그냥 아무 데나 누워서 자버리까?’
하지만 잘만한 데가 있나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젖는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가 누워 자버릴 수 있을 정도의 배짱이 나에게 있을 것 같지 않다. 더구나 사람들이 누워 있는 간격이 협소하여 끼어들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다. 결국 잠 못들고 뒤척이다 날 샐 게 분명하다. ‘젠장, 아는 사람 옆이면 좀 낫나?’ 하지만 이건 익명의 군중 속에 혼자 노출되고 싶지 않은 심약한 개인의 피보호 본능이다. 이런 건 웬만하면 존중해줘야 한다.
사람과 사람을 구별짓는 특징이 무엇이 또 있을까? 가까이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반짝 불이 들어왔다. 실루엣이다. 사람들의 누워 있는 모양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었는데, 얼굴을 구별해낼 수 없는 상태에서도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실루엣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특징적인 실루엣을 만드는 포인트! 순간 나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바로 그 해법에 따라 불과 반 바퀴를 돌기도 전에 나는 우리의 최모씨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는데, 내가 포인트로 찍었던 그의 신체의 두 가지 특징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미공개로 남겨 두기로 한다.
이후 나는 이 해법의 정확성을 한 번 더 확인할 기회를 가졌는데, 소토왕골 암장 낙화유수 2피치에 매달려 저 멀리 (결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먼 거리였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에서 하산하는 이모씨와 강모씨를 단번에 알아보는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알아본 것은, 어디까지나 이 두 사람이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 실루엣을 소유하였기 때문인데, 그 또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미공개로 남겨 두기로 한다.
낙화유수
소토왕골 암장에는 많은 바위꾼들이 붙었다. 소토왕골 암장은 한 편의 시를 위해 가는 길 내내 우측으로 아찔한 고도감을 선사하는, 엄청난 높이를 가진 큰 규모의 벽이다. 암장을 따라 내려오는 계곡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넓직한 마당바위에는 나무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웠다. 땀을 식히는 바람에 홀리며 벽을 오르는 바위꾼들의 유연한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자니 울산바위 이틀간의 격전이 현실이 아닌 한바탕 꿈인 것만 같다.
우리의 최모씨는 그동안 수많은 등반을 하면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울산바위를 가며 두 번이나 던졌다. 이렇게 힘든 일을 왜 하냐고 말이다. 음… 모른다. 모르니까 하는 거지. 알면야 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말이다. 단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그 생각만은 바위를 오르면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 생각만 나면 팔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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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토왕 암장 낙화유수길 |
ⓒ 최정열 |
낙화유수를 오르는 우리의 김모씨의 몸이 가볍다. 그는 누구라도 부러워할 철의 어깨를 가졌다. 먼저 간 등반자의 아름다움이 유연함이라면 우리의 김모씨의 아름다움은 강인함이다. ㄱ자로 꺾어 올라간 크랙에서 첫번째 크럭스와 만났다. 양팔을 벌려 크랙의 날개를 잡은 자세에서 멈추어 시간이 지체되는데도 다음 동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힘이 많이 소모되는 자세다. 볼트에서 상당히 떨어졌으니 추락하면 많이 먹는 위치다. 그가 마주친 어려움이 전달된다.
확보자일을 잡은 손목에 힘이 실리면서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한다. 역시 여의치 않은지 그가 조심스럽게 클라이밍 다운하여 안전한 스탠스로 이동한다. 확보자일을 당겨 회수한다. 그때 마당바위에 드러누워 느긋하게 구경하던 우리의 리더 최모씨가 한말씀 하신다. 프렌드 가져가서 먹이고 가라고. 우리의 김모씨는 동의하지 않는지 다시 똑 같은 방법으로 돌파를 시도한다. 그리고 다시 물러선다.
그러기를 서너 차례…. 안되겠는지 우리의 최모씨가 프렌드를 갖고 올라오고 그 순간 김모씨는 크럭스를 가까스로 돌파한다. 그리고 볼트를 두어 개 더 지나서 첫 피치 완료다. 우리의 최모씨는 나에게 프렌드를 걸어주며 올라가서 전달하라고 지시한다. 두 번째 피치에서 프렌드를 두어 개 사용했다. 두 번째 피치는 어려웠다. 프렌드가 없었더라면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소토왕은 멀티피치이면서도 하드프리 스타일을 구현하도록 설계된 암장으로 보여진다. 이런 스타일의 암장에서 안전을 위해 확보장비를 써야 하는 건지, 고정 볼트에만 의존하여 한판 밀어붙여 봐야 하는 건지, 어차피 프렌드로 바느질을 한다해도 통과 못할 나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하긴 그거야 뭐 엿장수 마음 대로가 아니겠는가? 두 피치 종료후 직벽에 긴 하강이다. 낙화유수라…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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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열 |
울산 김모씨를 만난 건 딱 1년전 이때 장군봉에서였다. 바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한 둘이 아니건만 그가 그리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꼭 ‘빵’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악산 장군봉이라는 특별한 위치도 일조를 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역시 그의 등반하는 모습이었다. 우리의 최모씨가 프렌드 2개를 먹이고 올라선 크랙을 울산의 이모씨는 마치 워킹이라도 하듯이 툭툭 지나버렸는데, 어이없던 것은 심장이 졸아붙은 건 상관없는 나였고, 그와 그 일행들은 그것이 일상사인 듯 더없이 자연스럽고 태평했다는 것이다.
‘에구 젊은 사람들이 목숨 둘씩 갖고 다니나, 겁도 없군’
무언가 충고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만 쓸데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을 뿐이다. “저 사람 추락 먹어본 적 한 번도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 김모씨의 크랙을 오르는 모습은 강렬하게 남았다. 그건 보기 드문 압권이었다. 프렌드만 한 개 정도 먹였더라면 아마 100점까지도 아낌없이 주었을지 모르겠다. 그 크랙을 그렇게 가볍게 안정되게, 게다가 멋지게 오르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우뚝한 키와 건장한 체격을 그렇게 탄력있게 움직일 수 있다니… 발바닥에 초강력 용수철이라도 붙잡아 맸던 것일까?
어쨌든 그들을 올해도 야영장에서 만났다. 대형 천막에 모기장 치고 왁자하니 둘러앉은 분위기가 누구 못지 않다. 철판구이 해준다 하더니 구이는 없고 철판만 있다. '다 묵어삣다'나 뭐라나…. 못 먹는 소주만 실컷 얻어 걸쳤다. 얘기를 하다보니 이 사람들 울산바위 대 선배들이다. 한 맺힐라 하는 울산바위 얘기에 술 돌아가고, 반 밖에 못알아 먹겠는 사투리일 망정 분위기 알싸하니 그만인데, 우리의 무정한 최모씨 나이 얘기는 왜 하는겨? ‘아 나는 00살인데 저 아줌씨도 나랑 동갑이여’ ‘아아 저 인간 산통 다 깨는군… 젊은 척 좀 하게 냅두지…’
또 하나의 인연이 엮어져 간다. 바위 하나로 앉은 자리에서 친구가 되고 형이 되고 동생이 되는 인연들, 자일을 사이에 두고 목숨을 나누는 인연들, 피붙이는 안 봐도 서로 안 보고는 못배기는 인연들, 몇 주 안보이면 궁금해서 못견디겠는 인연들… 바위를 그만 두면서 마감될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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