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시대의 고졸] <3> 정규직도 고달프다. 생산직 경험 살려 부품관리 뛰어났지만 여전히 평사원… "다시 생산직 택했어요"

소한마리-화절령- 2011. 7. 14. 07:11

생산직 경험 살려 부품관리 뛰어났지만 여전히 평사원… "다시 생산직 택했어요"

[우리 시대의 고졸] <3> 정규직도 고달프다
생산직→사무직→생산직 회사 두 번 옮긴 38세 김민우씨
● 31세 권소정씨- 자격증만 5개인데 복사·팩스 잡무만 8년만에 겨우 대리

박관규기자 ace@hk.co.kr
페이스북 미투데이 트위터 싸이월드 공감
1 2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여성 지점장 양성 교육'에 참여한 고졸 출신 삼성생명 여사원들이 충북 천안시 에스원 연수원에서 암벽타기 도전과제를 수행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그동안 고졸 여사원은 관리직 승진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나, 지난해 4월부터 일선 지점장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림으로써 관리직 진출이 가능해졌다. 관리직으로 승진하려면 일선 지점장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삼성생명 제공

1 2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1992년 충북의 한 인문계 고교를 졸업한 김민우(38ㆍ가명)씨. 그는 현재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중견업체에서 정규직으로 근무 중이다. 입사동기 대졸자와 비슷한 5,000만원 이상의 연봉을 받으며 두 자녀를 둔 가장으로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20년 가까운 현장 경력을 쌓다 보니 경쟁사들이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치기도 한다. 고졸 성공신화를 일군 셈이다.

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김씨는 대졸 동기에 비해 서너 배는 더 땀을 흘려야 했다. 특히 20대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좋은 대학에 갈 자신이 없자, 한 살이라도 일찍 취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고교 졸업을 6개월 앞두고 가족의 만류를 뿌리친 채 학교에서 알선해준 직업훈련을 받았다. 기계가공 기술을 익힌 그는 졸업과 동시에 울산의 조그마한 자동자 부품업체에 취직했다.

연봉이 대졸 사무직보다 500만원 이상 적었지만, '나이가 네 살 어리니까'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대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근무여건이 열악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에, 휴일 수당은 고사하고 월차 개념도 없었다. 일이 많다고 불평하거나 임금 타령을 하면 인사고과에 반영해 인력 구조조정이 있을 때 쫓아냈다.

김씨는 이 회사에서 4년간 근무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했다. 그러던 중 동종 업계에서 사무직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사무직은 생산직 같은 학력 차별이 없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운 좋게 입사가 결정돼 나이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경력은 한참 뒤진 대졸 동기들과 함께 자동차 부품을 검수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5년 이상 부품을 생산했던 경험은 큰 자산이었다. 대졸 동기생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잘못 제작된 자동차 부품을 손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선보여 회사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고졸 '실력자'에겐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실망과 좌절뿐이었다. 같은 업무를 담당했던 4년 이상 경력이 뒤지는 대졸 동기들은 모두 주임을 달았지만, 그에겐 승진의 기회도 동일한 임금도 적용되지 않았다. 온갖 사무실 잡무도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 고졸을 은근히 무시하는 등 사회적 냉대도 여전했다. "아무 대학이나 갔더라면 이런 서러움은 없었을 텐데…."

김씨는 다시 생산직으로 돌아갔다. 대졸 사원을 우대하는 사무실 분위기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회사에선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작한다. 하루 8시간만 일하면 나머지 근무시간은 특근 수당으로 인정해줘 사무직보다 월급이 많다. 생산직은 정년(59세)까지 같은 일만 반복하기 때문에 대졸과의 경쟁도, 승진에 관심을 둘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은 늘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자식만은 대학에 보내 이런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할 겁니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고졸이 정규직으로 취업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고졸=비정규직'이라는 등식을 깨고 정규직으로 입사하더라도 주홍글씨처럼 '고졸' 낙인이 새겨져 냉대와 차별이 지속된다. 고졸과 대졸간 임금 격차는 입사 후 더욱 벌어져 두 배 이상 차이 난다. 공공기관이라고 다를 게 없다. 지난해 157개 공공기관이 신규채용 때 학력기준을 제시했고, 이 중 15개 기관이 고학력에 가점을 줬다. 또 68개 기관은 보수 산정에서 고학력자를 우대했다.

이 때문에 전문계고를 졸업하거나 직업훈련 과정을 마치고 입사한 고졸 출신들이 다시 대학으로 유턴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서울의 한 여상을 졸업한 권소정(31ㆍ가명)씨도 학력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경기지역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권씨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대졸 사원이 대부분인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전산회계자격증 5개를 따며 취업 준비를 철저히 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권씨에게 주어진 임무는 대졸사원과 달랐다. 대졸 동기들이 만든 기획을 문서화하거나 복사, 팩스 처리 같은 잡무만 주어졌다.

주변에선 '유일한 고졸 출신'이라는 수군거림이 따라다녔다. 그럴수록 권씨는 당당해지려 애썼고, 업무 파악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대졸 사원 중심의 프로젝트 준비팀에 합류라도 하면 주말도 없이 일했다. 어학 실력 향상을 위해 퇴근 후 어학원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부단히 노력했지만, 대졸 사원들이 2~3년이면 다는 대리를 8년 만에 겨우 달 수 있었다.

"정규직으로 들어오면 뭐 하나요. 대졸과의 차별이 이렇게 심하니 누가 대학에 가지 않겠어요." 가정 형편 탓에 전문계고에 진학했다가, 뒤늦게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해 연간 1,000만원에 육박하는 학비를 쏟아 붓고 있는 권씨의 하소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