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에서 뿌린 한미FTA의 씨앗을 이명박 정부가 틔우려 한다. 이제 이 국제조약이 발효되기 까지는 대통령의 서명만이 남았을 뿐이다. 혹자는 이 씨앗에서 자라날 파릇한 싹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나, 또 다른 혹자들은 이 씨앗은 쭉정이에 불과할 것이라며 초조해 한다. 자칫 밭 전체를 망가뜨릴 독초가 아닐지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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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비준안의 비공개 강행처리 후 시민들을 중심으로 연일 한미FTA 반대시위가 열리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챙피했는지 언론까지 통제하고, 다수의 힘을 이용한 강행처리는 사실상 제도적 폭력행위였다. |
한미FTA의 씨앗이 약초인지 독초인지는 찬찬히 따져보고 살펴보기만 한다면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을텐데 그런 과정은 사실상 생략되었다. 독초가 아니라는 반론만 무성했을뿐 독초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또렷한 노력 따위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념의 문제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저 국익의 차원에서 주판알만 제대로 튕겨 보았다면 이러한 국론 분열은 초래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국민들은 자신의 주장대로 하는 것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맞서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논리는 한치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왜 이리 한쪽에 상처를 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일까? 제 스스로도 국가조약을 날치기한 첫번째 국회의원이 되기를 꺼려 비공개 회의를 자처하면서까지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비공개 회의를 자처하면서까지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그래서 독초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통령과 의회가 저지른 제도적 폭력에 울분을 터뜨린다. 결과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이에 앞서 과정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분명 이 조약으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며 살려달라고, 또는 함께 잘 살아보자고 외치는 사람들의 임에 재갈을 물리려 하기 때문이다. 떡고물을 나누어줄테니 잠자코 있으라는 억압적 분위기에 진저리를 치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제도적 폭력은 대항폭력을 낳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시로 발생했던 농민반란이나 항일항쟁 같은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는 김구 선생도 폭력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일제의 폭거에 대항한 인물이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킨 시민군이나 6·10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청년학생과 넥타이부대도 폭력을 활용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빛나는 이유는 대항폭력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제도 폭력에 맞선 대항폭력 그리고 진압폭력의 악순환
물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어느 일방이 무너지지 않는 한 대항폭력은 진압폭력을 부르고, 진압폭력은 또 다른 대항폭력을 유발한다. 이는 또 다시 더 큰 강도의 진압폭력을 자초한다. 폭력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 대항의 방식이 큰 감흥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다. 그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맞서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냈지만, 그들의 제도적 폭력에 비폭력 대항을 고수함으로써 진압폭력의 정당화를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항폭력은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제도적 폭력을 일삼는 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폭력 자체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한국의 독재세력이 목숨을 내 걸고 저항한 소크라테스의 진의를 왜곡하면서까지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쳤던 사례가 전형적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만든 악법을 준수하는 것만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적 행위라고 떠들었다. 제도적 폭력에 맞서는 대항폭력을 도매금으로 후려치기 위한 전형적인 꼼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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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반대 시위대에 대한 물대포. 영하의 날씨에 물대포는 시위대를 화나게 만들고, 경찰과 현 정부에 대한 악감정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
한미FTA를 한나라당 의원들이 기습적으로 강행처리한 날치기 사건은 엄연한 제도적 폭력이다. 다수결의 원리를 내세워 다수결이 갖고 있는 병폐를 고스란히 확인시켜준 사건이다. 심지어 FTA를 걸고 내년 총선을 치른 후 처리하자는 주장이나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인 국민투표를 실시하라는 요구조차 가차없이 내팽겨쳐졌다.
길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촛불을 켜 든 시민들은 폭력적이지 않은 대항의 수단을 선택한 이들이다. 세상천지에 촛불시위보다 더 비폭력적인 시위의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통치세력은 신고제인 집회를 사전 차단하여 그들을 불법집회자로 내몰았다. 그리고 영하의 날씨에 물대포를 동원하여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대항폭력이 없음에도 진압폭력을 자행한 셈이다.
이러한 행태가 비난을 받자 종로경찰서장은 시위대 한복판으로 일부로 들어가 폭력을 유도하는 듯한 행태를 자행했다. 그리고 불법시위대가 현직 경찰서장을 폭행하는 섹시한 기사거리를 양산하는데 성공했다. 폭행을 당한 당사자가 좀 억울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현직 경찰서장이 제복을 입은 채로 뜬금없이 시위대 안으로 파고 들어가 야당의원을 설득하려 했다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성난 시위대를 자극하기 위한 술책으로 의심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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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의 폭력을 피하는 종로 경찰서장. 그는 왜 시위대의 화가 절정에 달해 있던 순간 시위대의 중심으로 걸어들어갔을까? |
여하튼, 이 사건이 벌어지자 굳이 거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메이저 언론사들은 이 폭력행위와 불법행위를 문제삼아 도덕적으로 한미FTA 반대를 매도하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본질에 눈을 감고 지엽적 행위를 문제삼으며 여론전환을 시도하는 중이다. 그들의 주장엔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과 종로경찰서장의 진단서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폭력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김 의원의 돌출행동이나 현직의 고위 경찰관을 집단폭행한 일부 시위대의 행위를 두둔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본질을 왜곡하려는 행태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선을 그러야 한다는 것이다. 소나무 숲에 들어가 한 그루 대나무를 발견하고는 이 밭이 대나무밭이라고 우기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전형적인 수법에 더 이상은 농락당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제도적 폭력이 문제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그릇된 제도적 폭력의 주먹질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혜안을 찾아야 한다. 진정한 국익이 어디에 있는지 머리를 맞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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