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숭고’를 통해 니힐리즘 극복- ㆍ리오타르 (1925 ~ 1998)

소한마리-화절령- 2012. 3. 17. 21:52

숭고’를 통해 니힐리즘 극복

민승기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ㆍ리오타르 (1925 ~ 1998)

ㆍ숭고는 무의미의 보충이 아니라
ㆍ의미 자체의 불충분함을 지적해
ㆍ칸트를 반복하면서 칸트를 극복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의미’를 박탈당한 ‘존재’의 ‘외침’.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 재현될 수도 없는 절규, 왜? 모든 의미와 재현이 철회되었을 때 무엇이 남아있는가? 알 수 없는 고통, 해소할 수 없는 질문. 예술은 의미와 존재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기입하고 지식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증거한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의 발생.’ 리오타르에게 예술 또는 숭고(sublime)는 의미에 앞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지시한다. ‘그것이 발생하고 있다.’ 언어가 포착할 수 없는, 그래서 언어를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의미화할 수 없는 대상의 외침을 리오타르는 다시 질문으로 바꾸어놓는다.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가?’ 사건 역시 불확실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답할지 모른다. 토니 마이어스의 말대로 변화할 수 없는 본질을 전제하고 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타자의 불가해한 욕망에 대한 방어 또는 고정된 형상을 통해 형상 없는 욕망을 길들이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답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있고 포스트모던이란 사건 역시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1960년대 초 아방가르디스트인 바넷 뉴먼은 자신의 세 조각품에 ‘여기 I’, ‘여기 II’, ‘여기 III’, 다른 한 그림에 ‘저기가 아니라 여기’, 다른 두 그림에 ‘지금’, 또다른 두 그림에 ‘존재’라는 제목을 부여하고 ‘숭고한 것은 지금’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한다. 재현의 실패를 지시하는 감정인 숭고는 초월적인 다른 세계를 향하거나 온전했던 과거의 회상, 또는 오지 않는 미래의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놀라움’이다. ‘놀라움’은 단순히 ‘새로움’만을 뜻하지 않는다. 뉴먼의 작품은 아무것도 재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새로운) 내용을 중지시키는, 그것을 거세하는 섬광과도 같은 ‘순간’만이 존재한다. 의미로 귀착될 수 있는 대상은 보이지 않고 의미화할 수 없는 간극, 의미와 존재의 균열, 찢김만이 발생하고 있다. 의미의 새로움이 아닌 불가능성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오타르는 뉴먼의 ‘지금’이 의식에 낯선, 의식을 와해시키는, 그래서 의식이 스스로를 정립하기 위해 망각해야만 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지금’ 발생하는 ‘숭고’는 “사유를 무장해제시키는 의미의 박탈이다”. ‘존재’라는 그림 역시 의미의 박탈로 인해 고통받는 존재의 부름을 기입하고 있다. 숭고는 여기서 윤리적 차원을 획득한다. 초월적 세계로 도피하거나 물질적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두 세계의 간극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산 죽음’은 존재하라!고 명령한다. 현전과 부재의 대립으로 파악할 수 없는 ‘있음’은 의미의 질서 한가운데를 내리치는 섬광이 되어 존재가 숨쉴 공간을 열어놓는다. 존재의 일어남에 응답할 때,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열어놓은 틈을 지속해나갈 때 숭고의 윤리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미학은 ‘감성적인’(sensible) 것을 지시하는 동시에 그것을 부정한다. “생각할 수 있으나 볼 수 없는,” 느껴지지만 대상화할 수 없는 감성적인 것의 불가해함을 길들이기 위해 ‘지적인’(intelligible) 것이 등장한다. 그러나 감성적인 것이 지적인 것의 단순한 기호로 전락하여 지적 세계로의 진입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될 때 니힐리즘이 발생한다. 애슬리 우드워드의 말대로 리오타르의 미학은 숭고를 통해 지성/감성의 위계질서를, 다시 말해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니힐리즘의 바깥에 서고자 했던 리오타르는 점차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니힐리즘의 내부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숭고로 이동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자 시절의 리오타르는 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의미와 존재의 간극을 극복되어야 하는 소외로 경험한다. 그러나 삶과 의미의 틈을 메워 의미있는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곧 사라지고, 간극의 필연성을 인정하지만 삶이 가치없는 것으로 부정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움직임만이 남는다.

<리비도 경제>를 집필하던 당시의 리오타르는 니힐리즘의 최종적 극복을 포기한 채 그것을 거부한다. 기호가 부재하는 초월성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호학 역시 플라톤주의라는 니힐리즘의 변형일 뿐이다. 의미가 끝없이 연기되어 최종적 기원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때에도 그것이 부재하는 초월적 기표를 전제하는 한 니힐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의미의 근원이지만 자신은 의미로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는 “위대한 결여”(great Zero) 역시 삶(존재)을 의미의 결핍으로 규정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삶을 부정하는 니힐리즘일 뿐이다.

리오타르는 부정적 결핍 이전에 존재하는 긍정적 리비도를 통해 재현 체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Fort(갔다)-Da(왔다) 게임. 손자의 실패 놀이를 지켜보고 있는 초월적 관찰자의 자리, 재현의 무대 바깥에서 재현의 놀이에 종속되지 않는 예외적 위치가 재현을 가능하게 해준다면 재현 질서 역시 니힐리즘의 무대이다. 재현되는 대상은 초월성을 획득하고 재현의 무대는 이차적인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반면 욕망을 결핍이나 부정을 모르는 리비도로 경험할 때 삶이 긍정된다. 그러나 우드워드의 말대로 리오타르는 체계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욕망과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순수한 부정에서 순수한 긍정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리오타르는 은폐(dissimulation)란 개념을 통해 욕망과 구조가 이미 겹쳐있음을 지적한다. 욕망은 구조를 작동시키는 힘인 동시에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요소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구조 속에서 구조를 변형시키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재현의 무대 역시 이미 리비도 경제의 변형이자 억압이다. 대립항들의 겹침은 쾌락과 고통이 동시에 발생하는 숭고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정의(justice)에 대한 리오타르의 관심은 간극의 환원불가능성을 촉진시킨다.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규칙들이 있다. 상대의 이질성을 억압하거나 침묵시키지 않고 ‘차이를 존중’해주는 것이 ‘정의’이다. 이제 간극은 결코 메울 수 없는 심연(abyss)이 된다. 리오타르는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간극을 강조하는 칸트를 불러온다. 이론 이성은 윤리학이나 정의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실천 이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성적 판단은 이미 주어진 규칙이나 규율 없이 행해진다는 점에서 정의로운 것이다. 이항대립의 범주로 귀속될 수 없는 이질적 차이들이 창조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우드워드의 논의대로 1980년대와 90년대에 리오타르는 최종적으로 숭고를 통해 니힐리즘을 극복하고자 한다. 능력들간의 갈등이나 동요를 강조하는 칸트를 불러온 후에 ‘칸트보다 더 칸트답게’ 모든 힘들의 통약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리오타르의 숭고는 마치 니힐리즘이 기반하고 있는 간극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바닥 없는 심연이 칸트에게는 이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반면 리오타르에게는 이성의 결핍을 지시하게 된다. 상상력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칸트와 달리 리오타르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두 능력들 간의 갈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고란 바로 이런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감정이다.’ 이성의 초월성, ‘지금 여기’가 아닌 예외적 공간에 거주하는 이성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칸트에 반대하여 리오타르는 해결불가능한 갈등(differend)을 정의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연기되거나 부재하는 원인을 통해 감각적인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지적인 것을 고귀함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판타지 대신 이성에 의해 승화될 수 없는 감성적인 물질성을 숭고라고 주장할 때 리오타르는 칸트 속에서 칸트를 벗어난다. 규정되어야 할 것이 규정되고 있지 않을 때 발생하는 ‘동요’를 판단력의 활동으로 명명하는 칸트를 반복하면서 리오타르는 칸트 체계 자체를 동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요는 의미를 박탈당한, 그러나 의미 체계가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감성으로 남아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이 버릴 수 없는 잉여물로 되돌아올 때 이성은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고 실험적 예술이 시작된다. 숭고는 종속이 아닌 동요를 드러냄으로써, 삶의 무의미함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의 불충분함을 지적한다.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를 반복함으로써 칸트적 이성의 틈, 숭고 자체의 잉여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를 더 알고 싶다면

리오타르 사상의 변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소개서로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윤동구 옮김, 앨피, 2003)가 있다. 리오타르의 가장 잘 알려진 책인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시작으로 숭고, 분쟁, 역사, 비인간, 비평에 이르기까지 리오타르 철학의 전반적 소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책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유정완 외 옮김, 민음사, 1992)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생론적 동기와 특성을 철학, 예술, 역사, 사회의 영역 속에서 논하고 있다. 이 책에는 제임슨의 서문과 리오타르의 예술과 역사에 대한 다른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지식인의 종언>(이현복 편역, 문예출판사, 1993)은 리오타르가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글들의 모음집이다. 리오타르의 다양한 입장들을 살펴볼 수 있다. <리오타르와 비인간>(스튜어트 심 지음, 조현진 옮김, 이제이북스)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포스트 휴먼의 조건으로 이동하는 리오타르의 입장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비인간>이라는 리오타르의 저서에 대한 소개서로도 읽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