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동력은 돈이 아니라 삶의 의미
자본주의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돈이 최고라는 생각인가? 지금 우리는 이러한 통념에 도전한 한 인물을 만나볼 것이다. 그는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그가 살던 당시 유럽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된 관점이 퍼져 있었다. 하나는 공리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여러 형태가 있지만, 공리주의는 인간을 ‘욕망 추구 존재’로 보고, 욕망의 만족=선, 욕망의 불만족=악’으로 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치한다. 영국에서 발전한 경제학은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활동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시장을 사람들의 욕망을 가장 조화롭게 충족시킬 수 있는 장치로 보고, 그것이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둘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공리주의 인간관을 수용하였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시장이 욕망들의 조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충돌과 투쟁을 불러 일으켜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사유재산과 시장을 폐지하는 공산주의를 추구하였다.
베버는 이들과 달리 인간을 ‘의미추구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자기 나름의 주관적 의미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욕망은 동질적이므로 일반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의미는 독특하고 이질적이며, 구체적 맥락에 따라 달라서 그렇게 할 수 없다. 문화는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된 의미의 구성물이다. 의미는 욕망처럼 단순히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자본주의를 욕망추구 이상의 의미추구 현상으로 보고 탐구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책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자본주의의 동력은 자본의 크기보다는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있다. 자본주의 정신이 존재하면 자본이 생성되고 화폐가 공급되어 그 정신을 수행하는 수단 노릇을 하지만, 자본이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 정신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노동의 합리적 조직’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로 설명된다. ①노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②정직하고 근면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이다. ③감정의 동요에 따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경멸하고, 1분 1초까지도 이성으로 잘 계획해서 실천하는 생활을 한다. ④돈을 더욱 많이 벌기 위해 쾌락, 행복, 즐거움 등을 포기하고 쓸데없는 휴식과 게으름을 물리친다. ⑤돈을 모으기 위해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다. 자본가든 노동자든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그러면 왜 합리적 자본주의가 서구에서만 나타났을까? 중국, 인도, 그리고 여타의 지역에서는 왜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베버는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에 많은 영향을 준 칼뱅주의 기독교의 ‘예정 교리’에 주목하였다. 예정 교리는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제공하였다. 이 새로운 삶의 의미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이 되었다. 예정 교리는 절대주권자인 신이 자신의 뜻대로, 일부 사람만 구원되도록 예정해 놓았다고 주장한다. 누가 구원으로 예정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인간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 예정 교리는 사람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놓았다.
첫째, 예정 교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가도록 자극했다. 누구도 신의 결정을 알 수 없으며, 한번 내려진 결정은 결코 번복될 수 없다. 신조차도 그것을 번복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도 자신의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성직자도, 그리고 신도 ……. 사람은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 이러한 신앙 태도에서 근대 개인주의가 형성되었다.
둘째, 예정 교리는 개인들을 신의 영광을 증대시킬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전문 지식과 기술 등을 위주로 하는 합리적 조직 형태로 결합시켰다. 이 조직은 혈연, 지연, 신분 등과 같은 인맥이 아니라 합리적 규칙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것은 어떤 전통적인 조직보다 탁월한 효율성을 나타내었다.
셋째, 예정 교리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존경을 표해야 했던 전통 사회의 위계서열 풍습을 개혁하였다. 칼뱅주의자들은 인간에게 과도한 존경을 표하는 것을 피조물 숭배라고 여겨 배척했다. 이러한 반(反)권위적 태도는 민주주의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넷째, 예정 교리는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고, 정직하고 근면한 직업 생활을 하도록 격려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겨야 한다. 정직하고 근면한 직업 활동에서 오는 성공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이다. 예정 교리에 의하면, 직업 활동에서 신의 영광을 아무리 많이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그러나 직업 활동에 성공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될 수 있다.
다섯째, 예정 교리는 삶 전체를 금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도록 자극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음 내킬 때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아주 계획적으로 꼼꼼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매일 생활 계획표를 꼼꼼하게 만들어 그 계획표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세하게 점검해야 했다. 감정적 충동에 따라 무계획적으로 행동해서는 지속적으로 선행을 할 수 없다. 1분, 1초라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성격을 통제할 수 있는 금욕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여섯째, 예정 교리는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부의 축적은 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미덕이었다. 직업 생활의 성공을 통해 얻어진 물질과 돈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위험시되었던 것은 재산을 가지고 놀면서 흥청망청 쓰는 것이고, 그 결과 게으름과 성적 욕망에 빠져 종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죽으면 영원히 휴식할 수 있으므로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신의 구원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일을 쉼 없이 행해야 한다. 인생은 자신의 선택을 증명하기에는 너무 짧고 귀중한 시간이다. 사람들과의 교제나 한가한 잡담, 사치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잠을 자는 것도 비난받았다.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예정 교리는 노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일단 하나의 제도로 작동하기 시작하자, 그 정신의 원천이었던 종교적 신앙은 사라졌다. 이제 자본주의는 종교적 신앙의 의미를 추구하는 활동에서 단지 생존을 위해 적응해야 하는 거대한 우주로 변했다.
아직도 자본주의 하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추구하는 천민자본주의라고 한탄한다. 정신이 썩은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나라도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없다. 꼭 칼뱅주의 기독교일 필요는 없지만, 자본주의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돈 이상의 삶의 의미와 윤리가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
막스 베버를 더 알고 싶다면
베버는 민족을 궁극적 삶의 의미로 삼았던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독일을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만들기 위한 ‘이상적인 권력 국가 모형’을 제시하였다. 그의 국가 모형에서 정치가, 경제인, 학자, 관료는 각각 민족에 헌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고유 규범을 갖고 있다. 이러한 국가 모형은 유사 나치즘을 지향한다.
정치가의 규범은 <직업으로서의 정치>(전성우, 2007, 나남)에 나와 있다. 정치가는 집합체의 가치와 목적을 제시하는 존재로서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 객관적인 결과에 대한 책임감,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균형감각을 갖추고, 언제든지 악마와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런 정치가를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불렀다. 나머지 직업은 정치가의 지휘를 받는 수단적 존재이다.
경제인의 규범은 가혹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정신을 갖추는 것이다. <유사 나치즘의 눈으로 읽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윤원근, 2010, 신원문화사)은 이런 시각에서 쓰였다. 학자의 규범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전성우, 2006, 나남)에 나와 있다. 학자는 가치에 대해서 언급해서는 안 되고 오직 사실만을 취급해야 한다. 이것이 학문의 ‘가치중립성’이다. 관료의 규범은 자신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성문화된 규칙에 복종하는 것으로, <경제와 사회>(박성환, 1997, 문학과 지성사)의 관료제 논의에 제시되어 있다.
베버는 민족을 궁극적 삶의 의미로 삼았던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독일을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만들기 위한 ‘이상적인 권력 국가 모형’을 제시하였다. 그의 국가 모형에서 정치가, 경제인, 학자, 관료는 각각 민족에 헌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고유 규범을 갖고 있다. 이러한 국가 모형은 유사 나치즘을 지향한다.
정치가의 규범은 <직업으로서의 정치>(전성우, 2007, 나남)에 나와 있다. 정치가는 집합체의 가치와 목적을 제시하는 존재로서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 객관적인 결과에 대한 책임감,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균형감각을 갖추고, 언제든지 악마와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런 정치가를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불렀다. 나머지 직업은 정치가의 지휘를 받는 수단적 존재이다.
경제인의 규범은 가혹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정신을 갖추는 것이다. <유사 나치즘의 눈으로 읽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윤원근, 2010, 신원문화사)은 이런 시각에서 쓰였다. 학자의 규범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전성우, 2006, 나남)에 나와 있다. 학자는 가치에 대해서 언급해서는 안 되고 오직 사실만을 취급해야 한다. 이것이 학문의 ‘가치중립성’이다. 관료의 규범은 자신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성문화된 규칙에 복종하는 것으로, <경제와 사회>(박성환, 1997, 문학과 지성사)의 관료제 논의에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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