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 이해’에 집중한 마지막 철학자 ㆍ사르트르(1905~1980)

소한마리-화절령- 2012. 3. 17. 21:58

‘인간 이해’에 집중한 마지막 철학자

변광배 | 프랑스 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 대표

 

ㆍ사르트르(1905~1980)

누가 뭐라 하든 20세기는 단연코 ‘사르트르의 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 명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2000년에 사르트르의 평전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사르트르의 세기(Le siecle de Sartre)>라고 붙였다. 물론 사르트르는 1905년에 태어나서 1980년에 세상을 떠나 20세기를 다 살지는 못했다. 또한 지난 세기 후반 20년 동안 세계 철학사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이 그에 앞선 80년 동안의 그것보다 더 거셌기 때문에, 지난 세기를 온전히 사르트르의 세기라는 주장의 의미는 어느 정도 퇴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임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성싶다.

“나는 스탕달과 동시에 스피노자가 되고 싶다!” 사르트르의 평생의 지적 기획은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그는 이 기획을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겼는가? 답은 일단 긍정적으로 보인다. 한편으론 <구토> <자유의 길> <말>을 썼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다른 한편으론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비판> <도덕을 위한 노트>를 쓴 철학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파리떼> <알토나의 유폐자들> <악마와 선신> 등을 쓴 극작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성자(聖者) 주네 : 희극배우와 순교자> <집안의 천치> 등을 쓴 문학이론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쓴 참여지식인 등으로서의 모습 역시 더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스탕달’과 ‘스피노자’가 동시에 되고자 했던 사르트르의 지적 기획은 재차 이렇게 요약된다. “나는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졌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모든 기획은 ‘인간’에 대한 이해로 집중된다. 그래서 “마지막 철학자”로 명명되는 사르트르!

사르트르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크게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존재와 무>에서 볼 수 있는 현상학적 존재론의 시각에서 시도된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의식의 주체, 무화작용의 주체, 대자존재로서의 인간, 자유와 초월의 주체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물론 <존재와 무>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 가령 즉자존재로 명명되는 사물들과 대타존재로 명명되는 다른 인간들과 맺는 존재관계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 곧 이 존재들 사이에 정립되는 관계의 ‘직설법(l’indicatif)’이 제시되고 있다. 이 직설법은 후일, 특히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명령법(l’imperatif)’, 즉 ‘도덕론’의 정립 시도로 이어지게 된다.

그 다음으로 <존재와 무>에 이어 이른바 “구조적·역사적 인간학”의 정립을 목표로 하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있다. <존재와 무>에서 시도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고립된 인간, 사회적 지평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반면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는 역사와 사회의 지평에 선 인간,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간, 자기를 둘러싼 물질적 환경 속에서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인간이 겨냥되고 있다.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희소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맺어지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 이들 개인이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 그리고 이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이 시간과 더불어 역사를 형성해가는 과정 등을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유를 빌려 기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역사의 ‘가지성(intelligibilite; 可知性)은 폭력 위에서 포착된다고 보고 있다.

사르트르는 사후 유고집으로 1983년에 출간된 <도덕을 위한 노트>에서 ‘창조’ 행위를 통한 모든 인간들의 이른바 ‘도덕적 전환’ 위에 그 자신의 도덕론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보자면, 인간은 누구나 창조 행위의 주체이고, 이 창조 행위는 이 주체의 자유와 초월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이 창조 행위는 결국 타인에 대한 ‘호소(appel)’이자 ‘증여(don)’이며, 또한 이 호소와 증여는 타인의 자유와 초월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창조 행위를 통해 정립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그들 모두가 자유와 초월의 자격을 유지하는 가운데 정립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은 인간들의 관계는 서로가 주체의 자리를 놓고 서로 투쟁하면서 갈등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고, 주체 대 주체, 자유 대 자유의 관계 정립은 존재론적으로 보아 불가능하다는 <존재와 무>의 논지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사유는 많은 비판에 직면했고 또 직면하고 있다. 가령 <존재와 무>에서 시도된 인간 이해는 인간과 사물 또는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 사이의 지나친 단절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신체의 주체이기도 한 인간은 사르트르의 주장과는 달리 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고공(高空)을 비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이 세계의 일부이며, 따라서 이 세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선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비판이 그것이다. 또한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정립되고 있는 “구조적·역사적 인간학” 역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의 형성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르트르의 주장은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레비스트로스의 강력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폭력 개념을 바탕으로 한 사르트르의 “구조적·역사적 인간학” 정립의 시도는 그의 친구였던 아롱으로부터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아롱은 사르트르를 ‘폭력의 사도(使徒)’로 규정한다. 게다가 인류의 역사를 폭력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주장은 또 한 명의 친구이자 맞수였던 카뮈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리고 <도덕을 위한 노트>에서 시도되고 있는 사르트르의 도덕론 역시 과연 그것이 그의 존재론, 특히 갈등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고 한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어떻게 양립이 가능한지에 대한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20세기를 자신의 세기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사르트르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혹은 그의 여러 사유들 중 시간의 폭력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는 사르트르의 현재성 문제에 다름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사르트르에게서 아직도 유효하고, 또 앞으로도 유효할 수 있는 사유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이다. 시선, 신체 이론 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의 타자 이론은 그 이후에 오는 여러 철학자들, 가령 레비나스, 라캉, 들뢰즈 등의 타자 이론을 아류화(亞流化)시켜 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결합을 위한 사르트르의 노력이다. 지금 프랑스를 비롯해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들뢰즈, 라캉, 지젝 등의 논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결합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면,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위시해 <성자 주네> <집안의 천치> 등과 같은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사르트르의 노력은 선구자적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사르트르에게서 앞으로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영역은 ‘미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그 연구가 일천한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미학’은 사르트르의 전 사유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중요한 하나의 축(軸)이다. 그의 미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참여문학론으로 대표되는 ‘참여미학’(또는 현실미학; esthetique du reel)’과 ‘비현실미학(esthetique de l’irreel)’이 그것이다. “현실은 추하고, 상상하는 의식에 의해 무화된 현실, 곧 비현실은 아름답다”는 것이 바로 사르트르의 ‘비현실미학’의 핵심이다. 이 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들은 ‘이미지’ ‘상상력’ ‘아날로공(analogon)’ 등이다.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사르트르의 모습이 더욱 풍부해지길 기대해 본다.

사르트르를 더 알고 싶다면

한국사르트르연구회(GCES)에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수행한 연구 결과인 <실존과 참여 - 한국의 사르트르 수용(1948~2007)>이 3월 말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된다면 국내 사르트르 수용 및 연구 성과에 대한 전모를 거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관련된 여러 저작들 가운데 입문서로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이학사, 박정태 옮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사르트르의 제일 중요한 저작은 역시 <존재와 무>(삼성출판사, 손우성 옮김)와 <변증법적 이성비판>(나남출판사, 박정자 외 옮김)이다. 사르트르 평전으로는 <사르트르(1905~1980)>(창, 우종길 옮김)와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변광배 옮김)을 권하고 싶다.

사르트르 사상, 특히 그의 <존재와 무>에 대한 해설로는 <자유와 비극 -인간존재론>(문학과지성사, 신오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상명대출판부, 박정자)와 <존재와 무 -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살림, 변광배) 등이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구토>(주우, 김희영 옮김), <자유의 길>(고려원, 최석기 옮김), <말>(민음사, 정명환 옮김), 문학이론 분야에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정명환 옮김), <문학을 찾아서>(민음사, 정명환), <집안의 천치>(고려대출판부, 지영래) 등이 도움이 될 것이다. GCES 홈페이지(www.sartre.or.kr)에서도 사르트르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