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묘(武廟)가 있는 군사학교의 건립을 주장한 이익 |
김 문 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
문묘가 공자를 모신 사당이라면 무묘는 ‘강태공’이라고도 불리는 여상(呂尙)을 모신 사당이다. 여상은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운 장수로서 병법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
중국에 세워진 무묘…조선시대 논의했지만 성사되지 않아 |
무묘가 처음 세워진 것은 당나라 때였다. 당 현종이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올렸듯이 숙종은 여상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올렸다. 그는 안록산의 난으로 곤란을 겪으면서 여상의 무공과 충절을 높이고자 했다. 무묘는 바로 ‘무성왕묘(武成王廟)’의 줄임말이다. 당나라 때의 무묘는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비롯하여 전국 고을에까지 세워졌다. 무묘의 주인공은 여상이고, 배향 인물은 장량(張良)이었으며, 그 좌우에 뛰어난 장수 10인을 모셨다가 훗날에는 64인까지 늘어났다. 중국의 무묘는 명나라 때 폐지되었다. 무묘가 세워진 이후 문무(文武)를 분리할 수 없듯이 문묘와 무묘를 병립할 수 없다는 논의가 있었고, 공자와 여상의 위상을 동일시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명나라 황제는 무신 세력의 발흥을 막고 문치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무묘를 폐지했다. 이후로는 관우를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무성왕묘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관왕묘는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수에 의해 서울에도 세워졌다.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가 그것이다. 우리는 여상이 아닌…관우를 관왕묘에 모셔 우리나라에서 무묘를 건립하자는 논의는 조선 초부터 나타났다. 태종은 문무란 어느 한쪽을 폐지할 수 없는데 공자에게는 제사를 지내면서 무안왕에게 제사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당시 공자를 모신 문묘는 서울의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에 세워져 있었다. 신하들은 태종에게 공자와 여상을 대등하게 모실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세종대의 박아생과 세조대의 양성지는 훈련관 북쪽에 무묘를 설치하여 무사들에게 제사지내게 하자고 국왕에게 건의했다. 훈련원의 전신이었던 훈련관에서는 무사들에게 병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후 성종도 무묘에 관심을 가졌지만 무묘는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 무신보다 문신을 우위에 두었던 시대 분위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성여신은 다시 무묘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조식의 문인이었던 그는 조선이 삼면에 적을 둔 상황에서 후일을 알 수 없다면서, 넓은 곳에 학당을 짓되 뛰어난 장수를 모신 무묘를 건립하여 제사지내고 병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여신이 구상한 무묘는 여상이 주인공이고 제갈량과 악비가 배향 인물이었다. 이익의 무묘 건립 주장…국방강화책과 군사교육을 위해 필요 조선 후기에 무묘의 건립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은 이익이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호민(豪民)이라 불리는 유력자가 군역을 회피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문신이 무신의 고위직까지 장악하여 무신을 하인처럼 부리며, 의욕을 잃은 무신들은 병학의 학습과 무예 단련을 게을리 한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변의 강적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이익은 무교(武敎, 군사학교)를 일으키려면 그 근본이 되는 무묘를 세워야 하며, 지방의 무사는 무묘가 있는 무학(武學, 군사학교)에 들어가 무예를 연마하여 관리가 되는 방안을 제시했다. 지방의 유생이 문묘가 있는 향교에서 학업을 연마하여 관리로 진출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익은 모든 고을에 무묘를 세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는 먼저 서울에 무묘를 세워 중국의 장수와 함께 김유신, 강감찬, 이순신 같은 우리나라 장수를 모시자고 했다. 성균관에 중국과 조선의 학자를 모신 문묘가 있듯이 중국과 조선의 훌륭한 장수를 모신 무묘가 있는 군사학교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무묘에 우리나라 장수를 배향하자는 논의는 세조 때 양성지의 논의를 계승한 것이었다. 이익은 관찰사가 지방에서 무예가 있는 무사를 선발하여 올려 보내면, 무묘가 설치된 서울의 군사학교에서 무경박사(武經博士)들이 이들에게 병학을 가르쳐 장수로 발탁하자고 했다. 이익은 조선의 문교가 어느 정도 갖춰졌으므로 무교를 일으켜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 생각했다. 이익이 구상한 국방강화책은 무사들이 군사학교에 소속되어 역대 장수들을 모신 무묘에 제사지내면서 그들의 뛰어난 행적을 따라 배우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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