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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빈곤층, [송파 세 모녀 사건 그 후] 실제 소득은 '0원'인데 '126만원 소득자'라니..

소한마리-화절령- 2014. 7. 2. 15:29

이슈 벼랑 끝 빈곤층

[송파 세 모녀 사건 그 후] 실제 소득은 '0원'인데 '126만원 소득자'라니..
국민일보 | 입력 2014.07.02 03:05
서울 송파구 세 모녀는 지난 2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죄송하다'는 쪽지를 남겼다. 갑작스러운 생활고는 누구에게나 닥칠수 있는 것 아니냐, 그들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지 않으냐, 우리가 너무 외면했던 것 아니냐는 자성이 일었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자는 주문이 쇄도했고 정치인들은 앞 다퉈 복지 법안을 쏟아냈다. 그리고 �개월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행방불명 남편과 디스크 환자 아내, 벌이 없는 두 사람의 '추정소득'은 126만원

김지영(가명·44·여)씨 남편은 4년 전 집을 나갔다. '미안하다. 찾지 말아 달라'는 쪽지와 빚더미를 김씨에게 떠안기고 사라졌다. 전세 보증금과 김씨가 모아둔 약간의 저축은 빚쟁이들이 나눠 가졌다. 주부였던 그는 어린 딸과 살아가기 위해 24시간 식당에서 새벽일을 했고 쉬는 날에는 시간제 파출부로 나갔다. 4년 만에 몸이 고장 났다.

허리디스크가 심해 수술해야 했지만 병원비 부담에 포기했다. 몇 개월 참고 견디다 얼마 전 앉아 있기도 힘들어 일을 그만둬야 했다. 김씨는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러 주민센터를 찾아갔다. 기가 막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남편 분은 뭐하시나요?" 어렵사리 찾아간 주민센터에서 담당 공무원은 남편 얘기부터 꺼냈다. 행방불명이라고 설명했지만 증명이 안 됐다. 서류상 두 사람은 '부부'였다. 부부 모두 소득 기록이 없고 재산이라곤 월세 보증금 500만원뿐이라 기초생활수급자는 될 수 있었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자활'에 참여해야만 최저생계비를 받을 수 있는 '조건부 수급자'가 된다는 점이었다.

행방불명인 남편과 디스크로 앉아 있기도 힘든 김씨. 둘 다 청소, 간병, 쓰레기 수거 같은 자활근로를 할 수 없는 상태다. 사정을 말했더니 "일을 안 하면 '추정소득'이 매겨져 최저생계비가 깎인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조건부 수급자가 자활에 참여하지 않으면 매달 약 63만원(올해 기준)씩 벌이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소득이 전혀 없어도 그렇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복지제도에 무임승차하는 걸 막기 위해 둔 제도인데, 이 추정소득에 가로막혀 송파 세 모녀도 기초생활수급을 받지 못했다.

김씨의 실제 소득은 '0원'이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 안에선 '126만원 소득자'로 분류된다. 자신의 추정소득과 함께 살지도 않는 남편의 추정소득을 합한 금액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인 3인 가구에는 보통 월 107만여원이 최저생계비로 지급되지만 그는 이 '소득'이 반영돼 20만원 정도밖에 받지 못한다. 한 달 식비도 해결이 안 되는 금액이다.

담당 공무원은 남편과 이혼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행방불명된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하려면 오랜 시간과 많은 돈이 든다. 김씨는 이런 조건부 수급이라도 받을지, 차라리 수급을 포기할지 고민하고 있다.

사망 후에야 받은 지원, 장례비 75만원

이윤석(가명·66)씨는 2004년 사업에 실패해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가족마저 그를 등졌고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이어갔다. 그가 살던 곳은 경기도 시골마을의 산자락 아래 작은 컨테이너였다. 여름엔 숨 막히게 더웠고 겨울엔 이불을 겹겹이 덮어도 온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못했고 도와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혼자 10년을 살았다.

사건이 벌어진 건 지난달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5월 어느 날,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켰는데 컨테이너 내부가 가열된 탓인지 폭발이 일어났다. 이씨는 온몸에 화상을 입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그가 살던 컨테이너는 녹아버렸다. 퇴원해도 갈 곳 없는 그를 걱정한 지인이 보건복지콜센터(129)에 긴급복지지원을 신청했다.

정부는 현장조사를 벌인 뒤 의료비 300만원과 퇴원 후 임시 거처를 제공키로 했다. 하지만 이씨는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0년간 별다른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일용직 노동자로 '컨테이너 인생'을 살아온 이씨는 숨진 뒤에야 정부로부터 장례비 75만원을 받게 됐다.

60대 극빈층을 사각지대로 밀어낸 '남편 전처의 아들딸'이란 존재

윤향자(가명·69·여)씨는 젊은 시절 억척스럽게 돈을 벌었다. 마흔이 넘어 만난 남편과 단둘이 살며 생계를 책임지는 건 늘 윤씨 몫이었다. 보험 영업, 식당 일, 마트 계산원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직장에서 쫓겨난 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온 남편(63)은 전혀 일을 못 했다.

5년 전 윤씨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모아놓은 돈은 치료비와 생활비로 날렸다. 요즘은 남편이 주워오는 폐지를 팔아 겨우 끼니만 해결할 뿐이다. 윤씨는 치아가 다 빠졌는데도 돈이 없어 틀니를 못 했다. 몇 년을 죽만 먹고 지냈다. 월세 보증금 500만원을 다 까먹어 언제 쫓겨날까 전전긍긍하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도 윤씨 부부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다. 언제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남편 전처의 아들과 딸'이 문제였다. 부양 의무가 있는 두 자녀의 소득 때문에 수급 자격요건을 못 맞췄다. 부양의무자와 연락두절 상태라는 게 증명되면 기초생활수급의 장애물인 '부양의무제'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윤씨가 아플 때 남편이 몇 번 연락했던 게 발목을 잡았다.

남편이 아들딸과 통화한 기록, 남편 통장에 몇 번 찍힌 10만∼20만원. 정부는 이 기록을 근거로 늙고 병든 윤씨 부부의 생계를 오래전 헤어진 '전처의 자녀들'에게 넘겼다. 5년 가까이 자녀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지만 그런 사정은 감안되지 않는다.

세 모녀가 서로에게 부양의무자여서 최저생계비 지원을 못 받았듯 윤씨네도 부양의무제에 가로막혔다. 이처럼 부양의무제에 걸려 복지사각지대로 내몰린 빈곤층은 117만명(2012년 기준)으로 추산된다.

장애진단 못 받고 교통사고 후유증 앓다 실의에 빠진 50대 가장

정순철(가명·52)씨는 한때 사장님이었다. 의류사업으로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2010년 부도를 못 막아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빚잔치를 하고 나니 월세 보증금 500만원과 오토바이 한 대만 남았다. 퀵서비스 일을 시작했다.

비극은 이듬해에 닥쳤다. 퀵서비스 배달을 가다 교통사고가 났다. 어깨와 다리에 철침을 박고 몇 달간 일을 못 했다. 하지만 장애진단이 나오지 않았다. 아내도 일을 하고 있었고 정씨도 근로 능력이 있다고 간주돼 추정소득이 매겨졌다. 정부는 그를 기초생활수급자로 받아주지 않았다. 긴급복지지원 제도는 있는지도 몰랐다.

정씨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 월세가 몇 달치 밀리자 아내는 집주인에게 몇 번씩 무릎 꿇고 울며 빌었다. 그런 아내가 201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결핵을 앓던 아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세 모녀 사건 이후에야 정씨는 긴급복지지원을 알게 됐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면 밀린 가스요금 해결이 급했다. 정씨는 아직도 몸과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아픈 아들과 중학생 딸을 위해 조건부 수급자가 되기로 했다. 그가 다시 실의에 빠지지 않는 것, 그래서 자활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남은 세 식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됐다.

취재에 응한 10여명의 사회복지사들은 이 네 사람의 사연에 대해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나라 빈곤층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몸이 아픈데 치료를 못 받고, 살 곳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생활고에 생사를 고민하는 삶. 세 모녀 사건 이후 달라진 건 이런 이웃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는 점이다. 세월호 충격에 신음하고 월드컵에 희망을 걸었다가 국무총리 바꾼다며 우왕좌왕한 넉 달간, 그들을 위해 바뀐 것은 거의 없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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