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와 호찌민 사이, 1968년 그날
한겨레21입력2014.10.25 15:10[한겨레21][고경태의 1968년 그날] (28) 반전운동에서 문화혁명으로 번진 68운동, 그 한가운데 있었던 퐁니·퐁넛촌에서의 74명의 죽음
#1967년 10월9일, 체가 죽었다
아르헨티나인이자 쿠바인인 혁명가. 그날 오후 1시께, 볼리비아 차코의 작은 시골 학교 교실에서 최후의 순간을 당당하게 맞이했다. 오른쪽 장딴지에 총상을 입고, 수염이 뽑히고, 두 손이 뒤로 묶인 채였다. 체, 즉 체 게바라는 권총을 든 볼리비아 정부군 하사관 마리오 테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쏘아, 겁내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마리오 테란은 떨었다. 테란은 옆에 있는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의 재촉에도 발사를 주저했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술을 몇 잔 마신 뒤였다. 총알은 정확히 맞지 않고 빗나갔다. 체의 숨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끊어졌다. 주검은 10월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사이에 볼리비아 바예그란데에 주둔하던 부대로 옮겨졌고, 11일 외딴 장소에서 화장됐다.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쓴 1967년의 마지막 일기엔 축축한 절망이 묻어 있다. 체는 그곳에서 '제2, 제3의 베트남전쟁을 일으키자'는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고 약화시켜야 한다며 생전에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쿠바인이자 아르헨티나인으로서 라틴아메리카 어느 국가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
체가 체 게바라가 된 것은 혁명가의 길을 걷고 나서였다. 1928년 아르헨티나의 상류층 백인 가정에서 태어나 스물다섯 살에 의학박사 학위를 딸 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였다. 1959년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끈 뒤엔 쿠바 국립은행 총재에 이어 산업부 장관에 올랐다. 이제야말로 편히 살아도 욕먹지 않을 수 있었다. 1965년 4월, 쿠바와 이별하고 아프리카 콩고의 혁명군을 지원하러 갔다. 1966년 11월3일엔 우루과이 여권을 들고 현지 사회·경제를 연구하러 온 대머리 학자로 위장해 볼리비아 라파스 공항에 내렸다. 4일 뒤 산악지역인 냥카우아수로 이동했다. 반독재 특공대원 53명과 함께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난관투성이였다. 뜻밖에도 볼리비아 민중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주지 않았다. 미국과 대척점에 있던 소련도 돕지 않았다. 1962년 10~11월 쿠바 미사일 기지를 놓고 미국과 벼랑 끝 진통을 겪었던 소련은 라틴아메리카를 둘러싼 미국과의 충돌을 피했다. 미국 린든 존슨 정부는 볼리비아군에 잡힌 그를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체가 세계 전복에 완전히 실패했고 전투 중에 죽었다고 세계에 알리는 선전 효과가 컸다. 체의 나이 39살이었다.
#1968년 4월4일, 킹이 죽었다
미국인 침례교 목사이자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그날 오후 6시1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 있는 로레인 모텔의 2층 발코니에서,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친구에게 말을 건네다 총을 맞았다. 총알은 오른쪽 뺨을 뚫고 턱을 지나 어깨에 박혔다. 파업 중이던 흑인 환경미화원 노조에 힘을 주러 온 여행이었다.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1시간 만에 숨졌다. 범인은 탈옥수 제임스 얼 레이라는 인물이었다. 무슬림이자 급진적 흑인해방운동가인 맬컴 엑스가 1965년 2월21일 뉴욕 맨해튼에서 16발의 총탄을 맞고 살해당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암살의 검은 그림자가 이번엔 비폭력 평화주의 흑인운동가 마틴 루서 킹을 덮쳤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네 명의 제 어린 자식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인격으로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꿈입니다."(1963년 8월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의 연설)
킹은 그 꿈을 향해 한발씩 나아갔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미국 흑인들은 사람 대접을 못 받았다. 백인과의 결혼이 불가능했다. 백인과 함께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대다수 레스토랑에서 출입을 금지당했다. 영화관과 극장, 버스와 전차에서는 맨 뒷자리만 이용할 수 있었다. 1955년 킹이 살던 몽고메리의 버스 안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흑인 여성이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킹은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이끌면서 버스회사의 인종분리 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연방 대법원 판결을 얻어냈다. 흑인 민권운동의 유명한 지도자가 되어갔다. 무서운 대가가 따랐다. 수시로 경찰에 체포됐고, 칼을 맞기도 했으며, 집에서는 폭탄이 터졌다. 간디에게 배운 비폭력 저항운동의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고난에 찬 투쟁은 1964년 7월 공공장소와 학교에서 인종분리를 금지하는 시민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킹은 1964년 35살이라는 나이로 역대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킹의 흑인 민권운동은 1966년부터 도시 빈민 문제에 대한 비판과 전쟁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그에게 베트남전은 미친 짓이었다. 엄청난 돈을 이국의 전쟁터에 쏟아붓지 말고 미국 내 빈곤 퇴치에 써야 했다. 베트남전 비용 지출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라는 실업·빈곤 퇴치 정책과 모순됐다. 베트남전에 징집된 미군의 80%는 노동자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흑인의 전사율은 두 배였다. 인종차별 철폐와 베트남전 반대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킹은 1967년 4월15일 뉴욕에서 열린 대규모 반전 평화 행진에 참여했다. 25만 명이 함께했다. 그해 여름엔 빈곤에 절망한 흑인들이 거리에서 불을 지르고 상점을 약탈했다. 경찰 진압 과정에서 43명이 죽었다. 10월21일엔 10만여 명이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국 국방성 건물로 행진했다. 젊은이들은 징집 영장을 꺼내 불태웠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총신에 꽃을 꽂는 퍼포먼스를 했지만, 구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미국 사회는 인종갈등과 반전운동이 뒤엉킨 거대한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1968년 4월9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킹의 아버지가 목사로 일했던 교회였다. 킹의 죽음에 흥분한 흑인들의 폭동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4월23일엔 컬럼비아대학 학생들이 5개 대학 건물을 점거했다. 그들의 구호는 베트남전과 인종차별 반대였다. 일주일 만에 경찰이 덮쳤다. 150명이 중상을 입고 700명이 체포됐다. 대학 점거운동이 다른 대학으로 번져갔다. 존슨 대통령은 판매점이나 숙박업소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킹의 나이 39살이었다.
#1968년 6월6일, 바비가 죽었다
미국 상원의원이자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그 전날인 5일 밤, 로스앤젤레스 앰버서더 호텔의 조리장을 지나다 저격당했다. '바비'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로버트 케네디는 예비선거 연설을 위해 캘리포니아주에 머물던 중이었다. 범인은 바비의 이스라엘 지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이라는 20대의 요르단계 이민자였다. 부상당한 수행원 5명과 함께 머리에 심한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날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1963년 11월22일 텍사스 댈러스에서 둘째형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해 숨진 지 4년7개월 만이었다. 미국인들이 또 한 명의 전도유망한 정치인을 잃는 순간이었다.
6월8일 뉴욕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케네디가의 9남매 중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는 조문을 읽었다. "형을 그저 착하고 점잖은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형은 불의를 보면 바로잡으려 하고, 고통을 보면 치료해주려 하고, 전쟁을 보면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베풀었던 것,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원했던 것들이 언젠가는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비는 남매 중 일곱째였다. 둘째형 존 에프 케네디가 1961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법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취임 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마피아를 소탕했고, 흑인 민권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 '백화점에서 앉기 농성'을 하던 마틴 루서 킹이 구속되자 판사에게 직접 전화해 석방시킨 변호사가 바로 바비였다. 형이 죽은 뒤인 1964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68년 3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출신 현직 대통령인 존슨은 대통령직 출마 포기 선언을 했다. 바비는 총을 맞기 직전이던 1968년 6월 초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1967년부터 베트남전을 반대해온 그였다. 바비는 반전세력의 희망이었다.
베트남에선 베트남인들과 미국인들이 죽어나갔다. 1968년 2월, 베트콩들의 구정대공세에 대응하다 무려 1100명의 미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그 참혹한 장면이 미국인들의 안방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국 본토도 전쟁터였다. 1968년 2월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오렌지버그에서 벌어진 평화적 반전시위에 경찰이 발포를 했다. 흑인 3명이 사살되고, 34명이 부상을 입었다. 매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몰랜드 장군은 "베트남으로 20만 명을 추가 파병해달라"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그해 6월 웨스트몰랜드 장군의 후임으로 주월미군사령관직에 오른 에이브럼스 장군은 "북폭(북베트남 폭격) 중단은 미군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1968년 8월26일, 시카고 인터내셔널 앰피시어터 애비뉴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연히 그곳에 바비는 없었다.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가 예비선거에서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당 지도부의 후원을 받은 휴버트 험프리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유진 매카시의 지지자들이 주장했던 반전 조항은 끝내 당 정강에 오르지 못했다. 험프리의 지명을 막으려는 반전단체 회원 등 4천여 명이 전당대회장 바깥에서 시위를 했다. '청년국제당'(이피·Yippies)의 리더 제리 루빈은 돼지 한 마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며 민주당을 조롱했다. 경찰은 퇴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시위대를 공격했다. 그날은 '피의 전당대회'로 남았다. 3개월 뒤인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험프리는 공화당의 반공주의자 리처드 닉슨에게 0.7%포인트 차로 패했다. 바비는 지하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의 나이 42살이었다.
#1969년 9월2일, 호 아저씨가 죽었다
베트남인들이 추앙한 민족 지도자. 베트남 독립 24돌 기념일이던 그날 오전 9시45분, 병석에서 불규칙하게 뛰던 맥박이 정지했다. 그가 사이공에서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슈트레빌호의 주방보조로 취직해 조국을 떠난 것이 1911년 6월. 유럽·아시아·아프리카·미국 등 세계 각국을 떠돌다 귀국한 것은 1945년. 그로부터 24년 만에 베트남의 독립운동과 혁명의 큰 별로 빛나던 거인이 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유언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유해를 화장한 다음 조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 뿌리고 장소를 밝히지 말아달라." 조국 통일에 바친 삶을 보여주는 말이었지만, 그의 주검은 화장되지 않았다. 대신 미라가 되었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산당의 창건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주석으로서 베트남 최고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인들은 스스럼없이 그를 '호 아저씨'(박호, Bac Ho)라 친근하게 불렀다.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소박한 성자'였다. 착하고, 사심 없고, 청빈해 보였다. 치부하지 않았고, 결혼하지 않았고, 작은 집에 살았다. 러시아혁명의 레닌 같기도 했고, 인도 민족해방운동의 간디 같기도 했다. 우루과이의 한 신문에선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다"라는 조문 기사를 내보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 군인들은 북베트남과 싸우는 남베트남 사람들마저 "가장 존경하는 베트남 사람은 호찌민"이라고 말할 때면 혼란을 느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베트남은 상상할 수 없었다. 미국은 성자를 괴롭히는 악마의 이미지로 전세계에 투사되곤 했다.
호 아저씨는 말년에 별로 힘이 없었다. 베트남노동당(나중에 베트남공산당으로 개칭)은 집단지도 체제였다. 레주언이 베트남노동당 총서기에 취임한 1957년 이후 호 아저씨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1960년대 중반 그의 주된 역할은 '인자한 호 아저씨'로서 학교나 공장, 집단농장을 방문해 사회주의와 민족통일의 대의를 알리는 일이었다.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레주언은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호 아저씨를 걱정하시게 하지 맙시다. 우리의 최고 지도자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되지요."
1960년대 말 호 아저씨의 군대는 4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16살에서 45살 사이의 남자들은 모두 징집 대상이 되었다. 베트남전쟁 기간에 미군은 5만여 명이 죽었다. 한국군은 5천여 명이 죽었다. 베트남인은 남북을 합쳐 100만 명이 죽었다. 1967년 미국 대통령 존슨은 호 아저씨에게 편지를 보내 "폭격을 끝낼 용의가 있지만 그것은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이 남부 침투를 중단했을 때만 가능하다"고 썼다. 호 아저씨는 "베트남민주공화국에 대한 폭격을 무조건 중단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존슨이 폭격을 중단할 용의를 비친 것은 구정대공세 이후, 1968년 3월부터였다. 5월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사이의 평화회담이 시작됐다. 평화의 싹이 보였다. 그 싹은 쉽게 자라지 못했다. 1968년 11월 닉슨이 대통령이 된 뒤 폭격은 계속됐다. 호 아저씨의 맥박이 꺼져가던 1969년 9월에도, 전쟁은 언제 끝날지 불투명했다. 그의 나이 79살이었다.
#그리고, 1968년 2월12일
이 연재물의 이름은 '1968년 그날'이다. 1968년이란 무엇인가. 나는 '체 게바라와 호찌민 사이'라 말하겠다. 둘은 1968년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해 5월2일 파리 서부 낭테르대학(이후 파리10대학으로 바뀜)에서 발화된 베트남전 반대시위의 불꽃은 경찰의 과격한 진압과 학교 당국의 일방적인 학교 폐쇄에 대한 반발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솟구쳤다. 처음에는 파리의 다른 대학생들과 연대하더니, 다음에는 노동자들과 손을 잡았다. 나중에는 수십 개국의 젊은이들이 함께 행동하는 전세계적 투쟁으로 불타올랐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은 물론 사회주의권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남미의 멕시코에도 불이 붙었다. 마틴 루서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쓰러진 뒤 흑인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으로 술렁이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숫자가 세 배로 불어난 대학생들은 낡은 세계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건 플래카드엔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체의 사진이 박혔다. 체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상상하는 이들의 정신적 후원자였다. 그들은 "유럽에서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어내자"는 체의 메시지를 구호로 만들었다. 더불어 "호! 호! 호찌민"을 연호했다.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고도로 발전된 나라인 초현대적인 미국 군대가 베트남 농민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백인 정착자들이 북미 인디언들을 공격한 것처럼 말입니다."(독일 학생 미카엘 폰 엥엘하르트) 남녀로 나뉜 기숙사를 없애달라는 정도의 작은 요구(낭테르대학)에조차 귀를 막는 권위적인 유럽의 대학 당국은 미국 군대와 한 패거리로 여겨졌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학은 미군 침략자의 다른 얼굴이었다. 차별받던 여성들과 성소수자들도 함께 스크럼을 짰다. 학생운동의 물결은 민주화운동을 넘어 문화혁명으로 발전했다.
1968년의 세계적 대항쟁은 나중에 '68운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말했다. "68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회 격변이었다." 미국의 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말했다.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프랑스 2월혁명 -필자)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 실패로 끝났다. 둘 다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체와 호 아저씨 사이의 1968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인 38선의 강파른 철덩어리"(시인 김수영) 아래 있었다. 그해 2월12일, 대한민국 군대는 베트남 퐁니·퐁넛촌이라는 농촌마을을 공격했다. 늙은 농부들과 그의 아들·딸, 손자·손녀까지 74명이 죽었다. 그중 3명인 쩐티안과 쩐반만, 응웬딘다오의 나이는 모두 1살이었다.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k21@hani.co.kr
■ 참고하거나 인용한 책: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실천문학사·2000),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윌리엄 제퍼슨 클린턴·물푸레·2004), <마틴 루터 킹 검은 예수의 꿈>(카트린 하네만·한겨레아이들·2010), <호찌민 평전>(윌리엄 J. 듀이커·푸른숲·2003), <1968년의 목소리>(로널드 프레이저·박종철출판사·2002), <미국 현대사 산책>(강준만·인물과사상사·2010),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앨런 브링클리·휴머니스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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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월9일, 체가 죽었다
아르헨티나인이자 쿠바인인 혁명가. 그날 오후 1시께, 볼리비아 차코의 작은 시골 학교 교실에서 최후의 순간을 당당하게 맞이했다. 오른쪽 장딴지에 총상을 입고, 수염이 뽑히고, 두 손이 뒤로 묶인 채였다. 체, 즉 체 게바라는 권총을 든 볼리비아 정부군 하사관 마리오 테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쏘아, 겁내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마리오 테란은 떨었다. 테란은 옆에 있는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의 재촉에도 발사를 주저했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술을 몇 잔 마신 뒤였다. 총알은 정확히 맞지 않고 빗나갔다. 체의 숨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끊어졌다. 주검은 10월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사이에 볼리비아 바예그란데에 주둔하던 부대로 옮겨졌고, 11일 외딴 장소에서 화장됐다.
"힘든 하루였다. 너무 지쳐서 어금니를 악물었다."(2월23일) "우울한 하루."(2월25일) "포위망은 점점 좁아지고, 계속해서 네이팜탄이 터진다."(3월28일) "차를 타고 지나가는 군인 두 사람을 쏠 용기가 나지 않았다."(6월3일) "천식이 심각할 정도로 도지려고 한다. 치료약은 하나도 없다."(6월23일) "아주 우울한 하루였다."(6월26일) "동지들이 나를 바쿠닌(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필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제까지 흘린 피와 또 다른 베트남이 생길 경우 피를 흘리게 될 사람들을 불쌍해한다."(7월24일) "새벽 2시에 행군을 중단하고 쉬었다. 한 발짝도 더 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10월7일)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쓴 1967년의 마지막 일기엔 축축한 절망이 묻어 있다. 체는 그곳에서 '제2, 제3의 베트남전쟁을 일으키자'는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고 약화시켜야 한다며 생전에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쿠바인이자 아르헨티나인으로서 라틴아메리카 어느 국가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
체가 체 게바라가 된 것은 혁명가의 길을 걷고 나서였다. 1928년 아르헨티나의 상류층 백인 가정에서 태어나 스물다섯 살에 의학박사 학위를 딸 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였다. 1959년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끈 뒤엔 쿠바 국립은행 총재에 이어 산업부 장관에 올랐다. 이제야말로 편히 살아도 욕먹지 않을 수 있었다. 1965년 4월, 쿠바와 이별하고 아프리카 콩고의 혁명군을 지원하러 갔다. 1966년 11월3일엔 우루과이 여권을 들고 현지 사회·경제를 연구하러 온 대머리 학자로 위장해 볼리비아 라파스 공항에 내렸다. 4일 뒤 산악지역인 냥카우아수로 이동했다. 반독재 특공대원 53명과 함께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난관투성이였다. 뜻밖에도 볼리비아 민중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주지 않았다. 미국과 대척점에 있던 소련도 돕지 않았다. 1962년 10~11월 쿠바 미사일 기지를 놓고 미국과 벼랑 끝 진통을 겪었던 소련은 라틴아메리카를 둘러싼 미국과의 충돌을 피했다. 미국 린든 존슨 정부는 볼리비아군에 잡힌 그를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체가 세계 전복에 완전히 실패했고 전투 중에 죽었다고 세계에 알리는 선전 효과가 컸다. 체의 나이 39살이었다.
#1968년 4월4일, 킹이 죽었다
미국인 침례교 목사이자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그날 오후 6시1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 있는 로레인 모텔의 2층 발코니에서,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친구에게 말을 건네다 총을 맞았다. 총알은 오른쪽 뺨을 뚫고 턱을 지나 어깨에 박혔다. 파업 중이던 흑인 환경미화원 노조에 힘을 주러 온 여행이었다.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1시간 만에 숨졌다. 범인은 탈옥수 제임스 얼 레이라는 인물이었다. 무슬림이자 급진적 흑인해방운동가인 맬컴 엑스가 1965년 2월21일 뉴욕 맨해튼에서 16발의 총탄을 맞고 살해당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암살의 검은 그림자가 이번엔 비폭력 평화주의 흑인운동가 마틴 루서 킹을 덮쳤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네 명의 제 어린 자식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인격으로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꿈입니다."(1963년 8월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의 연설)
킹은 그 꿈을 향해 한발씩 나아갔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미국 흑인들은 사람 대접을 못 받았다. 백인과의 결혼이 불가능했다. 백인과 함께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대다수 레스토랑에서 출입을 금지당했다. 영화관과 극장, 버스와 전차에서는 맨 뒷자리만 이용할 수 있었다. 1955년 킹이 살던 몽고메리의 버스 안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흑인 여성이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킹은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이끌면서 버스회사의 인종분리 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연방 대법원 판결을 얻어냈다. 흑인 민권운동의 유명한 지도자가 되어갔다. 무서운 대가가 따랐다. 수시로 경찰에 체포됐고, 칼을 맞기도 했으며, 집에서는 폭탄이 터졌다. 간디에게 배운 비폭력 저항운동의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고난에 찬 투쟁은 1964년 7월 공공장소와 학교에서 인종분리를 금지하는 시민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킹은 1964년 35살이라는 나이로 역대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킹의 흑인 민권운동은 1966년부터 도시 빈민 문제에 대한 비판과 전쟁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그에게 베트남전은 미친 짓이었다. 엄청난 돈을 이국의 전쟁터에 쏟아붓지 말고 미국 내 빈곤 퇴치에 써야 했다. 베트남전 비용 지출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라는 실업·빈곤 퇴치 정책과 모순됐다. 베트남전에 징집된 미군의 80%는 노동자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흑인의 전사율은 두 배였다. 인종차별 철폐와 베트남전 반대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킹은 1967년 4월15일 뉴욕에서 열린 대규모 반전 평화 행진에 참여했다. 25만 명이 함께했다. 그해 여름엔 빈곤에 절망한 흑인들이 거리에서 불을 지르고 상점을 약탈했다. 경찰 진압 과정에서 43명이 죽었다. 10월21일엔 10만여 명이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국 국방성 건물로 행진했다. 젊은이들은 징집 영장을 꺼내 불태웠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총신에 꽃을 꽂는 퍼포먼스를 했지만, 구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미국 사회는 인종갈등과 반전운동이 뒤엉킨 거대한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1968년 4월9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킹의 아버지가 목사로 일했던 교회였다. 킹의 죽음에 흥분한 흑인들의 폭동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4월23일엔 컬럼비아대학 학생들이 5개 대학 건물을 점거했다. 그들의 구호는 베트남전과 인종차별 반대였다. 일주일 만에 경찰이 덮쳤다. 150명이 중상을 입고 700명이 체포됐다. 대학 점거운동이 다른 대학으로 번져갔다. 존슨 대통령은 판매점이나 숙박업소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킹의 나이 39살이었다.
#1968년 6월6일, 바비가 죽었다
미국 상원의원이자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그 전날인 5일 밤, 로스앤젤레스 앰버서더 호텔의 조리장을 지나다 저격당했다. '바비'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로버트 케네디는 예비선거 연설을 위해 캘리포니아주에 머물던 중이었다. 범인은 바비의 이스라엘 지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이라는 20대의 요르단계 이민자였다. 부상당한 수행원 5명과 함께 머리에 심한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날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1963년 11월22일 텍사스 댈러스에서 둘째형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해 숨진 지 4년7개월 만이었다. 미국인들이 또 한 명의 전도유망한 정치인을 잃는 순간이었다.
6월8일 뉴욕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케네디가의 9남매 중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는 조문을 읽었다. "형을 그저 착하고 점잖은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형은 불의를 보면 바로잡으려 하고, 고통을 보면 치료해주려 하고, 전쟁을 보면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베풀었던 것,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원했던 것들이 언젠가는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비는 남매 중 일곱째였다. 둘째형 존 에프 케네디가 1961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법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취임 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마피아를 소탕했고, 흑인 민권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 '백화점에서 앉기 농성'을 하던 마틴 루서 킹이 구속되자 판사에게 직접 전화해 석방시킨 변호사가 바로 바비였다. 형이 죽은 뒤인 1964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68년 3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출신 현직 대통령인 존슨은 대통령직 출마 포기 선언을 했다. 바비는 총을 맞기 직전이던 1968년 6월 초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1967년부터 베트남전을 반대해온 그였다. 바비는 반전세력의 희망이었다.
베트남에선 베트남인들과 미국인들이 죽어나갔다. 1968년 2월, 베트콩들의 구정대공세에 대응하다 무려 1100명의 미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그 참혹한 장면이 미국인들의 안방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국 본토도 전쟁터였다. 1968년 2월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오렌지버그에서 벌어진 평화적 반전시위에 경찰이 발포를 했다. 흑인 3명이 사살되고, 34명이 부상을 입었다. 매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몰랜드 장군은 "베트남으로 20만 명을 추가 파병해달라"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그해 6월 웨스트몰랜드 장군의 후임으로 주월미군사령관직에 오른 에이브럼스 장군은 "북폭(북베트남 폭격) 중단은 미군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1968년 8월26일, 시카고 인터내셔널 앰피시어터 애비뉴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연히 그곳에 바비는 없었다.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가 예비선거에서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당 지도부의 후원을 받은 휴버트 험프리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유진 매카시의 지지자들이 주장했던 반전 조항은 끝내 당 정강에 오르지 못했다. 험프리의 지명을 막으려는 반전단체 회원 등 4천여 명이 전당대회장 바깥에서 시위를 했다. '청년국제당'(이피·Yippies)의 리더 제리 루빈은 돼지 한 마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며 민주당을 조롱했다. 경찰은 퇴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시위대를 공격했다. 그날은 '피의 전당대회'로 남았다. 3개월 뒤인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험프리는 공화당의 반공주의자 리처드 닉슨에게 0.7%포인트 차로 패했다. 바비는 지하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의 나이 42살이었다.
#1969년 9월2일, 호 아저씨가 죽었다
베트남인들이 추앙한 민족 지도자. 베트남 독립 24돌 기념일이던 그날 오전 9시45분, 병석에서 불규칙하게 뛰던 맥박이 정지했다. 그가 사이공에서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슈트레빌호의 주방보조로 취직해 조국을 떠난 것이 1911년 6월. 유럽·아시아·아프리카·미국 등 세계 각국을 떠돌다 귀국한 것은 1945년. 그로부터 24년 만에 베트남의 독립운동과 혁명의 큰 별로 빛나던 거인이 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유언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유해를 화장한 다음 조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 뿌리고 장소를 밝히지 말아달라." 조국 통일에 바친 삶을 보여주는 말이었지만, 그의 주검은 화장되지 않았다. 대신 미라가 되었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산당의 창건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주석으로서 베트남 최고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인들은 스스럼없이 그를 '호 아저씨'(박호, Bac Ho)라 친근하게 불렀다.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소박한 성자'였다. 착하고, 사심 없고, 청빈해 보였다. 치부하지 않았고, 결혼하지 않았고, 작은 집에 살았다. 러시아혁명의 레닌 같기도 했고, 인도 민족해방운동의 간디 같기도 했다. 우루과이의 한 신문에선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다"라는 조문 기사를 내보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 군인들은 북베트남과 싸우는 남베트남 사람들마저 "가장 존경하는 베트남 사람은 호찌민"이라고 말할 때면 혼란을 느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베트남은 상상할 수 없었다. 미국은 성자를 괴롭히는 악마의 이미지로 전세계에 투사되곤 했다.
호 아저씨는 말년에 별로 힘이 없었다. 베트남노동당(나중에 베트남공산당으로 개칭)은 집단지도 체제였다. 레주언이 베트남노동당 총서기에 취임한 1957년 이후 호 아저씨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1960년대 중반 그의 주된 역할은 '인자한 호 아저씨'로서 학교나 공장, 집단농장을 방문해 사회주의와 민족통일의 대의를 알리는 일이었다.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레주언은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호 아저씨를 걱정하시게 하지 맙시다. 우리의 최고 지도자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되지요."
1960년대 말 호 아저씨의 군대는 4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16살에서 45살 사이의 남자들은 모두 징집 대상이 되었다. 베트남전쟁 기간에 미군은 5만여 명이 죽었다. 한국군은 5천여 명이 죽었다. 베트남인은 남북을 합쳐 100만 명이 죽었다. 1967년 미국 대통령 존슨은 호 아저씨에게 편지를 보내 "폭격을 끝낼 용의가 있지만 그것은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이 남부 침투를 중단했을 때만 가능하다"고 썼다. 호 아저씨는 "베트남민주공화국에 대한 폭격을 무조건 중단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존슨이 폭격을 중단할 용의를 비친 것은 구정대공세 이후, 1968년 3월부터였다. 5월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사이의 평화회담이 시작됐다. 평화의 싹이 보였다. 그 싹은 쉽게 자라지 못했다. 1968년 11월 닉슨이 대통령이 된 뒤 폭격은 계속됐다. 호 아저씨의 맥박이 꺼져가던 1969년 9월에도, 전쟁은 언제 끝날지 불투명했다. 그의 나이 79살이었다.
#그리고, 1968년 2월12일
이 연재물의 이름은 '1968년 그날'이다. 1968년이란 무엇인가. 나는 '체 게바라와 호찌민 사이'라 말하겠다. 둘은 1968년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해 5월2일 파리 서부 낭테르대학(이후 파리10대학으로 바뀜)에서 발화된 베트남전 반대시위의 불꽃은 경찰의 과격한 진압과 학교 당국의 일방적인 학교 폐쇄에 대한 반발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솟구쳤다. 처음에는 파리의 다른 대학생들과 연대하더니, 다음에는 노동자들과 손을 잡았다. 나중에는 수십 개국의 젊은이들이 함께 행동하는 전세계적 투쟁으로 불타올랐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은 물론 사회주의권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남미의 멕시코에도 불이 붙었다. 마틴 루서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쓰러진 뒤 흑인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으로 술렁이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숫자가 세 배로 불어난 대학생들은 낡은 세계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건 플래카드엔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체의 사진이 박혔다. 체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상상하는 이들의 정신적 후원자였다. 그들은 "유럽에서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어내자"는 체의 메시지를 구호로 만들었다. 더불어 "호! 호! 호찌민"을 연호했다.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고도로 발전된 나라인 초현대적인 미국 군대가 베트남 농민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백인 정착자들이 북미 인디언들을 공격한 것처럼 말입니다."(독일 학생 미카엘 폰 엥엘하르트) 남녀로 나뉜 기숙사를 없애달라는 정도의 작은 요구(낭테르대학)에조차 귀를 막는 권위적인 유럽의 대학 당국은 미국 군대와 한 패거리로 여겨졌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학은 미군 침략자의 다른 얼굴이었다. 차별받던 여성들과 성소수자들도 함께 스크럼을 짰다. 학생운동의 물결은 민주화운동을 넘어 문화혁명으로 발전했다.
1968년의 세계적 대항쟁은 나중에 '68운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말했다. "68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회 격변이었다." 미국의 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말했다.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프랑스 2월혁명 -필자)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 실패로 끝났다. 둘 다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체와 호 아저씨 사이의 1968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인 38선의 강파른 철덩어리"(시인 김수영) 아래 있었다. 그해 2월12일, 대한민국 군대는 베트남 퐁니·퐁넛촌이라는 농촌마을을 공격했다. 늙은 농부들과 그의 아들·딸, 손자·손녀까지 74명이 죽었다. 그중 3명인 쩐티안과 쩐반만, 응웬딘다오의 나이는 모두 1살이었다.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k21@hani.co.kr
■ 참고하거나 인용한 책: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실천문학사·2000),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윌리엄 제퍼슨 클린턴·물푸레·2004), <마틴 루터 킹 검은 예수의 꿈>(카트린 하네만·한겨레아이들·2010), <호찌민 평전>(윌리엄 J. 듀이커·푸른숲·2003), <1968년의 목소리>(로널드 프레이저·박종철출판사·2002), <미국 현대사 산책>(강준만·인물과사상사·2010),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앨런 브링클리·휴머니스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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