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물다 간...

[스크랩] Chopin / 21 Nocturnes(녹턴 전곡) - Daniel Barenboim, piano

소한마리-화절령- 2014. 12. 1. 23:24










Chopin / 21 Nocturnes(녹턴 전곡)

Daniel Barenboim, piano

track list...


1. B-moll, Op.9 N°1 : Larghetto


2. Es-dur, Op.9 N°2 : Andante


3. H-dur, Op.9 N°3 : Allegretto


4. F-dur, Op.15 N°1 : Andante Cantabile


5. Fis-dur, Op.15 N°2 : Larghetto


6.G-moll, Op.15 N°3 : Lento


7. Cis-moll, Op.27 N°1 : Larghetto


8. Des-dur, Op.27 N°2 : Lento Sostenuto


9. H-dur, Op.32 N°1 : Andante Sostenuto


10. As-dur, Op.32 N°2 : Lento


11. G-moll, Op.37 N°1 : Andante Sostenuto


12. G-dur, Op.37 N°2 : Andantino


13. C-moll, Op.48 N°1 : Lento


14. Fis-moll, Op.48 N°2 : Andantino


15. F-moll, Op.55 N°1 : Andante


16. Es-dur, Op.55 N°2 : Lento Sostenuto


17. H-dur, Op.62 N°1 : Andante


18. E-dur, Op.62 N°2 : Lento


19. E-moll, Op.Post. 72 N°1 : Andante


20. Cis-moll, Op.Post. : Lento Con Gran Espressione


21. C-moll, Op.Post.





1994 Deutsche Grammophon, Hamburg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라는 두가지 역할을 극히 성공적으로 수행한 몇 안돼는 인물이다.
그만큼 그는 다재다능한 음악인인 것이다.
지휘자로서 그는 기본적으로 푸르트벵글러를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고 있다.
바렌보임의 음악적 자세는 낭만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비록 초기에는 지휘자로서 약간 산만한 듯한 인상을 주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해결되었다. 자신이 이끌던 파리 관현악단에서 그는 지휘자로서의 자질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키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시카고 교향악단과 녹음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5번’이나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은 지휘자로서의 바렌보임의 진모를 보여주는 대표 명연들이다.
그는 파리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특히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그 중에서도 베를리오즈와 프랑크, 생상스 등은 여타 대 지휘자들의 그것과 비교할 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우수한 지휘솜씨를 보인다.
지휘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그는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슈베르트, 슈만 등과 같은 고전과 낭만주의 작품에 특히 솜씨를 보인 바 있다.

어릴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1942년 11월 15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피아니스트인 뿌리있는 음악가정에서 자란 그는 그 때문에 어릴때부터 소위 ‘영재교육’을 받으며 재능을 키워갔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계열의 실력있는 피아니스트였는데, 어린 바렌보임은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테크닉 전반을 익혀 겨우 7살 무렵에는 베토벤 프로그램으로 독주회를 열어 천재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유대인이었던 바렌보임 일가는 1952년에 이스라엘에 이주하였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음악공부를 위해 10세 때 이스라엘 재단의 장학금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 입학해 서구 문명 전반과 패턴을 익히며 대 피아니스트에로의 꿈을 하나한 실현시켜갔다.
그는 여기서 저 유명한 명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는 한편, 당대의 지휘자인 이고르 마르케비치로부턴 지휘법을 배웠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왕성했던 나머지 바렌보임은 실내악에까지 손을 대 첼리스트인 엔리코 마이나르디로부터 체임버 뮤직 관련 공부를 하며 전방위적인 연주자이자 아티스트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갔다.
이즈음 그는 거장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에게 인정 받아 솔리스트로서 기용되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4년 파리로 유학해 교수법의 일인자로 정평 높은 나디아 불랑제 휘하에 가 더욱 깊은 음악수업을 받았다.
1년후에는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해 카를로 체키의 밑에서 피아노와 지휘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57년 1월 드디어 그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심포니 오브 디 에어’와의 협연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정식으로 미국 데뷔를 했다.
이날의 연주는 공연장을 찾은 음악 관계자 및 많은 사람들에게 차세대를 이끌 천재 피아니스트의 출현을 알리는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바렌보임은 막힘이 없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임에도 지휘자에 대한 욕구도 대단해 피아노와는 별개로 지휘봉을 잡는 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처음으로 지휘를 시작한 것은 1962년경부터이다.
그리곤 1965년 오랫동안 친분을 다져온 영국 실내관현악단을 대동하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지휘하며 지휘자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약 10년 동안 객원 형태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지휘자로서 고전파의 교향곡과 근대, 현대의 작품 등 가리지 않고 폭넓은 레파토리를 소화해 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로부터도 종종 객원 지휘를 위촉받기 시작했다.
1967년과 1968년의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런던 교향악단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71년 1월에는 뉴욕 필하모닉까지 지휘하며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확고하게 그 위상을 굳히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그는 시카고 교향악단, LA 필하모니, 런던 필하모닉 등 여러 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지휘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바렌보임은 1967년 명 첼리스트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을 해 또한번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바렌보임은 1975년 6월 파리 관현악단의 4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드디어 자신만의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샤를르 뮌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게오르그 솔티 등 명 지휘자들이 거쳐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이니만큼 바렌보임은 이 악단의 지휘봉을 잡음으로써 드디어 유능한 지휘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고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은 전례없는 음악인 중의 하나로 기록되게 되었다.

바렌보임은 취임하자마자 팔방미인적인 자신의 스타일 만큼이나 파리 관현악단의 활동 범위를 크게 넓히기에 이른다.
그는 이 악단의 단원을 중심으로 한 실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또 전속 합창단까지 창설하는 등, 그간 이 악단의 일상적인 활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1989년에는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할 예정이었으나 당국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그것은 성사되지 않아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출처 : 다음신지식>







 

조강지처 버린 ‘주홍글씨’ 폄훼당한 ‘전인적 음악성’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조강지처를 버린, 인정머리 없는 이기주의자라고 여겼다.
이 ‘비호감’의 강도는 한국에서 특히 강했다.
그의 연주와 지휘는 실제보다 격하되기 일쑤였고 음반도 도통 팔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적어도 한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 얘기다.
바렌보임과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결혼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음악 커플의 탄생이었다.
바렌보임이 26세, 뒤 프레가 22세였던 1968년의 일이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뒤 프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키 작은 유대인’ 바렌보임과 결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 프레가 결혼을 위해 종교까지 유대교로 바꿨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뒤 프레에게 닥쳐온 불행의 그림자.
그녀는 첼로를 켜다 자주 템포를 놓쳤으며, 나중에는 눈이 침침해지면서 악보마저 보이지 않았다.
‘다발성 근육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
그렇게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점점 굳어가던 그녀는 결국 73년 무대에서 내려왔고 87년 눈을 감았다.
42년의 짧은 생애였다.

빼어난 연주력에 아름다운 외모, 게다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았던 순정한 여인.
이런 ‘훌륭한’ 아내를 돌보지 않은 ‘싸가지 없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난 후, 바렌보임을 언제나 따라다녔던 이 주홍글씨는 그의 연주에 대한 폄훼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음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를 미워했으며,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정서적으로 불편해했다.
게다가 바렌보임은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 이상은 내게 필요치 않다”고 공공연히 발언함으로써,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그렇게 ‘감정적 공분’을 샀던 바렌보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였다.
그 결정적 계기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만남이었고, 두 사람이 5년간 나눈 대화의 주요 부분을 간추린 <평행과 역설>이야말로 바렌보임의 이미지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바렌보임이 <평행과 역설>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참조 : 웹에서 검색후 재편집>

 

 

 

 

 

 

 

 

출처 : 사이회42
글쓴이 : 트로피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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